소식 + 공지 + 방명록 외 기타 주접대기

<연재>

지금은 신작 연재를 쉬고 있습니다. :)

안개 도시 모음곡 (프로젝트 ILN 독자 참여) / 예스24 E연재
마과학온천함선비행담 베스타 ~라신느 꿈의 저편~ / 예스24 E연재

<출간>

2016.  6. 인어의 바다 / 그래출판 (TL, 19세 미만 구독불가)
2016.  2. 안드로이드여도 괜찮아 / 온우주
2010. 12. 전자책 단편선 뿌와뿌와 벌레 / 피우리 ('뿌와뿌와 벌레'외 12종 수록)
2010.  5. 아빠의 우주여행 / 황금가지 ('아빠의 우주여행' 수록)
2009.  8. 한국환상문학단편선2 / 웅진 시작 ('파랑새' 수록) / 절판

<ORPG>

성관마 13시대 캠페인 'Dice & Devotee'

<땅주인 음지식물>

* 별채 - 여기 (취미생활 외)
* 텃밭 - 츄베랄's RPG 풀때기밭 (RPG 전용)

<기타>

PSN : Chuverall
Battle.net : 츄베랄#3236

[박앵귀/이바x치즈루] 세한(歲寒)에, 고절(孤節) 글과 그림

- 토바 후시미가 발발하고, 이바가 왼팔을 잃은 이후
- 야세의 마을을 나와 오사카성으로 가는 만 하루 간의 이야기



세한(歲寒)에, 고절(孤節)


게이오 4년(1868년), 1월.

야세의 마을을 벗어나 오사카까지는 그리 멀지 않았다. 키미기쿠의 말에 따르면 통상 반나절 정면 충분히 다다를 수 있는 거리였지만, 지금은 사방에 삿초의 잔당이 퍼져있으므로 그리 녹록한 상황이 못 됐다. 사람이 오가는 길을 벗어나 돌아가는 편이 안전했다. 다만 산세가 깊어질수록 험준한 길이 연속해서 나와 속도는 더뎌질 수밖에 없었다.
치즈루는 앞서 걸으며 걸리적거리는 나뭇가지며 돌부리를 치우는 이바의 뒷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힘든 일을 겪은 지 하루도 지나지 않았다. 아무리 의지가 강한 사람이더라도 정신적으로 지치지 않을 리 없을 텐데, 그런 걱정이 무색하게도 평소와 다름없었다. 곧은 어깨와 등을 향했던 시선이 왼팔로 미끄러져 내려갔다. 잘려나가고 어깻죽지까지 검붉은 피로 물든 소맷자락이 마치 꿈같이 끔찍했던 과거의 증명으로 남아있었다. 그의 왼팔은 돌이킬 수 없는 상처를 입었고, 그의 의지로 잘려나갔으며, 불길하고 강대한 이형의 팔이 빈자리를 차지했다. 지금은 붕대로 동여매 감추었지만, 형태를 감추기는 어려운지 이질적인 모습 그대로였다. 가슴이 욱신거리며 아팠다.
오니의 팔이 이바에게 어떤 영향을 줄지는 오센도 장담하지 못했다. 단지 ‘거대한 힘을 손에 넣으면 그에 따른 반작용도 반드시 있을 것이다’며 말끝을 흐렸을 뿐이었다. 오센은 그것이 저주라 말했다. 이바는 어떤 시련이 닥치더라도 이겨내 보이겠다며 웃었다. 그것은 그 자신에게 하는 말이기도 하며, 동시에 걱정하는 사람들을 안심시키는 목적의 말이기도 했다. 그는 언제나 그랬다. 어렵고 힘든 일이 있을 때, 거기에 무너지지 않도록 자신을 채찍질하면서 타인을 염려했다. 지나칠 정도로 다정하고 곧은 면모에 치즈루는 안심과 불안을 함께 느꼈다.

“치즈루?”

귓가에 감기는 목소리에 정신이 들었다. 깊게 생각에 빠져있었다. 이바의 걱정스런 표정과 마주했다. 치즈루는 순간 말문이 막혀 멍해졌다.

“괜찮아요? 지쳤나요?”
“아……”
“허긴 야세의 마을에서도 거의 쉬지 못했죠. 이 인근이라면 삿초 병사들의 기색도 없으니 조금 쉬었다 가요.”

괜찮으니 서두르자고, 그렇게 말하고 싶었지만 이상하게 목에서 말이 걸려 나오지 않았다. 치즈루의 무언을 긍정의 의미로 받아들인 이바는 적당한 나무 아래를 앉기 편하도록 정리해주었다. 치즈루가 호의를 고맙게 여기고 자리에 앉았다. 기둥에 등을 대자 갑작스럽게 피로가 몰려들었다. 계속 긴장하고 있어서 피로를 느낄 새가 없었다. 말이 나오지 않았던 이유도 몸이 이미 피로로 곤죽이 된 상태였기 때문임을 깨달았다.
눈이 가물거렸다. 아무리 힘들어도 여기서 잠들면 안 된다며 이를 악물고 졸음을 떨치려고 애썼다. 그런 치즈루의 노력을 헛되이 만든 건, 이바의 손이었다. 온기를 머금은 이바의 오른손이 치즈루의 눈가를 살며시 덮었다.

“괜찮으니까 잠깐 자요. 너무 늦지 않게 깨울 테니까.”
“하지만-”
“쭉 강행군이니 지금 쉬어두는 편이 낫습니다. 괜찮으니까, 이럴 땐 의지해주세요.”

다정한 목소리와 온기에 더 이상의 저항은 의미가 없었다. 치즈루는 옆에 앉은 이바의 어깨에 고개를 기대고 쭉 붙들고 있던 의식의 끈을 놓았다. 어두운 심연 속으로 빨려 들어가 다시는 빠져나올 수 없을 것 같다는 불안감이 돌연 엄습했다. 치즈루는 잠들기 전, 필사적으로 손을 움직여 이바의 옷자락을 쥐었다.
반드시 악몽이 찾아온다.
예감은 틀리지 않았다.

치즈루, 하고 누군가가 불렀다. 마지막으로 들었던 이바의 목소리는 아니었다. 그립고, 애틋하고, 간절히 바랐으며, 이제는 슬프고 원망스러운 목소리였다.

“치즈루. 또 악몽을 꾸었느냐?”

빛바랜 기억 속의 풍경이었다. 이바를 만나고서 조금씩 떠오르기 시작한 다섯 살 무렵의 세상이 눈앞에 펼쳐져 있었다. 에도의 유키무라 진료소였다. 켜켜이 쌓인 책과 약과 도구를 담은 함, 희미한 약재의 냄새. 꿈이 아니라 현실이라 믿을 만큼 생생한 감각이었다.
아버지, 유키무라 코도가 눈앞에 서있었다. 치즈루의 정신은 다섯 살 자신의 몸속에 갇힌 채였다. 그래서 왜 그랬냐고,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느냐고 물을 수 없었다. 공허한 외침일 뿐이었다.
코도는 몸을 낮춰 다섯 살 치즈루와 시선을 맞추었다. 그리고 단호한 표정으로 말했다.

“잊어라. 잊어 버려야 한다. 꿈에서 무엇을 보았건, 생각 해내선 안 돼.”

마치 주술 같았다. 그렇게 코도가 말하면 정말로 모든 걸 다 잊어버려야 할 것 같았다.

“네가 잊지 않으면 곤란해져. 알겠니, 치즈루? 아무 것도 떠올려선 안 된다. 네가 기억하면 우린 이렇게 살 수가 없단다. 그건 싫지?”

잊어라. 잊어버려야 한다. 치즈루는 다섯 살 자신이 아닌, 현재의 자신에게까지 미치기 시작한 말에 귀를 틀어막았다. ‘괴롭고 힘든 일을 잊지 않으면 살 수 없다’라는 명령이 무의식에 새겨져, 치즈루는 다섯 살 이전의 모든 기억을 스스로 묻어버렸다. 분명 그 기억 속엔 잊어버려선 안 될 소중한 무언가도 있었을 터였다. 아니, 분명히 있었다. 지금은 전혀 생각나지 않게 되어버렸다.
혼란스러운 치즈루를향해 코도가 변함없이 온화한 목소리로 물었다.

“이바 군의 왼팔을 보고 어떤 감정을 느꼈느냐. 가슴이 찢어질 것처럼 아팠지? 차라리 꿈이라고 모든 걸 치부해버리고 싶을 만큼. 잊어버리고 싶을 만큼. 그렇지 않니?”

내면의 자신을 꿰뚫어보는 눈과 말이었다. 치즈루는 새파랗게 질려 고개를 저었다.

‘아니야.’
“그건 전부 나쁜 꿈이었단다, 치즈루. 잊어버리렴.”
‘아니야. 그러고 싶지 않아.’

코도가 비릿한 웃음을 지었다. 그 자리에서 당장 도망치고 싶은데, 얼어붙은 것처럼 발이 움직이지 않았다. 엄습하는 절망과 함께 그리웠던 풍경이 무너지고 새카만 어둠만 남았다. 옆에 기척이 나 돌아보니, 키가 크고 무서운 표정을 지은 남자가 자신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시선만으로도 사람을 죽일 수 있을 것 같은 살기였다.

“넌 괴물이다, 유키무라 치즈루.”

타케다 칸류사이가 무자비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의 오른 팔은 이바와 똑같이 오니의 팔이었다.

“네가 평범한 인간처럼 살겠다는 그릇된 욕망을 바란 결과가 무엇인가? 너는 네 소중한 남자를 같은 괴물로 만들어 버리지 않았나? 너 때문에 이노우에가 죽었다. 네가 신선조에 있었기 때문에 토도도 나찰이 됐다. 나 또한 이 꼴이 됐지. 너는 신선조를 망쳤다. 너의 존재란 마치 역병신이지 않은가?”

치즈루는 비명을 질렀다. 줄곧 가슴을 죄고 있던 죄책감과 공포가 한꺼번에 터졌다.

‘아니야, 아니야! 그러고 싶지 않았어. 결코 그렇게는-’

기다렸다는 듯 코도가 손을 내밀었다.

“자, 치즈루. 잊어버리려무나. 다 잊어버리면 편해진단다. 그러면 우리는 이전과 다름없이 살아갈 수 있단다.”
‘아버지……’

점철된 절망 속에서 코도의 목소리는 세상 무엇보다도 달콤했다. 그러나 치즈루는 필사적으로 저항했다. 저 손을 잡으면 돌이킬 수 없게 된다. 이윽고 치즈루의 주위에 무수한 사람들의 형태가 생겨나 그녀의 지난 시간을 비난하고 매도하기 시작했다. 어릴 적 자신을 괴물이라 손가락질하며 돌을 던진 친구들이기도 했고, 에도 시절 친하게 지냈던 소녀들의 모습이기도 했고, 교토에서 만난 신선조 사람들이기도 했다. 헤이스케와 산난이 나찰의 모습으로 자신을 향해 위선자라 말할 때는 가슴을 잡아 뜯고 싶을 만큼 고통스러웠다. 치즈루는 소리가 되지 못한 비명과 오열을 내지르며 차라리 미쳐버리고 싶다고 생각했다.

“그렇게나 고통스러우면서 왜 잊어버리지 않느냐?”

코도가 이해할 수 없다며 물었다.

‘더 이상 도망치고 싶지 않아요. 세상 모든 사람들이 날 미워해도- 그래도- 아무리 슬프고 힘들다고 해도, 이젠 잊어버리고 싶지 않아.’

치즈루는 쭉 자신을 기억해준 이바를 떠올렸다. 어린 시절 한 약속을 지금까지 지켜온 그에게 더 이상 면목 없는 짓을 하고 싶지 않았다. 인간이 아니게 되는 길을 선택하면서 까지 약속을 지켜준 그를 외면하고 싶지 않았다.
코도는 싸늘한 시선으로 치즈루를 노려볼 뿐이었다.

‘이바 씨.’

치즈루가 이바의 이름을 불렀다. 그러자 다시 세상이 파했다.
꽃내음 가득한 바람이 불어왔다. 또 그리운 풍경이 펼쳐졌다. 진료소의 입구 앞이었다. 치즈루는 코도의 곁에서 손을 흔들며 인사하는 소년의 모습과 마주했다. 어린 소년답지 않게 의젓했지만, 얼굴에는 헤어짐의 슬픔을 숨기지 못한 기색이 역력했다. 다섯 살 치즈루의 눈에는 보이지 않았던 표정이었다.
벚꽃이 흩날리는 봄의 끝에서 치즈루는 떠나가는 하치로 오빠의 등을 생각해냈다. 다섯 살 치즈루에게 너무나 힘들었던 이별이었고, 그렇기에 잊어버렸던 순간이었다. 어린 마음에도 그것이 마지막임을 알았다. 붙잡아선 안 된다는 사실도 알았다. 미련도 아픔도 꾹꾹 속에만 담아두어, 슬픔을 느낄 새도 없이 잊어버린 기억이었다.

“그래요. 기억해내 주었군요.”

하치로 오빠의 모습이 시야에서 사라진 직후 치즈루의 손을 잡은 사람이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본디 코도의 손이었어야 했을 손은 붕대가 감겨있는 크고 묘한 형태였다. 치즈루의 시야가 손을 따라 올라가자, 하치로 오빠를 쏙 빼닮은 아름다운 사람이 치즈루를 내려다보며 따듯하게 웃고 있었다.

“이바 씨.”

치즈루가 그의 이름을 불렀다. 막혔던 목소리가 나왔다. 눈을 한 번 깜박이자, 높은 시야가 가까워졌다. 치즈루는 더 이상 다섯 살의 모습이 아니었다. 눈물이 났다. 눈물샘이 파열하자 쉴 새 없이 흘러내려서, 때문에 치즈루는 무슨 말을 할 수가 없었다.

“치즈루.”

꿈에서 언제 깨었는지 알 수 없어 혼란스러웠다. 정신이 들자 치즈루는 이바의 왼손을 붙들고 펑펑 울고 있었다.

“미안해요, 이바 씨. 제가, 그러니까……”
“당신 탓이 아닙니다.”

이바는 치즈루가 가장 듣고 싶었던 말을 한 치의 망설임 없이 말해주었다.

“당신은 정말로 성실하고 다정한 사람이니까, 분명 모든 일에 책임감과 죄책감을 느끼고 있을 테죠? 그러지 말라는 말은 하지 않겠습니다. 그렇지만 이것만큼은 기억해 주세요. 세상 사람들이 모두 당신을 손가락질하며 탓하더라도, 저는 그러지 않을 거란 걸. 당신 탓이 아니라고 말할 테니까요.”

치즈루는 더욱 울음을 멈출 수가 없었다. 그저 한마디만을 되풀이했다. 치즈루의 마음이 무엇보다도 우선으로 느끼는 하나의 감정이었다.

“살아있어서 다행이에요. 이바 씨, 정말로, 살아있어 주어서, 고마워요.”

* * * * *

말없이 걷는 시간이 쭉 이어졌지만 불편함은 없었다. 치즈루는 자신이 한 일에 대해 부끄러움을 금치 못했고, 이바는 치즈루를 배려해 모른 척 해주었다.
험한 산길은 거의 끝나가고 있었다. 곧 민가가 나타날 터였고, 그 곳을 지나면 오사카 영내였다. 겨울이라 해가 빨리 졌으므로 발걸음을 서둘렀다. 산자락의 끝에서 두 사람은 삿초군의 잔당들을 발견했다.

“아무래도 패잔병 수색을 하고 있나 보군요.”

수풀 그림자에 몸을 감추고 정황을 지켜보던 이바가 말했다. 치즈루도 긴장해 적들의 움직임을 예의 주시했다. 다행히 두 사람이 있는 방향으로 움직이는 기색은 없었지만, 주변 일대를 순찰하려는 듯 보였다.

“어쩌죠? 저길 넘어가야 금방일 텐데.”
“마냥 기다리기도 위험하니, 최대한 눈에 띄지 않게 돌아서 움직이도록 하죠. 어두워서 잘 보이지 않을 테니까 제 손을 잡으세요.”

두 사람은 조금 더 산을 돌아 삿초군이 포진하지 않은 길을 찾기로 했다. 패잔병들이 오사카성으로 이동할 것은 자명했으므로 어느 정도는 예상한 일이었다. 한참을 걷자 간신히 인적이 없는 길을 발견할 수 있었다. 이미 빛은 사라져서 희끄무레한 달빛을 의지해 걸을 수밖에 없었다.

“윽……!”
“이바 씨? 왜 그러세요?”

앞서 걷던 이바가 짧은 신음소리를 냈다. 파사삭 하는 소리가 들린 걸 보아 나뭇가지나 어딘가에 크게 걸린 것 같았다.

“머리카락이 나뭇가지에 걸렸습니다. 잠깐만 기다려 주세요.”

이바가 손을 뻗어 휘감긴 머리카락을 더듬었지만, 머리 끈과 함께 단단히 얽혀서 잘 풀리지 않았다. 보다 못한 치즈루가 손을 도왔다.

“끈을 푸는 편이 낫겠어요.”
“죄송합니다.”

치즈루가 먼저 이바의 머리에 묶인 끈의 매듭을 풀었다. 한데 올려 묶은 머리가 파스스 흘러내리며 겨우 나뭇가지에 걸린 머리카락도 해방됐다. 이바는 풀린 머리가 어색한지 뒷머리를 만지작거리며 치즈루를 돌아보았다. 치즈루가 어깨 너머로 머리카락이 흘러내린 이바의 모습을 생경한 눈으로 바라보았다.
아름답다고 생각했지만, 정말로 아름다운 사람이란 걸 새삼 깨달았다. 만지면 어떤 부드러운 갈기를 쓰다듬는 느낌이 들 것 같다고 생각했다. 치즈루가 이바의 머리 끈을 든 채로 뚫어져라 쳐다보자, 이바는 당혹해 고개를 갸웃했다.

“제 얼굴에 뭐라도 묻었나요?”
“아, 아니오. 이바 씨는 정말로……”

아름다워요, 라고 말하려다 멈칫했다. 그처럼 버젓한 사내에게 해도 될 표현인지 잠깐 고민했다가 역시 하지 말아야겠다고 마음먹었다. 치즈루는 이바가 던지는 의아한 시선을 우야무야 흘려 넘기고서 끈을 돌려주었다.

“묶으실 수 있겠어요?”
“물론이죠. 이 정도 쯤은.”

이바가 호언하고 흘러내린 머리카락을 한데 모아 원래처럼 묶으려고 했으나, 끈을 손으로 집어든 순간 크게 낭패한 표정을 지었다. 왼손이 아무래도 뜻대로 움직이지 않는 것 같았다. 크기나 날카롭고 긴 손톱의 존재가 익숙하지 않아, 끈을 떨구거나 머리카락을 놓치거나 했다. 치즈루가 그 모습을 울어야할지 웃어야할지 모를 표정으로 지켜보다 나섰다.

“제가 묶어드릴게요. 앉아보세요.”
“……부탁드립니다.”

이바는 정말로 면목 없어 고개를 들지 못하고, 축 처진 등을 보이고 앉았다. 치즈루는 조금 설레는 마음으로 이바의 머리카락에 손가락을 얽어 부드럽게 빗어보았다. 예상대로, 손끝에 닿는 감촉이 무척 좋았다. 조심조심 한데 모아 쥐고, 끈을 감아 묶기 시작했다.

“옛날에 이런 일이 있었던 것 같아요.”

치즈루가 기시감을 느끼고 말했다.

“있었습니다. 그 땐 반대였지만요.”
“역시 이바 씨였군요. 붉은색이 잘 어울린다고 빨간 머리 끈으로 제 머리를 묶어 주셨죠?”

이바에 대해 잊었던 순간에도 그가 한 말은 뇌리 어딘가에 남아서 치즈루의 습관으로 남았다. 그 기억들은 교묘하게 바뀌어 코도의 언행으로 대체되었지만, 지금은 확실히 알 수 있었다. 이바가 조용하게 잠긴 목소리로 말했다.

“비록 기억하지 못해도, 당신의 마음 한 자락에 제가 있었다는 사실이 기뻤어요.”

이바의 뒷목에서 열기가 느껴졌다. 열이 전염됐는지, 치즈루의 볼도 따끈해졌다. 치즈루는 두색으로 엮어 묶는 머리끈의 교차가 어쩐지 씨실과 날실로 엮는 인연 같다고 생각했다.
끈의 매듭을 단단히 지어 마무리하고서 두 사람은 다시 길을 걸었다. 겨우 민가를 지나 오사카 영내로 접어들자 시야가 닿는 저편에 성의 불빛이 보이기 시작했다. 치즈루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한나절 정도의 시간이었는데, 며칠은 걸은 기분이 들었다.
다른 사람들은 도착해 있을지, 누구 하나 다친 건 아닌지 걱정이 앞섰다. 이바가 치즈루의 불안을 알아보고 달래주었다.

“괜찮을 겁니다. 토시 씨와 신선조 여러분은 분명 먼저 가서 적을 맞을 준비를 하고 있을 거예요.”

옆에서 해주는 안도의 말이 눈물 날 만큼 고마웠다. 치즈루는 감정을 가다듬고 고개를 끄덕였다.

“조금만 더 힘을 내요, 치즈루.”
“네. 이바 씨. 고맙습니다.”

두 사람이 발걸음을 재촉했다. 차가운 바람이 불어와 살갗을 에어도 아픔을 느끼지 못할 만큼 상념으로 가득 찼다.
치즈루는 고작 1년 전의 일을 생각했다. 그 땐 모두와 신년을 웃으며 보냈다. 언제까지고 즐거웠던 나날이 계속되리란 보장은 못했지만, 최소한 이처럼 격렬한 파국은 없었다. 왜 이렇게 돼버렸을까. 앞으론 어떻게 되는 걸까. 아득하고 막막한 감정이 엄습해 치즈루는 눈을 한 번 질끈 감았다 떴다. 꿈속에서 들었던 코도와 타케다의 말이 스쳐지나갔다. 그 말들은 두 사람의 형체를 빌린 치즈루 자신의 죄책감과 불안이었다. 도망치지 않겠다고 마음먹었다.
모든 것이 변해가지만 세한의 차가움은 변하지 않았다. 또 하나, 치즈루는 변하지 않는 사람을 생각해냈다. 물론 외향은 많이 변했고 그를 둘러싼 상황 또한 급변했지만, 본질적인 의미에서 변하지 않고 치즈루의 곁에 존재하는 사람이 바로 곁에 있었다. 그 사실이 고맙고 미안했다. 치즈루의 시선을 느꼈는지, 이바가 배려를 담뿍 담아 웃어주었다.

오사카 성이 목전이었다. 치즈루는 번민을 털어냈다.
지금은 무엇보다도 맞닥뜨린 현실을 바로 봐야 할 때였다.


<終> 20170607 RALL in <박앵귀 ~진개~ 바람의 장>

2017~ 박앵귀 그림 모음 글과 그림


박앵귀 타오르고 있습니다. 정확히는 이바 하치로 x 유키무라 치즈루 커플링입니다! 。゚ヽ(*゚´Д`゚)ノ゚。 어차피 글 연성 계속 올리고 있었으니까 아시는 분은 아셨겠지만...... 백업용으로 슥슥

[박앵귀/이바x치즈루] 하계열(夏季熱) - 6 (終) 글과 그림

[박앵귀/이바x치즈루] 하계열(夏季熱) - 5

6.

찻집으로 돌아오자 오센과 키미기쿠가 반갑게 맞아주었다. 답례를 겸해 식사 자리를 마련하였으니 먹고 가라는 제의를 이바와 치즈루는 거절하지 않았다. 찻집 2층 개인 다실에 여느 고급 요릿집 못지않게 음식이 준비되어 있었다.
네 사람은 창밖의 떠들썩함과 간간이 들려오는 축제 음악 소리를 벗 삼아 느긋하게 식사했다. 분위기가 무르익자 찻집 주인이 좋은 술이라며 백자 병과 잔을 가져다주었다. 키미기쿠가 오센 부터 차례대로 술을 따라주었다.

“난 정말로 술을 못 마셔.”

치즈루가 잔을 내려다보며 곤혹스러워했다.

“한 잔 정도는 괜찮아. 그렇게 독한 술도 아니고. 히나 마츠리에 시로자케(白酒) 정도는 마시지 않았어?”

시로자케라는 말에 치즈루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이바가 어색하게 웃으며 설명했다.

“일전에 시로자케 한 잔으로 쓰러졌던 적이 있습니다.”
“어머나.”
“정말?”

오센과 키미기쿠가 의외라며 눈을 깜박였다. 이바의 말 대로, 올해 봄 치즈루에게 히나 마츠리의 분위기를 즐기게 해주려고 마련했던 자리에서 치즈루가 시로자케를 마시고 취해 쓰러졌던 일이 있었다. 오센은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어쩌면 술이 안 맞았던 걸 수도 있어. 맑은 술은 잘 마셔도 탁주에는 금방 취하는 사람들도 있으니까. 이건 정말 맛있는 술이니 한 모금 정도는 마셔봐.”
“그럼 한 모금만.”

제안을 계속 거절하는 것도 도리가 아니라 생각해 치즈루는 조심조심 잔을 입에 가져다 댔다. 달콤한 복숭아 향이 먼저 코를 간질였다. 입술을 적시듯 한 모금 흘려 넣자, 부드러운 단맛과 약간의 쓴 맛이 감미롭게 퍼졌다. 오센이 ‘정말 맛있는 술’이라고 한 이유를 알았다.

“맛있어.”
“그렇지? 이 집에선 주인이 계절마다 제철 과실로 술을 담그거든. 훌륭한 맛이라 종종 사러 오게 돼. 이바 씨 입엔 맞으려나?”
“물론입니다. 이렇게 훌륭한 풍미의 술은 처음 맛봅니다.”

이바도 감격한 표정으로 빈 잔을 내려다보았다. 오센은 기뻐하며 잔을 채워주었다. 치즈루도 이 술이라면 어쩌면 마실 수 있을지도 모른단 생각이 들어 몇 번씩 천천히 나누어 마셨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키미기쿠가 작게 소리 내 웃었다.

“어쩐지 삼삼구도(三三九度:결혼식에서 부부가 잔을 나눠마심)처럼 보이네요.”

콜록! 치즈루가 사래 들려 기침을 했다. 이바가 괜찮으냐며 물을 챙겨주었다. 치즈루가 새빨갛게 달아올라 항변했다.

“부부 흉내는 끝났어요!”
“어머, 농담이니 그렇게 당황하지 마세요.”
“모두들 절 놀리기만 하고-”

치즈루는 요 며칠 내내 놀림 받는 처지에 화가 나는지 홧김에 술을 전부 털어 마셨다.

“치즈루, 그렇게 갑작스레 마시면 안 돼요.”

이바가 말렸다. 이미 취기가 좀 올라 있었던지, 감정이 격해진 바람에 눈에 눈물까지 그렁하며 치즈루는 혼자 술을 따라 마시고 또 마셨다. 오센과 키미기쿠는 제지할 생각은 하지 않고 호기심 가득한 표정으로 치즈루의 행동을 구경했다.

“내가, 이바 씨한데, 맞는 샤람일 리가, 없는데-”

급기야 혀가 꼬인다. 보다 못한 이바가 잔과 술병을 빼앗자, 치즈루는 훌쩍훌쩍 울면서 이바에게 팔을 뻗었다.

“하치로 오빠아-”

의외의 부름에 굳어버린 이바의 목에 팔을 감고 매달리듯이 안겼다. 어머, 어머머. 오센과 키미기쿠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두 사람은 사태를 파악하고 음흉하게 웃었다.

“키미기쿠. 우린 이만 퇴장할까나.”
“그러시죠, 공주님.”
“저, 저기, 두 분!”
“이바 씨, 오늘은 감사했어요. 치즈루에게도 고맙다고 전해주세요.”

오센은 산뜻한 웃음을 지으며 작별인사를 하고 이바의 구원 요청을 칼같이 거절했다. 그들이 나가고 방에 둘만 남았다. 이바는 안절부절 못하다가 계속 훌쩍거리며 우는 치즈루의 등을 다독였다. 치즈루는 계속 이바를 ‘하치로 오빠’라고 부르고 있었다.

“하치로 오빠, 가지 마. 나 두고 가지 마.”

자신을 ‘이바 씨’라 부르는 치즈루가 아닌, 어린 시절 함께 놀던 치즈루의 언행이었다. 이바는 복잡한 심경으로 고소를 지었다.

“사실은 그렇게 말하고 싶었…… 오빠가 싫어할 까봐, 그래서, 말하지 못했어.”
“미안해요. 치즈루. 그렇게 떠나버려서 미안해요.”

마지막 작별을 기억한다. 꽃이 지던 날 꼭 다시 만나자고 약속하고 소녀를 뒤로한 채 떠나던 날의 기억이 어제 일처럼 선명했다. 어린 시절의 이바는 남겨진 사람의 마음까지 모두 헤아릴 수 없었다. 이별에 무너진 자신의 마음을 수습하기도 급급해서, 치즈루가 얼마나 상처받고 외로워할지 생각하지 못했다.
교토로 와, 거리를 걷다 치즈루를 발견했던 때의 기억도 떠올랐다. 이바는 한 눈에 소년의 모습을 한 그녀가 어린 시절부터 마음에 두었던 치즈루임을 알아보았다. 그러나 앞에 나설지는 바로 결정하지 못했다. 뒤늦게 남겨진 사람의 마음을 떠올렸기 때문에. 행여 치즈루가 자신을 원망하고 있으면 어쩌나 하는 불안과 죄책감 때문에. 치즈루가 자신을 기억하지 못한다는 아쉬움은 동시에 일말의 안도감이 들기도 했다. 아무리 사정이 있대도 ‘버리고 떠났다’는 진실만큼은 변하지 않기에 이바는 언제나 치즈루에게 빚을 지고 있다 생각했다.

“외로웠지요. 힘들었지요? 두고 가서 미안해요. 이젠 두 번 다시 그러지 않을 게요.”

아직도 자신은 치즈루에게 어울리고, 선택해 달라 청할 만큼 당당한 사내가 아니었다. 그러나 두 번 다시 치즈루의 손을 놓지 않을 거라는 결심만큼은 재회한 순간부터 변함없었다.

“제가 속죄하게 해주세요.”

흘러내린 치즈루의 머리카락을 조심스레 넘겨주고 속삭였다.

“당신을 외롭게 만든 죄를 사해 받을 기회를 제게 주세요.”
“떠나지 않을 거죠?”

치즈루가 고개를 들어 이바와 시선을 마주했다.

“네. 절대로. 당신이 바란다면. 약속하겠습니다.”

울던 치즈루가 배시시 웃었다. 그러고선 훅 정신을 잃고 잠들었다.

“정말 당신이란 사람은 손이 많이 가네요.”

이바는 싫지 않게 웃고 치즈루를 바로 눕혀 무릎베개를 해주었다. 오센이 부탁하고 갔는지 머잖아 주인이 차갑게 적신 수건을 가져다주었다. 이바는 잔뜩 열이 오른 치즈루의 이마며 볼을 꼼꼼하게 수건으로 닦아주며, 샘솟는 사랑스러운 감정에 행복을 느꼈다.

치즈루가 심한 두통에 신음을 흘리며 눈을 떴다. 축 처져있던 몸이 뒤늦게 깨어나자, 누군가의 등에 업혀있단 사실을 알았다. 볼에 닿는 머리카락이 간지러웠다. 머리카락과 닿아있는 옷자락에서 여름의 습한 공기에 어우러진 여린 백단 향이 났다. 치즈루는 최근 그 향에 익숙해진 참이었다.

“깼어요?”
“이바 씨? 제가 어떻게 된 거죠?”
“홧김에 술을 그렇게 마셨으니까요. 가급적이면 깨어날 때 까지 거기에 있고 싶었지만, 더 늦어졌다간 신선조 사람들이 걱정할 테니 데리고 나왔습니다.”
“죄송해요! 제가 걸을 게요.”
“괜찮습니다. 무리 하지 말아요. 아직 팔에도 다리에도 힘이 없죠?”

정확히 지적당해서 치즈루는 면목이 없었다. 고개를 들면 어지러움이 밀려왔고 몸에 힘이 들어가지 않았다. 바보 같은 짓을 했다고 자괴감이 들었다.

“당신을 말리지 못한 제 탓도 있으니까 자책하지 말아요. 달이 보여서 다행이네요.”

비가 간간 뿌리던 날이 개어 밝은 달이 길가를 환하게 비추고 있었다. 치즈루를 업느라 등롱을 들지 못했지만, 달빛 덕에 길 가는 어려움은 없었다.

“혹시 제가 이상한 말이나 잠꼬대를 했나요?”

치즈루가 불안해 물었다. 술을 홧김에 마시고 정신이 혼미해진 기억은 났다. 그 뒤의 기억은 절단 나버렸다. 그러나 정신을 잃은 도중, 뭔가 이바와 관련 한 슬픈 꿈을 꾼 것 같았다.

“글쎄요.”

이바는 제대로 대답하지 않고 말을 얼버무렸다. 웃음기 섞인 대답에 치즈루의 불안이 커졌다.

“스스로 기억해 보세요.”
“시…… 심술쟁이.”
“치즈루는 언제나 제 일에 대해선 잊어버리니까요.”

치즈루가 앓는 소리를 내며 저항하지 못했다.

“어릴 때 이렇게 당신을 업어주었는데, 그건 기억하고 있습니까?”
“어렴풋이, 요.”
“당신은 노을이 불처럼 타오르는 날을 유독 무서워했었어요. 잔뜩 겁에 질려서 우는 당신을 이렇게 몇 번 업어서 달래준 적이 있었습니다. 등에 얼굴을 묻고 바깥을 보지 않으려고 했어요.”

이바가 들려주는 어린 시절의 이야기가 낯설지 않았다. 다른 누가 말했다면 그랬나? 하며 의문을 가질법한 이야기도 그가 말하면 마치 잠들어있던 기억을 일깨우듯 현실로 여겨졌다.
실제로 치즈루가 어릴 때에는 붉게 지는 노을을 무서워했다고 코도가 이야기 한 적도 있었다. 그땐 정말 자신이 그랬는지 잘 와 닿지 않았지만, 지금은 확실히 감정이 되살아났다. 반사적으로 이바의 옷자락을 꾹 쥐었다.

“그대로 잠드는 바람에 떼어놓질 못해서 코도 씨가 곤란해 했었어요. 어쩐지 그 때 일이 생각나네요.”

두려움은 잠시였다. 이바의 곁에서 두려움은 아주 잠깐 스쳐 지나갈 뿐인 바람에 불과했다. 그 때부터 이바는 자신을 지켜주었던 것이다. 정체를 알 수 없는 불안으로부터 최선을 다해서.

“고맙습니다.”

치즈루는 그 말 외에는 마음을 표현할 방법이 없다고 생각했다.

“그건 언제를 향한 감사인가요?”

이바가 쿡쿡 웃었다. 치즈루는 샐쭉해져서 이바의 뒷머리를 살짝 잡아당겼다. 아야야. 이바가 엄살을 부렸다.

“어릴 때랑 지금 둘 다인 게 당연하잖아요. 이바 씨, 오키타 씨 같아요. 자꾸 심술만 부리시고.”

오키타를 닮았다는 말은 꽤 충격이었던 것 같다. 이바는 그런가, 오키타 군인가, 하며 복잡한 심경으로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별스럽지 않게 던진 말이었는데 이바가 저런 모습이자 치즈루가 낭패했다.

“알겠습니다. 너무 심술부리지 않을게요.”

급기야 아주 강하게 결의한 목소리로 다짐하는 게 아닌가. 곧 이바가 화제를 돌렸다. 치즈루는 그럴 의도가 아니라고 말 할 때를 놓쳐버리고 말았다.

“그러고 보니, 결국 그 수상하다던 가게는 못 갔군요.”

또 잊어버리고 만 술집에 대해 떠올리고, 치즈루는 깊은 자책에 빠졌다.

늦게 돌아온 서본원사는 고요했다. 부동당촌에 마련된 새 둔소로 이미 대부분의 대사가 이전한 상황이었다. 이바는 치즈루가 곤란해지지 않도록 입구 근처에서 내려주었다. 두 사람은 먼저 왜 이렇게 늦게 왔냐고 타박하는 히지카타에게 사과하고, 일이 잘 마무리 되었으며, 어릉위사 쪽 사람들이 사태를 먼저 수습하게 되어 그쪽으로 신변을 인도했다고 보고했다.
사이토와 헤이스케의 이야기가 나오자 히지카타는 복잡한 표정을 지었을 뿐, 다른 말을 덧붙이지 않았다. 행여 크게 화를 낼까 걱정하던 치즈루는 안도했다. 보고를 마치고서 이바가 인사했다.

“감사합니다, 토시 씨.”
“무슨 싱거운 소릴 하냐. 내 쪽이 할 말이다.”

히지카타는 치즈루 쪽을 힐끗 돌아보고 대답했다. 치즈루는 히지카타와 이바 사이의, 자신은 알지 못하는 어떤 일이 궁금했지만 굳이 물어보지 않았다.
떠나려는 이바를 치즈루가 배웅했다. 이바는 내일 요이야마 행렬 순찰을 마지막으로 다시 에도로 돌아간다고 했다.

“이번에 돌아가면 늦은 가을 까지는 뵙지 못할 것 같습니다.”
“편지 쓸게요.”
“기쁘게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입구로 가는 길이 끝나지 않았으면. 치즈루는 곧 이어질 헤어짐이 싫었다. 아직 술이 덜 깼기 때문일까. 어린아이처럼 이바의 옷자락을 붙잡고, 가지 말라고 떼를 쓰고 싶었다.
입구 앞에서 이바가 걸음을 멈췄다.

“치즈루.”
“네?”
“먼저 들어가세요.”

이바가 배려를 담아 말했다.

“제가 떠나는 모습을 언제나 바라보고 있었잖아요? 오늘은 그러지 말아요.”

돌연 눈물이 날 뻔 했다. 치즈루가 마른 침을 삼키고 거절하려 했으나, 그러지 못했다. 오늘은 이상하게도 그가 떠나는 모습을 보고 싶지 않았다. 그 마음을 헤아려준 이바가 신기하고, 고마웠다.

“건강하게 또 만나요.”
“……네. 조심해서 돌아가세요.”

치즈루가 몸을 돌렸다. 이바는 작은 등이 시야에서 사라질 때 까지, 그 후로도 좀 더 오랫동안 지켜보고서 자리를 떠났다. 약속했어도 결국 다시 어기고 마는 처지에 쓴웃음이 나왔다. 지금은 서로의 입장과 의무에서 떠나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렇게 남아있기를 각자가 선택했기 때문이었다.
돌아가는 길을 걷다 이바는 고개를 하늘로 들어 올리고 눈을 감았다. 가슴에, 등에 치즈루가 닿았던 곳 마다 열이 났다. 안아주는 것도, 업어주는 것도, 어릴 땐 자연스러웠던 일들이 지금은 다른 감각으로 남아 이바의 마음을 크게 뒤흔들었다. 여름의 열기에 취했으려니. 이바는 애써 탓했다. 축제동안의 꿈도 내일이면 끝날 테니 이 열기도 분명 그리할 것이라고.

허나 발병한 열병은 그리도 쉽게 낫지 않아, 이바는 그 후로도 제법 오랜 시간 달콤한 아픔에 시달리고 말았다.


<終> 20170522 RAL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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