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식 + 공지 + 방명록 외 기타 주접대기

<연재>

지금은 신작 연재를 쉬고 있습니다. :)

안개 도시 모음곡 (프로젝트 ILN 독자 참여) / 예스24 E연재
마과학온천함선비행담 베스타 ~라신느 꿈의 저편~ / 예스24 E연재

<출간>

2016.  6. 인어의 바다 / 그래출판 (TL, 19세 미만 구독불가)
2016.  2. 안드로이드여도 괜찮아 / 온우주
2010. 12. 전자책 단편선 뿌와뿌와 벌레 / 피우리 ('뿌와뿌와 벌레'외 12종 수록)
2010.  5. 아빠의 우주여행 / 황금가지 ('아빠의 우주여행' 수록)
2009.  8. 한국환상문학단편선2 / 웅진 시작 ('파랑새' 수록) / 절판

<ORPG>

성관마 13시대 캠페인 'Dice & Devotee'

<땅주인 음지식물>

* 별채 - 여기 (취미생활 외)
* 텃밭 - 츄베랄's RPG 풀때기밭 (RPG 전용)

<기타>

PSN : Chuverall
Battle.net : 츄베랄#3236

[럽프듀/택언x유연] 가을의 맛 글과 그림

러브 앤 프로듀서 이택언x유연 (+주기락/허묵)
가을의~ 시리즈로 다른 캐릭터 사이드로도 쓸지도 모르지만 아무튼 '맛' 이 테마


가을의 맛


1.

- 여러분이 생각하시는 가을은 어떤 맛인가요? 천고마비의 계절이라고 하죠. 쌀쌀한 바람이 불어오고, 거리에 은행 냄새가 나기 시작하면, 불현 듯 아- 하고 떠오르는 그런 맛이 사람마다 하나 정돈 있을 거예요. 물론 제게도 있고요. 하지만 먼저 여러분의 멋진 사연과 정보 기다릴게요.

주기락의 사랑스러운 오프닝 멘트에 이어 부드러운 팝송이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선곡은 그가 한 것일까? 유연은 살며시 웃고 라디오의 볼륨을 높였다. 기지개를 켜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졸음을 쫓아내려고 창문을 열었다. 불과 일주일 전까지만 해도 느껴지지 않았던 서늘함을 감춘 바람이 훅 들이쳤다. 어둠이 내린 조용한 거리를 내려다보며 무겁게 가라앉으려는 눈을 몇 번씩 깜박거렸다.
책상 위에는 해결해야하는 기획서와 메모가 어지럽게 널려있었고, 며칠 째 철야여서 컨디션은 최악이었다. 이 지경까지 된 이유는 언제나처럼 같은 이유였다. 특집코너를 맡게 되었고, 기획을 했고, 이택언은 이걸 기획이라고 가져온 거냐고 혼내고, 일주일의 시간을 받고, 통과를 위해 죽을 동 살 동 버둥거리고 있는 것이다. 일련의 과정을 돌이키니 한숨이 터져 나왔다.

“정말 진상이라니까. 어떻게 그냥 넘어가는 날이 없어요. 내가 무슨 시간 거지인가? 툭하면 일주일 드리죠. 이주일 드리죠. 지가 뭐라고 준다만다야.”

부글거리는 마음에 이택언에 대한 욕이 쏟아져 나왔다. 그렇다고 포기할 문제도 아니었다. 유연에게는 회사를 잘 꾸려나가야 할 사명이 있었고, 이렇게까지 빈정상하면 오기가 생기는 법이었다. 그리고 모처럼 주기락이 도와주고 있었다. 그의 호의를 생각해서라도 힘을 내야했다.
유연은 손으로 볼을 두드리고 책상에 돌아가 앉았다. 오늘 주기락의 DJ 라디오 프로그램의 테마는 이번 기획, ‘가을의 맛’과 연관된 것이었다. 흔한 소재긴 해도 유연은 어떻게든 이 기획을 밀고 싶었다. 음식에 대한 기획이 한두 번은 아니었고, 성공한 전력도 있지만, 여전히 평범한 결과물로 이어질 공산이 컸다. 이택언은 그 부실함을 지적했고, 요행으로 넘어갈 생각 말라며 충고했다.

‘나도 알고 있다고. 안일했던 점도 인정해.’

고민하며 머리를 쥐어뜯던 차에 주기락과 연락할 일이 생겼다. 가볍게 의견을 듣고 싶었을 뿐인데, 주기락은 어쩌면 아이디어가 나올지 모르겠다며 이번 라디오 테마를 제안해 주었다. 유연으로써는 그저 고마울 뿐이었다.

- 와, 엄청나게 사연이 들어왔어요. 놀라운데요? 고구마, 붕어빵, 밤, 토피넛 우유, 과일도 있고요. 사과나 배 같은. 우왓, 갑자기 배가 고파지기 시작했는걸. 그럼 첫 사연 한 번 읽어볼게요. 음~ 연모시 광릉로에 살고있는 A 님의 사연입니다. ‘기락 오빠 안녕하세요. 저는 가을하면 버섯전골이 떠올라요. 벌써부터 송이버섯 내음이 나는 것 같아요. 그건 작년에 헤어진 남자친구와 산에 놀러갔다가 내려오는 길에 먹었던 음식이에요.’

주기락이 소개해주는 사연은 모두 어떤 음식과 함께 거기에 담긴 추억에 관한 이야기였다. 유연은 턱을 괴고 사연을 하나하나 음미하며 생각에 잠겼다. 뭔가 잡힐 것처럼 아른거렸다.
‘가을의 맛’이라는 기획을 하고 싶었던 이유. 그저 단순히 가을이니까, 가을에 어울리는 음식이나 먹거리를 소개하자는 이유만은 아니었다. 음식에 담긴 추억을 돌이킬 수 있었으면 좋겠다는 의도였다. 가을은 특히나 감상적이 되기 쉬운 계절이니까. 주기락에게 쏟아지는 수많은 사연처럼 그런-
거기까지 생각하고 유연은 다시 머리를 쥐어뜯었다. 이택언이 혼낸 이유가 불현 듯 이해됐기 때문이었다. 단순히 추억을 불러일으키고 싶다면, 지금 주기락의 방송이 자신의 기획보다 훨씬 효과적이다. 라디오라면 DJ가 보내 달라 요청하면 쏟아질 이야기를 TV 방송이라는 매체로 굳이 할 이유가 없는 것이다. 더 많은 비용과 시간을 낭비하면서까지 굳이.
유연은 책상에 이마를 대고 앓는 소리를 냈다. 이제 남은 시간은 나흘. 그 동안 이 기획을 다듬어서 통과시키는 게 가능할까? 차라리 다른 기획을 지금부터 생각하는 게 더 낫지 않을까?

자신감이 바닥을 칠 때, 휴대폰의 메시지 알람이 울렸다. 어기적거리며 확인해보니 반가운 사람으로부터의 메시지였다.

[ 아직 안 자요? 요즘 며칠 동안 내내 새벽까지 방에 불이 켜져 있네요. ]

허묵이었다. 본의 아니게 이 섬세한 이웃사촌의 관심을 끈 것 같아서 유연은 괜스레 미안해졌다. 답장을 보냈다.

[ 기획이 잘 안 풀려서요. 며칠 째 철야모드에요. ]
[ 이번엔 또 어떤 기획이 우리 유연 씨 발목을 붙잡고 있을까? 나라도 괜찮다면 이야기 해 봐요. ]

유연은 거절하려다가 밑져야 본전이라는 생각이 들어서 허묵에게 전화를 걸었다. 문자보다는 이 편이 빠를 것이다. 대기음이 들리자마자 전화가 연결됐다.

“늦은 밤에 죄송해요. 교수님 의견도 좀 듣고 싶어서요.”
- 괜찮아요. 말 해봐요. 나로썬 당신이 제대로 잠도 못 자고 끙끙대는 걸 계속 보느니 이 편이 맘 편하니까.

수화기 너머로 웃음 섞인 다정한 목소리가 울렸다. 유연은 깊은 안도감을 느끼며 기획에 대해 상담했다. 방금 라디오 방송으로 느낀 어려움까지 모두. 허묵은 진지하게 유연의 이야기를 듣고 질문했다.

- 왜 그 기획을 하고 싶다고 생각했어요?
“기획 의도라면 처음에……”
- 아뇨. 그것 말고. 왜 ‘당신이’ 그 기획을 하고 싶은지 묻는 거예요.

유연은 허묵의 질문이 잘 와 닿지 않아 난처했다. 그런 유연의 반응에 허묵이 다시 질문했다.

- 질문을 바꾸죠. 당신에게 있어서 ‘가을의 맛’은 뭔가요? 당신은 그 질문에 무엇을 가장 먼저 떠올리죠?
“저는……”

잠깐의 정적. 유연은 혼란스러운 머릿속을 더듬어서, 조금씩 형체를 갖춰가는 어떤 이미지를 두서없이 설명했다.

“아, 갑자기 생각하려니 잘 생각이 안 나는데, 그러니까. 아마도, 아빠가.”
- 괜찮아요. 천천히 말 해봐요.
“고등학교 다닐 때, 무척 우울했던 날에 아빠와 외출을 했어요. 기분전환을 시켜준다고. 세상이 온통 붉고 노란 가을이었어요. 그 길을 드라이브하고 돌아오는 길에, 어떤 작은 카페에 들렀죠.”
- 그리고?
“몽블랑을 사주셨어요. 우울한 기분 같은 건 한 순간에 날려버린. 몽블랑.”
- 그랬군요. 그게 당신의 가을의 맛인가요?
“네. 그래서 이 프로를 만들고 싶다고 생각 했…… 었나?”

허묵이 키득거렸다.

- 잠재의식이라는 거죠, 요지는. 하지만 난 거기서 끝이 아니라고 생각하는데.
“무슨 말씀이세요?”
- 아빠랑 먹었던 몽블랑. 그 뒤에 뭔가 더 따라붙지 않아요?
“그 외에는, 뭐랄까, 이제 와서라는 생각이 들지만. 다시 한 번 먹어보고 싶…… 아!”

유연은 저도 모르게 휴대폰을 쥔 채 벌떡 일어났다.

“제가 뭘 놓쳤는지 알겠어요!”
- 잘됐네요. 축하해요.
“교수님은 어떻게 그렇게 저에 대해 잘 아세요?”
- 글쎄요. 왜일까요. 나도 궁금하네요. 그럼 이제 당신은 잠들 수 있을까?

유연이 면구해 웃었다.

“방금 생각난 걸 놓치고 싶지 않으니까, 조금만 더 하고요.”
- 그래요. 너무 무리는 하지 말아요.
“언제나 고맙습니다. 항상 폐만 끼쳐서 죄송해요.”
- 뭘요. 언제나 의지해 줘요. 나는 기쁘니까. 열심히 해요.

허묵과의 통화를 마치고 유연은 한층 개운해진 마음으로 펜을 들었다. 주기락의 라디오 방송은 이제 중반을 지나고 있었다. 유연은 잠깐 생각하더니 라디오 방송 번호로 조금 긴 문자를 보냈다. 엄청나게 투고되고 있을 사연 수를 생각하면 유연의 문자 같은 건 금방 묻혀버릴 터였다. 어차피 개인적으로 감사의 인사를 할 테니 의미 없는 일이라 생각했으나, 지금은 팬의 마음으로 보내고 싶었다.
몇 차례 사연과 음악이 흐르고 방송이 끝날 쯤, 어쩐지 평소보다 밝고 달가운 주기락의 목소리가 들렸다.

[ 오늘의 마지막 사연은 연모시에서 Y 님이 보내주셨어요. ‘기락 씨, 오늘 방송과 다른 분들의 사연을 들으면서 저도 제 가을의 맛을 떠올릴 수 있었어요. 정말 고마워요. 지금껏 잊고 있었던 소중한 추억의 맛이에요. 다시 그 맛을 찾아낸다면, 언젠가 기락 씨에게도 맛보게 해주고 싶네요.’ 정말요? 기대할게요. 오늘 당신에게 이 시간이 도움이 되었다니 정말로 기뻐요. ]

주기락은 그렇게 답하고, ‘시청자 여러분 모두가 소중한 추억을 되새길 수 있던 시간이 되었길 바란다’는 클로징 멘트를 남겼다. 에드 시런(Ed Sheeran)의 가 마지막 곡으로 나오기 시작했다.

I found a girl, beautiful and sweet
Oh, I never knew you were the someone waiting for me
'Cause we were just kids when we fell in love...



2.

화예로 향하는 차 안에서 아침 회의 자료를 체크하던 이택언은 문자 알림 진동에 인상을 찌푸리고 휴대폰을 꺼내들었다. 이른 아침부터 이택언에게 직접 문자를 보내는 간 큰 사람은 최소한 업무 관계에 있어서는 없다고 봐도 무관했다. 대체 누가? 그리고 디스플레이에 뜬 발신자 명을 본 순간, 이택언의 눈이 커졌다.
예상치 못한 일에 혹여 경을 치지 않을까 긴장하며 운전하던 위겸은 백미러로 본 대표의 표정에 잔잔한 웃음이 스치는 것을 놓치지 않았다. 이택언의 완벽할 만큼 잘 짜인 구조를 멋대로 침범하고 흔들면서도 그를 웃음 짓게 만드는 상황은, 위겸도 모르는 사적인 일 몇 가지뿐이었다. 그리고 이런 일이 생기면 이택언은 으레 물어왔다.

“위실장. 오늘 오후 3시 이후 스케쥴이 어떻게 됩니까?”
“4시에 TS 그룹 이사진과 업무회의, 그 이후 저녁 약속이 있습니다.”

그 뒤에 나올 말도 위겸은 예상하고 있었다.

“취소하세요. 메일로 서면보고 하라고 전하고.”

곧 이택언은 어디론가 전화를 걸었다.

“접니다. 오늘 준비해주셔야 할 게 있습니다. 자세한 리스트는 문자로 보내두겠습니다.”

회의 자료도 내팽개치고 즐겁게 휴대폰을 터치하는 이택언의 모습은 마치 다른 사람 같았다. 위겸은 대표가 저런 모습을 종종 보여주게 된 게 언제부터였는지 생각했다. 인간적이라면 인간적이고, 낯설다면 낯설다. 딱히 이상하다고 여겨질 정도는 아니지만.
이택언은 Souvenir의 지배인에게 문자를 보내두고, 아까 받았던 문자를 다시 확인했다. 발신인은 유연. 거기에는 아무리 봐도 직접, 제정신으로 보냈을 것 같지 않은 내용이 띄워져 있었다.

[ 아빠가사줬던몽블랑만들어주세요아무리잘나도아마못만들걸이라고 ]

간단하게 답장을 보내고 애틋하게 누그러든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하여간, 알기 쉽다니까.”
“예? 뭐라고 하셨습니까?”
“아닙니다.”

다시 표정을 굳힌 이택언은 자료에 집중했다.



대체 왜 이런 일이 일어난 걸까? 유연은 이택언에게 온 메시지를 보고 충격에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 분명, 철야로 기획서를 수정하고, 평소보다 일찍 출근해서 잠깐 책상에서 눈을 붙였다. 아침 회의 시간에 맞춰 일어나려고 알람을 설정했고…… 그래. 그게 문제였다.
휴대폰에 손대기도 힘들만큼 졸려서 음성 인식 기능을 불렀다. “리리야, 두 시간 뒤에 깨워줘.” 유능한 휴대폰 인공지능은 주인의 명령에 착실히 알람을 설정했다. 그리고 잠에 들면서 뭐라고 중얼거렸다. 기억은 희미하지만 분명 그런 말이었던 것 같다.

“이택언한테 아빠가 사줬던 몽블랑 만들어주세요, 아무리 잘났어도 아마 못 만들걸? 이라고 문자 보내고 싶다. 엄청 열받아하겠지?”

너무나 유능한 휴대폰 인공지능은 거기까지를 명령으로 알아들은 것 같다. 문자는 이미 이택언에게 가버렸고, 이택언에게 답장은 와 있었다.

[ 저녁 6시 반에 Souvenir로 와요. ]

“어머, 유연 대표 왜 그래? 얼굴이 새파래져선.”
“안 팀장니임, 이번에야 말로 끝일지도 몰라요.”
“뭐어? 이상한 소리 하지 말고 얼른 회의에나 들어와!”

부하들의 채근을 받으며 유연은 앞으로 무슨 일이 닥칠지 까마득한 채로 업무를 시작했다. 시간이 흐르며 점점 냉정을 찾아갔지만, 어떻게 수습해야할지는 조금도 떠오르지 않았다.
꼭 이런 날에만 시간은 속절없이 흐른다. 유연은 도중에 사과 문자를 보내야하는지, 전화를 해야 하는지 갈팡질팡하다 결국 아무런 조치도 취하지 못했다. 직원들을 일찍 퇴근시키고, 필사적으로 변명꺼리를 생각하며 Souvenir로 향했다.
여름이 지나자 해가 부쩍 짧아졌다. 여섯시를 막 넘은 참인데도 어둑어둑했다. 아침저녁으로는 한기가 느껴졌다. Souvenir는 이제 막 지배인이 나와 오픈 표시를 달아두고 있었다. 그는 비척거리며 걸어오는 유연을 발견하고 밝게 맞아주었다.

“유연 씨, 어서오세요.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안녕하세요, 지배인님. 기다리셨다고요?”
“오늘은 셰프님으로부터 유연 씨 예약만 있다고 들었는데요.”
“그, 그런가요. 셰프님은요?”
“두 시간 전부터 이미 준비하고 계십니다. 들어가시죠.”

대체 무슨 속셈일까? 유연은 의심 반 두려움 반, 지옥의 문을 넘는 전사의 마음으로 레스토랑의 문을 넘었다.
지배인에게 자켓과 가방을 넘겨주고 자리에 앉았다. 은은한 피아노 선율이 흐르고, 부드러운 불빛이 하얀색 테이블보와 은색 식기 위에 아름답게 드리웠다. 주방 쪽에서 들리는 달그락거리는 소리와 희미한 콧노래 소리가 더없이 느리고 안온했다.

‘대체 뭐지? 사달 내기 전에 만찬이라도 차려줄 생각인가? 사형수의 마지막 식사 뭐 그런……’

유연에게는 이 아름다운 시간과 정경 모든 것이 공포였다. 지배인이 에피타이저를 가져다 줄 때에 몸이라도 안 좋은 거냐며 걱정할 정도로 질려 있었다. 유연은 자포자기의 마음으로 식사를 시작했다. 긴장한 탓에 배는 몹시 고팠고, 부족한 잠 만큼 몸에서 영양소를 달라고 아우성이었다.
유자 드레싱으로 맛을 낸 구운 은행을 곁들인 샐러드, 석류 베이스의 소스를 곁들인 도미 스테이크, 메인 전의 배 셔벗, 게살과 전복을 넣어 만든 부드러운 리조토. 차례차례 나오는 정갈하고 깔끔한 요리는 입 속을 황홀하게 만들어서 눈물이 날 뻔 했다. 정말로 그 뻔뻔하고 재수 없는 얼굴과 손에서 이처럼 섬세한 음식을 빚어낸다는 것이 도무지 믿기지 않았다.

식사 접시가 정리되고 마지막으로 디저트가 나올 시점이었다. 물로 입을 헹구고 있자니, 유연의 앞에 하얀 접시가 서빙 됐다. 황갈색의 마론 크림을 단정하게 겹쳐 쌓고, 하얀 슈거 파우더가 눈처럼 소복하게 뿌려진 먹음직스러운 몽블랑 케이크. 한입 크기의 졸인 밤 두 개가 꼭대기 근처에 장식되어 있었다. 달콤한 향과 귀여운 모습에 유연은 넋을 잃었다.

“어디 한 번 드셔보시죠. 내게 도전장을 내밀었으면 그만한 각오는 하고 왔겠죠?”

서빙한 사람은 지배인이 아니었다. 머리 위에서 꽂히는 딱딱한 저음에 유연의 어깨가 잔뜩 움츠러들었다. 힐끗 눈동자만 굴리자, 팔짱을 끼고 거만한 웃음을 짓고 있는 앞치마 차림의 이택언이 보였다. 유연은 죽을 것처럼 한숨을 쉬고 고개를 숙였다.

“죄송해요. 문자가 잘못 갔어요. 정말로 면목 없습니다.”
“그럴 거라 생각했습니다. 음성인식 기능이라도 켠 채로 졸았나보더군.”
“정답이네요.”
“그렇게 부주의하니 앞으로도 참 기대가 되는군요?”

유연은 뭐라 반박도 하지 못하고 귀까지 빨개졌다. 이택언은 그런 유연의 모습을 보고 소리죽여 웃더니 디저트 스푼을 내밀었다.

“어서 먹어요. 안 그래도 가을 신 메뉴를 기획하던 참이었으니까요. 오늘 당신의 밥값은 방금 코스의 모니터링 인터뷰입니다.”
“그것 뿐?”

옆자리에 앉으며 태블릿 PC를 꺼내는 이택언에게 유연이 놀라서 물었다. 이택언의 미간이 구겨졌다.

“그럼 뭔가 더 있습니까?”
“전 이게 저의 최후의 만찬인 줄 알았는데요.”
“뭐라고요?”

이택언의 어이없다는 시선이 꽂혔다.

“잘못 보낸 문자인 게 뻔한데, 당신을 괴롭히려고 내가 식사까지 준비해줬겠습니까? 그 발칙한 상상력은 대체 어디서 나오는 거죠? 저돌적이기 짝이 없는 배짱?”
“죄송해요. 제가 괜한 말을 했네요. 다시는 그런 일 없도록 하겠습니다.”
“됐습니다. 어서 먹기나 해요. 먹으면서 질문에 답하고요.”

유연이 먹기 아까운 몽블랑의 형태를 스푼으로 조심스레 변형시켰다. 살짝 단단한 마론 크림과, 그 안에 채워진 하얗고 폭신한 상티이 크림을 함께 퍼서 입에 넣었다. 향긋한 밤 맛 속에 기분 좋은 단맛이 어우러져 절로 눈이 감겼다. 귀 아래와 코끝까지 감미로운 감각이 간질거렸다.
그 맛은 추억속의 맛은 아니었다. 그 때 먹었던 몽블랑은 이렇게 고급스러운 느낌은 결단코 아니었다. 마론 크림은 퍽퍽했고, 상티이 크림 대신 평범한 생크림이었고, 시트지도 밋밋한 카스테라였다. 몽블랑 흉내만 낸 싸구려 조각 케이크에 가까웠다. 맛도 잘 기억이 나지 않을 만큼 특색도 없었다.
이상한 느낌이었다. 전혀 다른 음식인데, 왜 그때의 그리움이 샘솟는 걸까. 잠자코 옆에 앉아있는 이택언의 존재감이 왜 낯설게 느껴지지 않는 걸까.

“당신-”

이택언의 당혹한 목소리가 들려서 고개를 들었다. 정신이 들자 눈물이 방울방울 흘러내려 테이블 위에 뚝뚝 떨어지고 있었다. 유연은 스푼을 내려놓을 생각도 하지 못하고 당황해서 손으로 눈가를 비볐다.

“어, 어?”

이택언이 유연의 손을 잡아 멈추고 손수건으로 눈가를 닦아주었다. 눈물로 얼룩진 시야에 어쩐지 그가 고소를 지은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눈물이 날 만큼 맛있었던 겁니까?”
“……마, 맛없어서 울었다곤, 생각 안 하시는 거예요?”
“이럴 때에도 잘도 떠드는군요. 당연하죠. 맛없을 리가 없잖습니까.”
“저돌적이기 짝이 없는 배짱은 누구 말이야, 정말.”

실없는 소리로 감정을 수습했다. 이택언은 묵묵히 유연이 진정하길 기다려주었다.

“맛있어요. 이제까지 먹어봤던 몽블랑 중에 가장 맛있어요.”
“당신 아버지가 사줬다던 몽블랑과는 다를 텐데.”
“네. 많이 달라요. 다른 음식이에요. 그런데, 맛이 그렇게 중요한 요소는 아니었다고 방금 깨달은 거 있죠.”
“말 해봐요. 들어줄 테니.”
“Souvenir의 셰프로써, 죠?”
“화예의 이택언이면 안 될 이유라도 있나?”
“그건 아니지만.”
“사적으로 하는 이야기를 평가할 만큼 야박한 사람 아닙니다. 당신이라면 그렇게 생각하고 있겠지만.”

정곡을 찔렸지만 모른 척 했다.

“감각이라는 건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변질되잖아요. 지금 돌이키는 그 때의 맛이 그 때 느꼈던 그 맛이라고는 누구도 단정할 수 없듯이. 그러니까 요지는, 추억의 맛이라는 건 매개에 지나지 않는 거라고 생각했어요. 사실은, 그 추억을 돌이키고 싶다면, 무엇이든 이유 삼을 수 있는 거라고요.”
“내가 만든 몽블랑으로 당신 아버지를 추억했단 말인가요?”
“네. 사실 그러고 싶지 않았어요. 아직도 아빠와의 추억을 떠올리면 슬프니까. 그래서 눈물이 났던 거예요. 하지만 그렇게 많이 가슴 아프진 않네요.”

수줍게 웃으며 몽블랑을 마저 먹기 시작하는 유연을 이택언은 깊은 눈으로 응시했다. 유연은 접시를 깨끗하게 비워내고 웃었다.

“고마워요. 대표님.”
“답지 않게 왜 그럽니까?”
“위로해 주신 거 아니에요? 아빠가 절 위로하려고 몽블랑을 사주었던 것처럼. 대표님도 절 위로해 주신 거라고 생각했어요.”
“착각은. 그냥 가을 신 메뉴의 모니터링이 필요했을 뿐입니다.”
“네- 네. 그런 걸로 해요. 잘 먹었습니다. 그럼 인터뷰 할까요?”

헛기침하며 시선을 돌리는 이택언의 무뚝뚝한 옆모습에 유연은 웃음을 막을 도리가 없었다.



3.

화예의 업무보고일. 유연은 10분 전에 도착해 이택언의 사무실 밖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할 수 있는 모든 일은 다 했다. 나머지는 이택언의 판단뿐이었다. 자료를 마지막으로 체크하고, 호흡을 가다듬었다. 노크를 하고 사무실로 들어가자 답답할 만큼 각 잡힌 슈트 차림의 이택언이 기다리고 있었다. 며칠 전 Souvenir에서 본 셰프 이택언과는 분위기가 달랐다.
업무에 있어서 공과 사를 구분하는 그의 잣대는 칼 같았고, 그와 사적으로 어울릴 수 있는 관계라 할지라도 유연이 기대를 만족시키지 못하면 투자 또한 냉정하게 취소할 사람이었다. 유연은 발끝부터 등골까지 서늘해지는 감각에 작게 몸을 떨었지만, 곧 이를 악 물고 정신을 가다듬었다.

“안녕하세요, 이택언 대표님. 새 기획을 보고하겠습니다.”

기획 자료는 전날 보내두었다. 이미 어떤 이야기가 나올 것인지 이택언은 알고 있었다. 결국 ‘가을의 맛’ 기획을 포기하지 않았기 때문에, 싫은 소리를 들을 각오도 되어 있었다. 하지만 이것만큼은 양보할 수 없었다. 유연은 가져온 자료를 스크린에 띄우고 브리핑을 시작했다.

“단순히 가을의 맛을 찾는다는 기획은 시청자의 공감대 형성 외에 큰 이점이 없다는 점을 인지하였습니다. 이에 따라 당사에서는 영상으로 제작하는 방송의 특수성에 집중했습니다. 단순히 맛을 찾고 안내하는 것이 아닌, 가을의 맛에 얽힌 추억을 통해 추억의 맛을 복각하는 프로그램을 제작하려고 합니다.”

잊힌 추억의 맛을 찾아서 그것을 재현해낸다. 플랫폼 자체는 그렇게 특이할 것 없었지만, 유연은 여기에 두 가지 사안을 붙여 의견을 제시했다.

첫째, 드라마틱한 사연을 고를 것. 그 맛을 찾고 싶은 이유에 주목해서 그 사람의 과거를 깊게 돌이키도록 할 것. 사연과 맛과 음식의 복각이 이뤄진 뒤의 반응까지 모두 고려해 시청자들의 반응을 이끌어내기. 결과적으로 이는 음식이 우선이 아닌, 사람들의 이야기로 꾸며지는 방송이 될 것.
둘째, 맛을 복각하는 역할 담당을 신경 써서 선별할 것. 유명한 셰프의 섭외가 맹점.

“정말 그걸로 좋은 특집이 나올 거라 생각합니까?”

이택언이 날카롭게 물었다. 유연은 벼린 시선에 지지 않고 맞섰다.

“네. 이 기획은 단기적으로도, 장기적으로도 충분히 통용될 기획입니다. 첨부한 자료를 확인하시면, 시청자 참여로 사연과 추억에 관련해 제작된 프로그램들의 평균 시청률 기록이 있습니다. 거기에 계절별 추이를 보면 심리적 요인으로 가을 무렵의 시청률이 다른 계절에 비해 유의미하게 높다는 것도 확인 가능하실 겁니다. 요컨대, 음식은 사람들의 추억에 접근하기 위한 매개의 역할을 하게 됩니다.”
“단언하는군요.”
“경험해 봤으니까요.”

유연은 똑 부러지게, 시치미 떼며 말했다. 이택언의 입술 끝이 올라갔지만, 입가를 손으로 가렸기에 유연이 표정의 변화를 눈치 채는 일은 없었다.

“셰프의 섭외에 대해서 듣고 싶군요. 음식이 단지 매개일 뿐이라면, 어떤 셰프가 이 기획에 참가하려고 할는지 모르겠는데.”
“매리트가 없다고 여기실지 모르나, 꼭 그렇지 않습니다. 음식을 복각하는 일은 무척 어려운 일이 될 거예요. 참가자의 단편적인 요소에 의지해 그 음식을 만들어야 할 테니까요. 거기에 참가하고 시도했다는 사실만으로도 그 셰프는 큰 주목을 받게 되겠죠.”
“구체적으로 생각해 둔 사람 있습니까?”
“저희 프로그램에 협조적인 셰프가 있습니다. 레스토랑 Souvenir의 셰프를 점찍어두었습니다. 대표님도 분명 만족하실 거예요. 그 셰프와 그의 요리, 인품은 정말로 훌륭하니까요.”

이택언은 어이가 없어 눈만 끔벅였다. 뱃속부터 통쾌해졌지만, 유연은 애써 그의 시선을 외면했다.



화예를 나와 회사로 돌아갈 무렵, 주기락으로부터 전화가 왔다.

“기락 씨?”
- 허니칩 씨! 기획 어떻게 됐어요?
“어떻게든…… 된 것 같아요. 셰프를 설득해야하는 숙제는 생겼지만.”
- 와! 축하해요.
“기락 씨 덕분이에요. 기왕 도와주는 거, 특집 게스트로 출연해주는 건 어때요?”
- 그거 좋죠. 언제든 연락만 해요.

유연은 주기락의 밝은 목소리에 크게 위로받고, 기뻤다.

“정말 한 때는 어떻게 해야 하나 싶었어요.”
- 당신이라면 해낼 거라 믿었어요.
“정말요?”
- 라디오 마지막에 틀었던 노래 기억해요?
“에드 시런의 노래였죠.”

주기락은 즉석에서 노래를 불러주기 시작했다. 유연은 그 자리에 서서 휴대폰에 고개를 기울였다. 눈을 감고, 바깥의 소음 속에서 유난히 청명하게 귀를 울리는 미성을 쫓았다.

Well I found a woman, stronger than anyone I know
She shares my dreams, I hope that someday I'll share her home...

- 이크. 매니저 형이 찾네. 이후는 나중에 불러줄게요. 마지막 가사가 당신과 딱이거든요.
“고마워요. 기대할게요.”

전화를 끊고 유연은 가벼워진 발걸음으로 주기락이 불러준 노래를 흥얼거리며 걸었다. 문득 뒤를 돌아 화예 건물의 가장 높은 곳, 이택언의 사무실 창가 쪽을 바라보았다. 눈이 부셔서 잘은 보이지 않았지만, 얼핏 사람의 그림자를 본 것 같았다.
유연은 그곳을 향해 혀를 내밀어 심술궂은 표정을 지었다. 설마 보겠어.

“……하여간.”

유연이 떠나는 모습을 창가에서 지켜보던 이택언은 유연이 있는 힘껏 메롱 하고 도망치듯 달려가는 것을 지켜보고 한숨을 내쉬었다. 곧 문자 알람이 울렸다.

[ 셰프님, 언제 시간 되세요? ]
[ 당신 메롱하고 도망치는 거 다 봤습니다. ]
[ 눈도 좋아! 전 셰프님한테 문자 보낸 거거든요? ]

그날 이택언은 온종일 기분이 좋아보였다고 위겸은 회상한다.

[ 그러고 보니, 대표님은 가을의 맛에 대해 추억 같은 거 없나요? ]
[ 화예 대표한테 보낸 거 아니라면서요. ]
[ 아 좀, 사소한 건 넘기면 안 돼요? ]

이택언은 얼마간 텀을 두고 문자를 전송했다.

[ 지금까진 없었지만, 앞으로 회상할 추억은 생겼군요. ]

무슨 의미냐고 질문이 돌아왔지만 이택언은 대답하지 않았다. 앞으로 며칠 전 만들었던 몽블랑이 Souvenir의 메뉴로 올라갈 일은 없을 것이다. 그것은 온전히 그의 추억이 되었으니까.
다른 누군가와 공유하고 싶지 않은, 오직 그와 그녀의 맛으로.

Now I know I have met an angel in person
And she looks perfect, no I don't deserve this
You look perfect tonight...



<終> 20180930 RALL(@chuverall)

[박앵귀/이바x치즈루]단잠(熟睡) - 2 글과 그림

[박앵귀/이바x치즈루]단잠(熟睡) - 1

2.

이바의 얼굴을 보지 못 한지 이틀째였다. 
나흘 일정으로 하코다테 외부의 시찰 계획이 잡혔다. 겨우내 얼어붙은 통행로를 점검하고 군량 등의 물자 수송에 차질이 없도록 조처하는 작업이었다. 이바를 포함한 유격대가 맡은 일로, 공개적으로는 이바의 급사인 치즈루도 처음에는 동행하기로 하였으나 피치 못할 사정으로 오릉곽에 남게 됐다. 얼마 전 근처에서 일어난 눈사태로 인해 갑자기 부상자가 들이닥치며 간병에 손이 모자라게 된 탓이었다. 히지카타의 부탁도 있거니와 무엇보다 부상자들이 눈에 밟혀 치즈루는 자발적으로 남기로 결정했다. 이바는 걱정하는 눈치였지만, 치즈루가 괜찮다며 잘 달래어 유격대 일원들과 그를 떠나보냈다.

외로움을 느낄 새도 없이 하루가 지나고 이틀이 저물어가고 있었다. 급하고 위중한 환자들이 안정되자 치즈루에게도 여유가 찾아왔다. 교대해주기로 한 병사에게 나머지 일을 맡기고 치즈루가 병동을 나왔다. 어제 저녁 무렵부터 내리기 시작한 눈은 그칠 기미 없이 온통 세상을 하얗게 덮고 있었다.
고작 한, 두 달 보았을 뿐인데 눈에 싫증이 났다. 높게 쌓인 눈을 보자 절로 바깥에 나간 이바 생각이 났다. 눈을 치우고 길을 트는 작업은 굉장히 고될 것이다. 거기까지 생각이 미치니 하염없이 내리는 눈이 원망스럽기도 했다.

“유키무라 선배.”

소마가 병동 현관 앞에서 오도카니 서있는 치즈루를 발견하고 다가왔다.

“추운데 왜 거기 서 계세요. 오늘은 당직이 아니지 않습니까?”
“이제 방으로 돌아가려고 했어. 소마 군은?”
“저도 겨우 사고의 사후 지시가 끝나서 돌아가려던 참입니다. 바래다 드리겠습니다. 눈이 제법 쌓여서 위험하니까요.”

치즈루는 소마의 배려를 사양하지 않았다. 병동에서 숙소가 있는 건물까지는 중정을 가로질러 꽤 걸어야 했다. 사람이 오가는 길목의 눈은 치워져 있었지만, 날이 어두웠기 때문에 소마의 말대로 위험했다. 소마가 내민 손에 의지해 두 사람은 걸음을 내딛었다.

“눈 언제까지 내릴까?”

치즈루가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소마는 질문이라 생각했는지 성실하게 답했다.

“아마도 내일 오전까지는 내릴 것 같다고 하더군요.”
“어떻게 알아?”
“부대 내에 에조치 토박이가 있습니다. 어릴 때부터 험난한 기후와 맞닿아 살았더니 날씨를 보는 감각이 탁월하다고 합니다. 이번 변두리 통행로 시찰도 조만간 폭설이 올 가능성이 높으니 미리 점검하는 게 좋다는 이야기를 들어서 시행하게 됐습니다.”
“나간 사람들은 괜찮겠지?”

소마가 치즈루를 돌아보았다. 치즈루는 오릉곽 너머의 새카만 저편을 수심 깊은 눈동자로 바라보고 있었다. 소마가 고소를 지었다.

“그럼요. 큰 문제가 생길 일이었다면 히지카타 씨는 반드시 선배를 이바 씨와 함께 보냈을 겁니다.”

치즈루는 이런 주변 사람들의 배려가 낯설기도, 부끄럽기도 했다. 오릉곽의 대부분의 사람들이 치즈루에 대해서 알고 있었다. 신선조 둔소 때처럼 존재를 숨길 필요도 없었기에, 히지카타도 굳이 치즈루를 남자라고 두둔하거나 감추려 하지 않았다. 이바와 친한 유격대의 사람들은 하물며 ‘대장의 소중한 사람’이라며 소중히 여겨주었다. 
이바와 치즈루가 에조치에 온 이후로 서로 떨어진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치즈루가 문득 생각나 물었다.

“혹시 나 모두에게 걱정을 끼치고 있어?”
“예?”
“소마 군, 일부러 병동까지 온 거지?”
“그…… 예. 하지만 결코 걱정을 끼친다거나, 그런 건 아닙니다. 정말로 어두워지면 위험하기도 하고.”

이 정직한 청년은 거짓말에 서툴렀다. 치즈루는 배려를 고맙게 받아들였다. 미안해하는 소마의 마음을 헤아려 이야기를 돌렸다.

“그러고 보니, 에도에 돌아와서 이바 씨 댁에서 지낸 이후로 이렇게 떨어져본 적은-”

처음이었다.

우뚝. 치즈루의 걸음이 멈췄다. 소마가 의아해하며 돌아보자, 치즈루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치즈루는 공황에 젖어 어쩔 줄 모르는 표정으로 몸을 웅크렸다.

“선배? 괜찮습니까?”

이바가 없다.
몇 달간, 곁에 있는 게 당연했던 사람이, 없다. 언제나 치즈루의 불안을 감싸 안아주던 사람이 없었다. 잠깐 떨어져 있을 뿐이었는데, 치즈루는 그간 인지하지 못했던 공포와 두려움과 피로감이 한꺼번에 몰려드는 감각에 그만 정신을 잃어버릴 뻔 했다.
다가와 부축해주려는 소마의 팔을 뿌리치고 치즈루는 내달렸다. 소마가 치즈루를 불렀지만 귀에 닿지 않았다. 무겁게 떨어지는 눈도, 차가운 공기도, 치즈루의 마음속까지 침투해 날카로운 손톱마냥 사납게 긁어댔다. 아픔에 치즈루의 눈에서 눈물이 쏟아졌다.

‘왜, 왜 이렇게까지, 왜?’

이바와 함께하기 전에는 이런 두려움이 있는 줄 몰랐다.
이바와 함께한 이후에도 이런 두려움이 있는 줄 몰랐다.
그리고 이바가 없자, 생각해 본 적 없는 두려움이 고개를 내밀었다. 
치즈루의 안에서 미처 소화되지 못했던 어두운 마음이었다. 이제까지 잘 견뎌냈던 감정들이 지금은 수습할 수 없이 터져 나와 엉망진창이었다. 이바가 죽을 위기에 처해 눈을 뜨지 못했던 때에도 꿋꿋하게 버텼는데, 왜 이제 와서 이런 상태인지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다.
치즈루는 살 방법을 필사적으로 찾는 동물처럼 이바의 방으로 갔다. 옷장에서 그의 겉옷 한 벌을 꺼냈고, 옷깃에 얼굴을 파묻고 소리 죽여 흐느껴 울었다. 이성적인 생각이 불가능했다. 외롭고, 슬프고, 고독하고, 무섭다는 감정만이 선명해, 옷에 남은 이바의 향취에 달라붙어 감정의 격류를 토해낼 뿐이었다.

치즈루는 책상과 벽 사이 구석에 쪼그려 앉아 이바의 옷만 꼭 끌어안은 채 굳어있었다. 밖에서 노크를 하며 치즈루를 부르는 소리가 들렸으나 반응하고 싶지 않았다. 마음속에서 이러면 안 된다고 이성적인 자신이 질책했지만, 그보다도 지치고 힘들어서 아무 것도 하고 싶지 않다는 본능이 더 앞섰다.
대답이 없자 누군가가 방 안으로 들어온 것 같았다. 신경 쓰고 싶지 않았다.
누군가의 손이 치즈루의 어깨에 닿았다. 귀찮고 싫었다. 반사적으로 뿌리쳤다.
누군가가 말을 건넸지만, 응답하지 않았다.
곁에 있던 인기척이 멀어졌다. 문이 닫히고, 치즈루는 다시 혼자되어 모든 감정을 내려놓았다. 끌어안은 이바의 옷자락만이 기댈 수 있는 전부였다.

깜박 잠들었던 모양이다. 눈을 뜨자 창 밖에서 빛이 비쳐들고 있었다. 아침이 밝았다. 그게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

‘이바 씨가 없어.’

간밤에 다 쏟아냈다고 생각한 눈물이 다시 흘러넘쳤다. 치즈루는 눈을 감고 빛을 시야에서 차단했다. 아무리 밝다한들 정말로 원하는 사람이 곁에 없는데, 아무리 눈부신 빛이라도 의미가 없다고 생각했다.
그것은 오래전 느꼈던 감정의 지문을 더듬게 했다. 치즈루의 기억 속, 아주 먼 어제, 떠나가던 하치로 오빠를 바라보던 때의 감정을. 또 경에 있을 때의 감정들도 떠오르게 했다. 처음 신선조 둔소에 잡혀왔을 때의 일, 자유를 빼앗기고 오랜 시간 머무르며 겪었던 일들, 그 때 애써 외면했던 상처들이 기회를 놓치지 않고 끌려나왔다.
또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굳어버린 몸에 힘이 들어가지 않을 쯤, 목마름과 허기에 눈이 뜨였다. 눈이 정말 그쳤는지 온화한 빛이 방 안에 가득했다. 고개를 들자 어지러움이 들어 비틀거렸다. 바닥에 쓰러진다 생각했는데, 단단한 지지대가 받쳐주었다.

“치즈루.”

다른 누군가가 아닌, 고작 며칠이었는데 몇 달은 못 본 것처럼 그리운 사람의 목소리가 가까이서 들렸다.

“이바 씨……”

갈라진 목소리가 났다. 치즈루가 아픈 눈을 깜박이며 올려다보자, 머리카락이고 옷자락이고 모두 흐트러지고 땀에 젖은 모습의 이바가 보였다. 치즈루가 이바의 목에 팔을 감았다.
이바는 아무 것도 묻지 않고 치즈루를 꼭 안아주었다. 아침 일찍 오릉곽에서 오오토리로부터 급편을 받았을 땐 놀랐다. 치즈루의 상태가 아무래도 이상하니 먼저 돌아와 달라는 요청이었다. 이바는 사색이 돼서 뒷일을 모토야마에게 맡기고 돌아왔다. 그리고 방에 틀어박힌 치즈루의 모습을 보자, 사정을 헤아리지 않아도 무엇을 해야 할지 이해했다.

치즈루는 열이 났다. 이바가 곁에 있어 안심한 탓에 무리의 반동이 닥쳤다. 이바는 저녁 늦게까지 치즈루를 간병했다. 히지카타에게는 환자들에게서 감기가 옮은 것 같다고 설명했다. 치즈루의 상태를 처음 보러 왔던 오오토리는 그 뿐만이 아님을 눈치 챘지만, 굳이 캐물으려 하지 않았다. 대신 잘 보듬어주라는 묘한 어조의 한마디를 얹었다.
겨우 열이 내려 치즈루가 정신을 차렸을 땐 밤이 깊었다. 이바를 기다리던 시간이 꿈만 같았다. 이바를 부르려 했지만 목이 막혀 소리가 나지 않았다. 이바는 치즈루의 움직임을 알아채고 물을 가져왔다. 치즈루가 직접 마시겠다고 손을 뻗었지만 제지당했다.
이바가 물을 마시고, 입술을 겹쳐 옮겨주었다. 두 번을 그렇게 옮겨주고서, 세 번째는 좀 더 오래 입술이 머물렀다. 이마가 가볍게 닿고 따듯한 숨결이 섞였다. 말 못할 안도감에 다시 또 치즈루의 눈물샘이 파열하고 만다. 이바가 손가락으로 눈물을 조심스레 쓸어주었다.

“제가, 왜 이런지 모르겠……”
“괜찮아요.”
“이, 이바 씨 때문이에요-”
“네. 알아요.”

이바는 치즈루가 걸어두었던 마음의 빗장을 쉽게 열어버리고 말았다. 삭히고만 있었던 어두운 감정이 가득한 마음을 달래고, 상냥한 목소리와 말로 속삭여 조금씩 조금씩 풀어내, 더 이상 무서워하지 않아도 된다고, 슬퍼하지 않아도, 고독하지 않아도 된다며 열어 젖혔다.

“어떡해요, 저 어떻게 하죠? 이, 이대로 아무 것도 견디지 못하게 되면-”
“그렇지 않아요. 그저 지금은 혼란스러워서 그래요. 약해진 게 아니에요, 치즈루. 걱정 말아요.”

이바의 부재를 통해 깨달았다. 지금껏 너무 많이 참아왔음을. 미련하게도 마음의 그릇이 삐거덕거릴 만큼 아픔을 삼켜왔음을.
……이바가 그런 자신을 언제나 걱정해 왔음을.

“곁에 있어주세요.”
“네.”
“이바 씨, 어디에도 가지 말아요.”
“전 언제나 당신의 곁에 있어요. 당신을 지킬게요.”

두서없는 치즈루의 이야기를 이바는 끝까지 들어주었다. 헤어짐도, 좋아하는 사람들의 죽음도, 마주했던 폭력들도. 실은 너무나도 힘들고 무서웠다고. 이제야 당신이 나를 그토록 걱정했던 이유를 알겠다고. 내가 상처 입을 바에야, 당신이 찢겨 죽는 것이 차라리 낫다고 말하던 당신의 말을, 염려를 이제야 알겠노라고.
이야기가 어디에서 끊어졌는지 알 수 없었다. 어느 순간 치즈루는 이바의 품에서 잠들었고, 이바도 그런 치즈루를 품어 안고 새벽 어둠 속에 의식을 내던졌다. 두 사람은 깊은 밤 온기를 나누어 가졌다.
그것이 서로를 지키는 유일한 방법인 양.

2018년 생일선물 위시리스트

올해도 위시리스트를 발표(?) 합니다...

이바치즈 연성(글/그림)
<안드로이드여도 괜찮아> or <여성작가 SF단편선> 구매하시고 인증

희움의 압화가방 (예약)
먹을 것(다 잘먹으니 간식류, 기프티콘 모두 OK)
차 or 커피
책 상품권

예쁜 우산 or 튼튼한 우산꽂이
PS4 듀얼쇼크
일본 가서 즐겁게 놀다오라고 용돈 보태주기(20일 출국)

감사합니다...
리스트는 언제나 선물을 고민하시는 분들을 위한 것이지 따로 준비하시는 분들은 괘념치 마십시오 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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