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식 + 공지 + 방명록 외 기타 주접대기

<연재>

지금은 신작 연재를 쉬고 있습니다. :)

안개 도시 모음곡 (프로젝트 ILN 독자 참여) / 예스24 E연재
마과학온천함선비행담 베스타 ~라신느 꿈의 저편~ / 예스24 E연재

<출간>

2016.  6. 인어의 바다 / 그래출판 (TL, 19세 미만 구독불가)
2016.  2. 안드로이드여도 괜찮아 / 온우주
2010. 12. 전자책 단편선 뿌와뿌와 벌레 / 피우리 ('뿌와뿌와 벌레'외 12종 수록)
2010.  5. 아빠의 우주여행 / 황금가지 ('아빠의 우주여행' 수록)
2009.  8. 한국환상문학단편선2 / 웅진 시작 ('파랑새' 수록) / 절판

<ORPG>

성관마 13시대 캠페인 'Dice & Devotee'

<땅주인 음지식물>

* 별채 - 여기 (취미생활 외)
* 텃밭 - 츄베랄's RPG 풀때기밭 (RPG 전용)

<기타>

PSN : Chuverall
Battle.net : 츄베랄#3236

[박앵귀/이바x치즈루] 화신풍(花信風) - 4 (終) 글과 그림

[박앵귀/이바x치즈루] 화신풍(花信風) - 3

4.

치즈루는 일찍 눈이 떠져 문을 열고 정원을 내다보았다. 정원의 벚나무의 꽃잎은 대부분 떨어져, 이제 푸릇한 새싹이 돋아있었다. 늦장을 부린 거리의 벚나무 몇 그루만이 아직 꽃을 맺었지만 그 마저도 조만간 흩어질 것이었다. 벚꽃은 아름다웠다. 에도에 오기 전의 기억은 잃어버렸기 때문에, 치즈루가 기억하는 한 벚꽃을 보는 건 이번이 처음이었다.
어쩜 저렇게 아름다울까. 처음 핀 꽃을 보았을 때 그렇게 생각했다. 일찍 핀 목련도 보았지만 목련의 고상한 아름다움은 치즈루에게 잘 와 닿지 않았다. 아니, 그것이 ‘아름답다’라고 생각해 본 적도 없었다. 치즈루가 아름다움을 인지한 건 벚꽃을 보기 직전 만났던 사람 덕분이었다.
차가운 겨울의 끝에서 모든 것이 흐리게만 보였던 세상에 유독 환한 색채였던 사람. 그 색채가 지금 만물이 생동하는 봄의 빛깔과 닮았다는 걸 이제는 안다. 아찔할 만큼 눈부신 색채를 처음 보았고, 치즈루는 그 감각을 아름다움으로 인지했다. 그래서 이후 본 벚꽃은 아름답다고 생각할 수 있게 됐다. 앞으로 어떤 꽃을 보더라도 벚꽃만큼 아름답지는 않을 것 같았다.
일순 환영을 봤나 싶어 눈을 비볐다. 흩날리는 꽃잎의 길 아래 소년이 서있었다. 나무를 올려다보는 단정한 옆얼굴을 치즈루는 홀린 듯이 쳐다보다가 엉금엉금 기어, 종국에는 일어나 옷도 머리도 엉망인 채로 달려 나갔다.

“치즈루. 안녕하세요. 잘 잤어요?”

이바가 언제나처럼 인사했다. 치즈루는 큰 눈을 깜박이며 이바를 올려다보기만 했다.

“왜 그래요? 내 얼굴에 뭐라도 묻었나요?”

슬픈 예감이 들었다. 꽃이 피면 언젠가 진다. 꽃이 필 무렵 바람처럼 나타난 사람이었다. 왜 하필 오늘일까. 치즈루는 영문을 알 수 없는 답답함에 넋을 잃었다.

“머리 묶어줄게요.”

이바는 치즈루의 상태를 살피다가 손을 끌어 마루 계단으로 데려갔다. 치즈루의 방에서 빗과 빨간 머리끈을 가져와 엉망으로 흐트러진 머리카락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처음 만났을 땐 어깨에 닿는 길이었던 치즈루의 머리카락은 제법 길어 등에 닿았다.

“어떻게 묶어줄까요? 양 갈래를 해도 귀여울 테고, 땋아도 예쁠 텐데.”

치즈루는 잠깐 말이 없다가 작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하치로 오빠처럼……”

이바는 조심조심 치즈루의 머리카락을 한데 모아 올려 묶었다. 거울을 가져와 보여주자, 치즈루는 그 모습이 썩 맘에 드는지 볼을 붉히고 살며시 웃었다.

“마음에 드나요?”
“응-”
“치즈루에겐 역시 빨간색이 잘 어울려요.”

치즈루는 다시 또 이바의 얼굴을 가만히 응시하다 안아 달라 졸랐다. 평소에 피우지 않는 어리광을 조르는 치즈루가 낯설고 당혹스러웠지만, 이바는 순순히 청을 들어주었다. 여전히 이바의 가녀린 두 팔은 치즈루를 안고 오래 버티는 게 힘들었다. 팔에 감각이 없어져가도 이바는 묵묵히 치즈루를 안고 있었다.

“치즈루.”

혹여 잠이 들었나 싶어 이바가 소녀의 이름을 불렀다. 품에서 목소리에 반응하듯 치즈루가 부비적거렸다. 이바는 울컥하고 치미는 감정을 깊은 호흡으로 가다듬고, 조용한 목소리로 말했다.

“당신에게 부탁이 있습니다.”

치즈루는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열심히 검술 수련을 해서 강해지려고 해요. 그래서 정말로 당신을 지킬 수 있고, 부끄럽지 않은 사람이 되면……”

다시 또 샘솟는 슬픔을 마른 침과 함께 삼켰다. 울지 않기로 약속했다. 부친과, 자신에게.

“반드시 맞이하러 올게요. 그러니까, 만약 그 때 치즈루가 날 기억한다면요.”

한심한 말을 하지 않도록 몇 번이나 말을 골랐다.

“그 땐, 저를 선택해 주었음 해요.”

말하면서도 얼마나 터무니없는 부탁인지 우스워 헛웃음이 나왔다.
치즈루가 자신을 어떻게 보고 있는지 모르지 않았다. 치즈루가 처음 울음을 터트렸을 때, 가지 말라며 찾았던 오빠는 자신이 아니었다. 코도는 치즈루가 고향에서 일어난 사고로 친오빠를 잃었다고 이야기 해주었다. 큰 충격으로 사고 자체의 기억은 잃었으나, 종종 그 때의 감정 때문에 힘들어 한다고 알렸다. 치즈루가 무의식적으로 자신에게서 잃어버린 친오빠를 찾고 있다고 생각했다.
기쁘면서도 서운했다. 치즈루의 의지가 온전히 이바 자신을 향한 것이 아니기에, 더더욱 강해지고 싶었다. 자신을 선택하지 않더라도, 단지 누군가의 대신이 아니라 이바 하치로라는 사람 자체로 봐준다면 좋을 터였다.

“당신은 내겐 처음으로 지키고 싶은 사람이에요. 지킴받기만 했던 저를 누군가가 의지 할 수 있는 사람으로 만들어주었어요. 내가 강해지면 반드시 당신을 지키겠어요. 그러니까……”

저린 팔에 억지로 힘을 들여 치즈루의 작은 몸을 꽉 끌어안았다.

“제발, 슬퍼하지 말아주세요. 웃으면서 행복하게 지내주세요.”

그 말은 마치 주술처럼 치즈루에게 감겨들었다. 치즈루는 이제 일어날 일이 이별임을 깨달았다. 떠나간다. 아름다운 봄이 떠나간다. 상실이 얼마나 클지 예상할 수 없었다. 치즈루는 필사적으로 무언가를 잡으려고 했다. 떠날 이바를 잡을 수는 없었다. 이바의 고통과 결심을 헛되이 만들고 싶지 않았기에, 대신할 무언가를 필사적으로 잡으려고 했다.

“도련님. 이제 가셔야합니다.”

이바를 데려온 하인이 코도와 함께 정원으로 와 돌아갈 시간을 알렸다. 이바는 절망적인 낯빛이 됐지만, 곧 추스르고 고개를 끄덕였다. 치즈루도 선선히 몸을 일으켰다. 눈은 빨갛게 충혈 돼 있었다. 필사적으로 울음을 참은 탓이다. 치즈루는 코도에게로 달려가 뒤에 숨어버렸다.

“그간 감사했습니다. 코도 씨.”
“건강하게 잘 지내게. 나야말로 고마웠네.”

깍듯이 인사하고 이바는 하인과 함께 진료소를 나섰다. 쉬이 떨어지지 않는 다리를 질책해 천천히 걸었다. 뒤를 돌아보고 싶은 충동을 억눌렀다. 터져 나오려는 오열을 눌러 죽였다.
꽃바람이 불었다. 바람이 코도 뒤에 숨어있던 치즈루의 등을 떠밀었다. 치즈루는 행여 자신이 달려가 이바를 붙잡을까봐 한쪽 손을 코도의 손에 단단히 얽고 소리쳤다.

“하치로 오빠!”

그 목소리가 결국 이바의 발을 붙들었다. 이바가 돌아본다.
치즈루는 울면서, 또 있는 힘껏 웃으면서 손을 흔들었다.
이바도 웃었다. 마주 손을 흔들어 인사에 화답했다.

“또 봐요, 치즈루. 반드시 또 만나요!”

기약 없는 말과 약속을 남기고 소년은 미련 없이 떠나갔다. 치즈루는 그 모습이 사라지고서도 한참을 서있었다. 꿈같은 벚꽃의 시간이 종언을 고했다.

연이어 큰 이별을 겪은 치즈루가 행여 다시 마음의 병을 얻지 않을까 코도는 걱정했다. 치즈루는 전처럼 감정을 잃거나 하지는 않았다. 하지만, 아픈 기억만큼은 다시 또 망각하기를 선택했다. 이별의 고통 대신 치즈루가 필사적으로 잡은 것은 ‘이별에 슬퍼하지 않고 행복하게 지내는 앞날’이었다. 이바가 당부했던 삶을 살기 위해 역설적으로 소년을 잊어버리기로 한 것이다.
시간이 흘러 계절이 다시 돌아올 무렵, 치즈루는 이바의 존재를 완전히 잊어버렸다. 코도도 굳이 이바의 이야기를 꺼내 치즈루의 마음을 건드리지 않았다. 몇 달간 잠깐 놀았을 뿐인 타인의 존재는 몇 년도 채 되지 않아 기억에 남지 않을 공산이 컸다. 그 시기가 좀 더 빨리 찾아왔을 뿐이라 생각했다.


이윽고 10년의 시간이 흘러-

“올해 벚꽃도 참 예쁘게 피었네요.”

치즈루는 밝고 건강하게 자라, 타인의 마음을 이해하고 보듬을 줄 아는 당찬 소녀가 되었다. 진찰부를 정리하던 코도가 치즈루의 시선을 따라 정원을 보자 하얀 벚꽃이 만개해 자태를 뽐내고 있었다. 치즈루는 마당의 벚나무를 볼 때마다 그리움을 만면에 가득 품었다. 코도가 문득 생각나 물었다.

“어릴 때 일을 기억하느냐? 다섯 살 때쯤.”

치즈루는 미간을 찡그리고 고민하다 고개를 저었다.

“십년 전의 일이잖아요. 잘 기억이 안 나요. 그 때 무슨 일이 있었더라?”

여전히 치즈루는 기억하지 못했다. 이바에 대해 기억한다면 직전 유키무라 마을의 일도 떠올릴 공산이 컸으므로, 코도는 복잡한 심경으로 안도했다.
이바 도장의 젊은 사범이 쇼군의 근위대에 속했다는 이야기를 최근 풍문으로 들은 터였다. 심형류는 혈통으로 이어지는 유파가 아니니, 그가 과거 코도와 치즈루가 만났던 이바인지는 확신할 수 없었다. 설령 그 소년이라 할지라도 분명 치즈루에 대한 일도 한 때의 추억으로 잊혔을 것이다.

“아이의 시간이란 참 무정하기도 하지.”
“갑자기 무슨 말씀이세요.”
“아니. 아무 것도 아니다.”

치즈루가 싱겁다 핀잔을 주며 청소 준비를 했다. 소매끈을 묶고 곧 빨간 머리끈을 꺼내 긴 머리를 올려 묶었다.

“그러고 보니 언제나 그 끈으로 머리를 묶는구나.”
“빨간색이 제게 어울린다고 하셨잖아요. 이렇게 올려 묶는 머리도요.”
“난 그런 말을 한 적이 없는데.”
“아버님이 아니셨어요? 분명 누군가가……”

치즈루는 곰곰이 기억을 더듬었지만 아무래도 생각나지 않았다. 코도는 기분 탓이라며 손을 젓고 뒷정리를 치즈루에게 맡긴 채 자리를 떠났다. 빗자루를 들고 멍하니 서있던 치즈루가 밖에서 불어온 꽃향내 가득한 바람을 맞았다. 툭, 눈물 한 방울이 떨어졌다.

“어, 어째서?”

눈에 먼지가 들어간 것도 아닌데 돌연 나온 눈물에 치즈루가 당황했다. 누군가의 체온을 닮은 따듯함이었다. 그런데 그게 누구였는지 기억이 나질 않았다. 치즈루는 영문 모를 슬픔에 소리 없이 울었다.
벚꽃을 아름답다고 생각한 게 언제였는지, 누군가와 한 비밀스런 약속도 기억나지 않았다. 사실은 잊어버려선 안 됐는데, 잊어버리고 말았다. 참을 수 없이 공허하고 슬펐다.
치즈루는 바랐다. 이렇게나 애절한 그리움이라면 언젠가 기억할 수 있기를, 진심으로.


<終> 20170427 RALL in <박앵귀 ~진개~ 바람의 장>

[박앵귀/이바x치즈루] 화신풍(花信風) - 3 글과 그림

[박앵귀/이바x치즈루] 화신풍(花信風) - 2

3.

마중인이 오지 않은 이유가 이바 도장의 도련님을 노리던 유괴범의 술책이었음이 밝혀졌다. 유괴범은 이바가 유키무라 진료소를 자주 오가는 것을 눈여겨 봐두었고, 그날 마중인을 납치하여 감금한 뒤 이바가 혼자 돌아가기를 기다렸던 듯 했다. 코도의 안배로 계획이 틀어졌지만, 진료소에 아이들 둘만 남게 되자 절호의 기회라 생각했다고 한다. 코도는 유괴범을 순찰대에 넘기고 이바를 정성껏 치료해 주었다. 큰 상처는 없었지만, 팔이 세게 붙들리고 바닥을 구른 터라 멍과 잔잔한 생채기가 피부에 남았다. 이바는 아프단 소리 하나 내지 않고 의젓하게 치료를 받았다. 그 곁에 치즈루가 안절부절 못한 채 이바의 옷자락을 꼭 붙들고 있었다.

“아버님, 하치로 오빠 많이 다쳤어요?”
“긁히고 멍이 든 정도니 너무 걱정할 것 없다. 하지만 이런 위험에 처하게 만들다니…… 미안하구나.”
“아닙니다. 코도 씨 탓이 아니에요. 저 때문에 치즈루가 위험할 뻔 했으니까, 제가 사과를 드려야죠. 부친께는 잘 말씀드리겠습니다.”
“고맙네. 이바 도장에는 연락을 넣어두었으니 내일 일찍 마중인이 올 거야. 오늘은 둘 다 많이 놀랐지? 내가 깨어 있을 테니 걱정 말고 가서 쉬려무나.”

이바는 예의바르게 감사를 전하고 치즈루를 보듬어 방으로 데려왔다. 치즈루가 불안을 씻지 못하자 이바는 팔베개를 해주었다. 치즈루가 이바의 왼팔에 감긴 붕대를 보고 울 것처럼 표정을 찡그렸다.

“많이 아파?”
“아뇨. 안 아파요.”

이바는 상대를 안심시키는 웃음을 지어보였다.
상처가 곧 나아버리는 자신의 체질에 대해서 치즈루는 의문을 가져본 적이 한 번도 없었다. 넘어지거나 종이에 손을 베이거나 해도 앗 하는 사이에 나았고, 코도 또한 그러했으므로 당연한 것이라 생각했다. 그래서 이바의 상처가 바로 사라지지 않자 이상하다고 생각했다.
이바는 조금 주저하다 조심스레 물었다.

“치즈루는 괜찮아요?”
“응. 난 상처가 금방 나아. 하, 하나도 안 아팠어.”

그럴 리가 없을 것이었다. 누구나 상처를 입으면 아프다. 빨리 낫건 아니건 상처를 입은 순간 고통이 생기지 않을 리 없었다. 이바는 소녀의 서툰 배려가 가슴 아팠다. 치즈루가 보통 사람과 다른 체질을 가졌다는 사실 따위는 중요하지 않았다. 눈가가 뜨거웠다. 자신에 대한 환멸과 치즈루에 대한 사랑스러움이 동시에 피어났다.

“거짓말쟁이네요.”

이바는 억지로 울음을 참고 고소를 지었다. 치즈루는 당황해서 아니야, 아니야 하며 고개를 젓다가 표정을 도무지 숨길 수 없는지 이바의 품에 꼬물꼬물 파고들었다. 이번에야말로 피로를 감당할 수 없게 된 이바가 치즈루를 꼭 안고서 잠들었다. 서로의 높은 체온이 무엇보다도 편안했다. 바깥에선 여전히 강하고 스산한 바람이 불었지만, 두 아이들에겐 더 이상 두려움도 장애도 아니었다.

간밤에 분 바람이 잠든 꽃망울을 모두 일깨운 듯, 다음날부터 일제히 꽃이 피기 시작했다. 벚꽃이 만개하고 봄이 무르익으며 세상의 색채가 환해졌다. 유괴범 소동이 일어난 뒤로 이바가 유키무라 진료소에 오는 빈도가 줄었다. 언제나 동행인이 붙어 다녔고, 보다 이른 시간 돌아가게 됐다. 치즈루는 섭섭해도 고집을 피우거나 어리광을 부려서 이바와 다른 사람들을 곤란하게 하지 않았다. 자세한 정황을 이해하진 못해도 이바가 무리해서 자신을 보러 온다는 사실 정도는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대신 다른 동네 친구들과 어울리는 시간이 늘었다.
사회 속 낯선 이들과 어울리면서 치즈루는 자신의 존재를 조금씩 알아가기 시작했다. 가장 큰 자각은 체질이었다. 친구들의 장난을 말리다 크게 다친 날, 상처가 순식간에 나아버리는 모습을 보고 아이들이 도망쳐 버렸다. 친하게 지내던 친구들이 태도를 돌변해, 치즈루를 괴물이라 부르고 평범하지 않은 인간으로 낙인찍었다. 치즈루는 자신의 존재가 결코 보통이 아니며, 그러한 사실이 ‘보통의 인간’인 사람들에게 얼마나 기분 나쁜 존재로 여겨지는지 깨달았다.
돌이 날아든다.

“야-이, 괴물! 냉큼 에도에서 나가!”

바로 얼마 전까지만 해도 함께 뛰어 놀던 친구의 입에서 잔혹한 외침이 튀어나왔다. 치즈루는 겁에 질렸다. 돌에 맞는 것은 아파도 괜찮았다. 자신은 기분 나쁜 존재였으니까. 하지만 이 날 만큼은 피하고 싶었다. 이바가 오랜만에 진료소에 온 날이었기 때문이었다.
치즈루의 발이 얼어붙었다. 이런 모습을 이바에게는 보이고 싶지 않다. 하지만 아이들의 괴롭힘이 도를 더하자, 소란을 눈치 챈 이바가 안에서 뛰어나왔다.

누군가요, 지금 돌을 던진 건! 다치면 어떻게 하려는 겁니까!”

언제나 온화하고 상냥한 하치로 오빠가 아니었다. 소년은 무척 화가 나 있었다. 아이들이 그 소리에 겁을 먹고 도망쳐 버렸다. 쫓아나가려는 이바의 팔을 치즈루가 붙들었다.

“잠깐, 하치로 오빠. 괜찮아.”
“괜찮다니, 뭐가 말이죠?”

치즈루는 망설였다. 고개를 푹 숙이고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가만히 있으면 몰라요. 제대로 알려주세요.”

그 보챔은 마치 모든 걸 알고 있지만 확신을 필요로 하는 듯 했다. 침묵이 내려앉았다. 꽃바람만이 불어, 지는 벚꽃잎을 이리저리 흩트렸다. 치즈루는 필사적으로 슬픔을 삼켰다. 하치로 오빠에게 미움 받을지도 모른다. 저 단정하고 아름다운 얼굴이 경멸을 담을 것을 단지 예상하는 것만으로도 다리가 떨렸다.

“내가 평범하지 않은 게 잘못이니까…… 그러니까, 어쩔 수 없어.”

미워하지 말아줘. 그런 마음으로 고했다.

“평범하지 않은 게 그렇게 나쁜가요?”

돌아온 목소리에 나쁜 감정은 일절 들어있지 않았다. 치즈루가 고개를 들어 이바를 올려다보았다. 소년의 눈동자는 변함없이 따듯했다.

“만약 내가 평범하지 않다면, 당신은 나를 싫어할 건가요?”

치즈루는 힘주어 고개를 저었다. 이바가 치즈루의 손을 두 손으로 감싸 쥐고 말했다.

“그렇죠? 나도 똑같아요. 당신은 괴물 따위가 아니에요. 평범한 소녀에요.”

온전한 이해였다. ‘다름’을 인지하여 ‘다름’에 상처받았지만, ‘다름’을 이바는 이해해주었다. 그래서 약속했다. 자신의 몸에 대해서는 다른 사람에겐 비밀로 해두자고. 이바는 치즈루가 상처입지 않기를 바랐고, 치즈루는 이바의 그 마음을 받아들였다. 소년과 소녀는 그렇게 비밀을 만들었다.

“만약 치즈루를 괴롭히는 아이가 있으면, 내가 혼내줄게요.”
“혼내준다니, 하치로 오빠가?”
“괘, 괜찮아요. 지금까지는 제대로 하지 않았지만, 앞으로는 열심히 검술 연습을 할 테니까.”

치즈루는 동그랗게 뜬 눈으로 말로 표현하지 않는 의문을 던졌다. 왜 그렇게까지? 라고.

“소중한 친구를 지키기 위해서니까요.”

그 말이 얼마나 깊은 애정을 품었는지. 얼마나 큰 배려와 온기를 담았는지, 치즈루는 벅찰 만큼 알게 되었다. 들어부어진 애정이 가슴에서 넘쳐나 치즈루 안에 갇혀있던 무언가를 풀어주었다.

“치즈루?”
“고마워……”

치즈루가 어색하게 얼굴을 찡그렸다. 자연스럽게 그리 되었다. 오랫동안 잊고 있었기에 얼굴 근육이 잘 움직이지 않았다. 누가 본다면 우스꽝스럽다 여길 그런 얼굴이었지만, 이바는 표정의 의미를 바로 알아챘다. 감격에 목이 메었다. 얼마나 보고 싶었는지 모른다.

“예뻐요. 치즈루, 잘 됐어요.”

이바는 바랐다. 치즈루의 웃음이 더 자연스러워지고 밝아지기를. 치즈루가 행복하게 웃을 수 있도록, 안전하고 행복한 삶을 살 수 있기를. 거기에 더 바랐다.

“내가 반드시 치즈루를 지키겠어요. 지금은 약하지만 정말로 노력할 게요. 약속해요.”

바람은 약속이 되었고, 약속은 맹세가 됐다. 이바는 치즈루의 미소를 단 하나도 놓치지 않으려는 양 바라보고, 기억해 두었다. 맹세를 관철함이 어떤 대가를 필요로 하는지 어린 마음에도 충분히 알고 있었다.



강해지고 싶으니 검술 수련을 하고 싶다고 부친과 마주했을 때, 히데나리는 아들의 의지를 존중하며 이야기 해주었다.

“너는 버릴 수 있느냐. 네가 정녕 지키고 싶은 이를 위해, 혹독하게 너 자신을 벼릴 각오가 되어 있느냐. 어설픈 마음과 실력이 아닌, 진실로 강한 사람이 될 때 까지 말이다.”
“그건 어떤 의미입니까?”
“자신을 지키지 못하는 자가 타인을 지킬 수는 없다. 목적에 시선을 빼앗겨 정말 해야 할 일을 잊어버린다면 아집에 지나지 않는다. 강함을 추구하기만 해서는 결코 강해질 수 없으며, 미련을 버리지 못한다면 미련에 끌려 다닐 뿐이다. 네 결의를 버림으로 증명할 각오가 되어 있느냔 의미다.”

즉, 수련동안 치즈루를 보지 않을 수 있느냐는 질문이었다. 이바는 순간 망설였지만, 곧 자세를 바로하고 강건한 눈빛을 발했다. 각오는 이미 되어있었다.

“저의 무력함은 제가 잘 알고 있습니다. 하겠습니다.”

지금은 자신에게 모든 걸 의지했던 소녀의 무게조차 감당하기 힘들었다. 그런 무력함은 싫었다. 설령 치즈루가 그런 자신을 받아들여준다 할지라도, 정작 중요할 때 소중한 사람을 지킬 수 없다면 평생 자신을 용서할 수 없게 되리라.
히데나리는 속으로 쓰게 웃었다. 정말로 진지하고 돌아가는 법을 모르는 아들이었다. 결의가 어떤지 알아보기 위한 질문이지만, 가혹할 만큼 깊게 받아들였다. 하지만 그렇기에 아들의 성장이 못내 기대가 됐다.

“내일 마지막으로 유키무라 진료소에 다녀오너라.”
“예? 하지만……”
“제대로 신세를 졌다고 유키무라 님께 인사를 드리고, 치즈루 양에게도 약조하고 오너라. 네 결의만큼 확실히 약조하려무나.”

아이들의 시간은 무정했다. 금방 잊어버리고, 어릴 때의 마음은 어른이 되면서 변하거나 퇴색하기 마련이었다. 오히려 그렇게 함으로써 어른이 된다고들 한다. 그 무정한 시간 속을 살아 어른이 될 아들에게 부친은 온정을 베풀었다. 설령 지금의 마음을 어른이 된 아들이 잃어버린다 할지라도 잊어버리지는 않기를 바랐다.

“눈물을 보이는 것은 오늘을 마지막으로 하도록 해라.”
“예……”

그러나 만약, 아들이 지금의 마음을 고스란히 지키며 어른이 된다면-

‘너는 정말로 강한 사람이 되어 있을지도 모르겠구나.’

히데나리는 손으로 얼굴을 가리고 소리 없이, 곧 맞이할 이별을 슬퍼하며 우는 유약한 아들을 엄하지만 따듯한 눈으로 지켜보았다.

[박앵귀/이바x치즈루] 화신풍(花信風) - 2 글과 그림

[박앵귀/이바x치즈루] 화신풍(花信風) - 1

2.

모토야마 코타로와 이바는 부친들이 서로 친한 관계로, 나이대도 비슷해 금방 친구가 됐다. 모토야마의 부친은 어디로 튈지 모르고 조숙하게 머리만 큰 말썽쟁이 아들이 이바의 점잖은 성품을 좀 닮았으면 하고 바랐지만, 아이들은 언제나 어른들의 바람을 배신하는 법이었다. 모토야마의 말썽을 이바가 말리다가 결국 휘말려서 함께 사고를 치는 일이 빈번해졌다. 이바의 가족들은 오히려, ‘너무 얌전한 하치로가 코타로 덕에 생기가 돈다’며 방관하기까지 했다. 이러니저러니 해도 두 소년은 서로를 생각하고 잘 어울리는 친구 사이였다.
이바가 도장에 놀러온 모토야마에게 ‘사람을 웃게 만드는 방법’에 대해 묻자, 모토야마 코타로는 고개를 갸웃하며 무슨 의미냐 되물었다. 

“웃는 방법을 잊어버린 사람이 있어서요. 어떻게 하면 웃어줄까 하고.”
“이바, 또 어디서 오지랖이라도 부렸어?”
“오지랖이라고 해야 하나…… 아무튼 뭔가 좋은 방법이 없을까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모토야마는 팔짱을 끼고 심각하게 생각하다, 번뜩 뭔가를 떠올리더니 활짝 웃었다.

“나 알아!”

그러고서 모토야마는 복도의 상태를 살피더니 살금살금 이바를 이끌고 어디론가 향했다. 도착한 곳은 부엌 창고였다. 모토야마가 어떻게 우리 집 부엌 창고 위치를 정확하게 알고 있는 걸까. 이바는 의심스러운 눈으로 모토야마를 바라보았지만 깊게 생각하지는 않기로 했다. 모토야마라면 처음 이 집에 왔을 때 이미 탐험을 끝내고도 남았다.
두 소년이 부엌 창고에 잠입해 문을 닫았다. 모토야마는 이런저런 상자며 선반 위를 살펴보며 감탄을 터트렸다. 그러다 낮은 선반에서 무언가를 꺼내들었다.

“이거였어.”

모토야마가 잘 봉해진 백자 병을 들어 보였다. 이바는 그것이 무엇인지 바로 알아차리지 못해 눈만 깜박거렸다. 모토야마는 새실거리며 웃더니 뚜껑을 열었다. 공기 중에 희미하게, 부드러우면서도 쓴 향기가 퍼졌다.

“설마……”
“아버지가 이걸 마시면 맨날 웃었어. 분명 이거야. 계속 궁금했다구.”
“안 돼요! 아이들은 술 같은 건 마셔선 안 된다고-”

이바가 채 말리기도 전에 모토야마가 냉큼 입을 대고 술을 들이켰다. 이바가 금세 병을 빼앗았지만, 이미 내용물의 상당량이 사라진 뒤였다. 핏기가 가신 표정으로 모토야마를 돌아보았다.

“모, 모토야마?”
“……우.”

모토야마는 고개를 푹 숙이고 몸을 부들부들 떨었다. 이바가 어른을 불러와야 하나 고민한 찰나, 갑자기 모토야마가 깔깔대며 웃기 시작했다.

“으햐, 햐아하~! 와핫, 지인짜 기분 조하~!”

눈이 풀리고 발음이 샜다. 새빨개진 얼굴로 모토야마는 실성한 사람처럼 웃다가 몸을 가누지 못하고 바닥에 쓰러졌다. 모토야마의 예상대로 아주 뛰어난 효능이었다. 이바는 어찌할 바 모르고 당황하다, 모토야마의 웃음소리에 이끌려 달려온 하인에게 발견당해 부친 앞으로 연행 당했다. 사정을 설명하니 크게 혼이 나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술은 아직 이르단다”라며 모토야마 대신 억울한 꾸중을 듣고야 말았다. 

“누군가를 웃게 만들고 싶다고 하였느냐.”

부친, 이바 히데나리가 설교의 끝에 넌지시 물었다. 이바는 유키무라 진료소에 드나들기 시작한 일과, 그곳에서 만난 치즈루에 대해 말했다. 코도는 치즈루가 마음에 병을 안고 있어 웃는 방법을 잊어버렸다고 알려주었다. 첫 만남 이후 몇 번 더 치즈루를 만나 군것질을 하고 함께 놀기도 하였으나, 웃는 모습은 한 번도 본 적이 없었다. 

“최근 무슨 일에 그리 골몰하나 했더니. 어려운 문제에 봉착했구나. 사람의 생사보다도 더 의지대로 만들기 어려운 것이 사람의 마음이란다. 결코 쉽지는 않을 게다.”

이바는 풀이 죽어 고개를 숙였다. 히데나리가 조용히 웃고서 다시 물었다.

“왜 그 아이의 웃는 모습이 보고 싶더냐.”
“그건……”
“그 아이가 불쌍해서더냐. 아니면 유키무라 님께 부탁을 받아서더냐.”
“아뇨. 아닙니다. 어느 쪽도 아니에요.”
“그러면?”

이바는 대답하기 어렵단 얼굴로 한참을 고민하다 조심스레 부친과 눈을 마주쳤다. 잘 말 할 순 없을지언정, 거짓을 말하진 않겠다는 의지의 표명이었다.

“실은 저도 잘 모르겠어요. 하지만, 치즈루가 아프지 말았으면 좋겠습니다. 치즈루가 웃을 수 있다면 저는 무척 행복할 것 같아요.”

히데나리는 아들의 눈동자에서 지금까지 본 적 없는 열의와 강직함을 발견했다. 그것은 본디 아들에게 바랐던 길의 가장 바른 곧은 마음이기도 했다. 부친이 대답하지 않고 흐뭇하게 웃기만 하자, 이바는 자신이 실수라도 했나 싶어 곧 불안해했다. 히데나리가 조용히 이바를 얼렀다.

“하치로.”
“예.”
“네가 잘못 생각하지 않는 한 언젠가는 네 마음이 전해질 거다. 성급해 하지 말고, 상대의 말을 허투루 듣지 말고, 친절하게 대해주어라. 네가 조급하면 상대도 조급해진다.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웃음이란 서두르고 강요한다고 나오는 게 아니란다.”

이바는 부친의 충고를 마음 깊이 새기고 감사를 전했다.

“너무 유키무라 님을 귀찮게 하진 말거라. 그리고 밤늦게 까진 있지 말고. 최근 거리에 아이들을 유괴한다는 자들이 있어 소문이 흉흉하니 조심해라. 꼭 어른들과 함께 움직이도록.”
“명심하겠습니다.”

나가봐도 좋다는 허가를 얻어 이바가 방으로 돌아오자, 모토야마는 행복한 표정으로 잠에 빠져 있었다. 사람 속도 모르고 팔자 좋게 늘어졌다. 이바가 아이 답지 않은 무거운 한숨을 쉬었다. 모토야마와 함께 있으면 언제나 이런 일에 휘말리게 될 것 같단 막연한 예감이 들었다.
실제로 모토야마는 이후 애주가의 삶에 눈 뜨게 되고 그의 주사를 말리는 게 이바의 소일이 되어버리지만, 이것은 또 다른 이야기.


치즈루는 이바가 오기로 약속한 날에는 이른 아침부터 문가를 서성거렸다. 그러다 멀찍이서 이바가 하늘하늘한 걸음걸이로 다가오는 걸 발견하면 버선발로 달려가 품에 안겼다. 이바는 언제나 이렇게 몸을 던져 맞아주는 치즈루가 좋았다. 웃음은 없어도 하치로 오빠, 보고 싶었어, 라며 솔직하게 감정을 내보였다. 이바는 치즈루의 손을 잡고 진료소로 가서 코도에게 먼저 인사를 했다. 그런 뒤 같이 책을 읽는다거나, 군것질을 하러 나가거나 하며 해가 질 때 까지 놀았다.
난학서를 읽는다는 기존의 목적은 사실상 무용이었다. 아무리 또래보다는 똑똑한 이바였지만, 전문 서적을 이해할만한 지식은 없었으므로 대체로 글자를 읽는데 지나지 않았다. 그럼에도 난학서는 이바의 마음을 늘 두근거리게 했고, 조금이라도 알만한 문맥이 나오면 무척 기뻐했다.
이바가 출입하기 시작하며 또 하나 달라진 점은 진료소 주변에 사는 동네 아이들이 하나 둘 찾아오기 시작했단 것이었다. 처음엔 호기심으로 얼굴을 비추던 아이들은 서로서로 쉽게 사귀었고, 치즈루에 대해서도 ‘웃지 않는 이상한 아이’정도로만 생각하고 받아들였다. 덕분에 치즈루는 이바가 오지 않는 날에도 함께 놀 친구들이 많이 생겼다. 말수도 퍽 많아져서 코도도 적잖게 안심했다. 모든 게 따스해지는 날씨처럼 잘 풀려가는 것 같았다.

시간이 흘러 마당의 벚나무에 꽃이 하나 둘 피어날 무렵, 그 일이 일어났다.
언제나처럼 함께 놀고, 해질 무렵이 되어 이바가 돌아갈 시간이 되었다. 그런데 평소라면 먼저 와서 기다리고 있어야 할 마중인이 오지 않았다. 코도는 걱정이 된 나머지, 이바 도장에 연락을 넣어둘 테니 진료소에서 자고 가라 안배해 주었다. 이바가 배려를 감사히 받아들였다. 

“하치로 오빠, 오늘 자고 가?”
“그렇게 됐어요. 같이 잘까요?”
“응!”

치즈루는 이바가 자고 가는 걸 무척 좋아하는 눈치였다.
달이 없는 밤이었다. 바람이 많이 불어 문이 덜컹거렸다. 진료소의 세 사람이 슬슬 잠자리에 들려고 했을 때, 급한 환자가 생겼다며 심부름꾼이 진료소를 찾았다. 코도는 이바에게 치즈루를 부탁한다는 말을 남기고 심부름꾼과 함께 떠났다.
치즈루는 코도가 없는 어둡고 차가운 진료소의 분위기를 못 견뎌 두려워했다. 이바가 곁에 누워 치즈루를 품어 꼭 안아주었다. 그러자 조금씩 진정했다.

“무서운 꿈을 꿔.”

치즈루가 불쑥 말했다. 

“많이 무서워요?”
“깨어나면 생각나지 않아. 근데 너무 무서워.”

돌이킨 기억의 공포에 질린 치즈루가 손을 덜덜 떨었다. 이바는 혼신의 힘을 다해 치즈루를 달랬다. 체온을 나누고, 손을 잡고, 식은땀으로 젖은 이마에 입맞춰주었다. 이바가 지금보다도 더 어릴 적 밤이 무서워 잠을 잘 이루지 못할 때 그의 모친이 언제나 해주던 방법이었다. 효과가 있었는지, 치즈루는 안심한 얼굴로 고른 숨을 내 쉬며 잠에 들었다.
오히려 이바가 잠을 설치고 말았다. 완전히 자신에게 의지하는 치즈루의 체온이 묘하게 뜨겁기도 했고, 행여 잠든 사이 정말 무슨 일이라도 일어나는 게 아닐까 싶은 불안과, 그런 일이 일어난다면 방관할 수 없다는 각오 때문이었다. 그럼에도 아직 어린 몸이 졸음을 떨쳐내기는 어려운지라 졸다 깨기를 반복했다.
세 번 쯤 깨었을 때였을까. 유독 큰 덜커덩 소리에 이바가 반사적으로 소리의 진원을 바라보았다. 방의 장지문은 내측에 하나, 그 너머에 또 하나가 있는 2중 구조였다. 아무리 바람이 거세게 불었고 잠결에 들은 소리라지만 지나치게 컸다. 이바가 숨을 죽이고 문 쪽을 뚫어져라 바라보자, 그곳에 불길한 그림자가 잠깐 비추고 사라졌다. 코도 씨가 돌아온 걸까? 이바가 치즈루가 깨지 않도록 조심스레 떼어놓고, 발소리를 죽여 문가로 다가갔다. 더 이상의 기척은 없었지만 확인할 필요는 있을 것 같았다.
이바가 복도로 나가자, 진료실 쪽 창가로 희미한 빛이 새어나왔다. 역시 코도일지도 모른다 생각했다. 자신과 치즈루의 상태를 잠든 사이 보고 나간 소리를 들어 깨었을 것이라 생각했다. 이바는 한결 편한 마음으로 진료실 문 밖에서 목소리를 냈다.

“선생님. 돌아오셨나요?”

돌아오는 대답이 없었다. 

“코도 씨?”

그렇게 말하며 문을 열려고 한 순간, 뒤에서 뻗어온 손이 이바의 입을 틀어막았다. 다른 팔로는 이바의 몸을 강하게 붙들었다.

“네가 이바 도장의 도련님이렸다?”

낮고 음침한 목소리가 살기를 띄었다. 이바는 구속에서 빠져나오려고 안간 힘을 썼다.

“저항하지 마. 상급품에 흠이라도 나면 안 되니까. 과연, 이 녀석이라면 천, 아니 몇 천 금은 뜯어낼 수 있겠는걸.”

부친의 당부가 뇌리를 스쳤다. 최근 아이들을 유괴한다는 사건. 자신이 그 대상이 될 줄은 생각 못했다. 심장 박동이 거세지고 반대로 온 몸에서 피가 식는 기분이었다. 이렇게 잡혀갈 수는 없었다. 어떻게든 빠져 나갈 궁리를 했다. 그 때였다.

“하치로 오빠한테서 떨어져!”

소녀의 목소리가 울려퍼지고, 이어 퍽 하는 소리와 함께 이바를 억압했던 팔과 손의 힘이 약해졌다. 몸을 굴러 빠져나온 이바는 상황을 파악할 겨를 없이 남자의 몸을 세게 밀어 쓰러트렸다. 남자는 발이 꼬여 비틀거리다 기둥에 머리를 박고 마당으로 굴러떨어져 버렸다. 움직이지 않는 걸 보아 그대로 의식을 잃었다.

“치즈루!”

치즈루의 손엔 나무 빗자루가 들려있었다. 치즈루는 울음에 젖은 얼굴로 거친 숨을 헉헉 몰아쉬었다. 얼마나 사력을 다해 바투 쥐어 앞뒤 없이 휘둘렀는지 손바닥이 까져 피가 흘렀다. 이바는 미안함과 대견함이 뒤섞인 복잡한 기분으로 치즈루의 손을 먼저 살폈다.

“많이 아프죠?”

치즈루는 입술을 꽉 깨물고 고개를 저었다. 이바가 뭐라고 말하려고 했지만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소녀의 손에 난 상처가 이미 사라지고 없었기 때문이었다. 어째서, 라고 반사적으로 튀어나오려는 말을 삼켰다. 치즈루는 아무 것도 의식하지 않았다. 또 지금은 그런 것보다도 우는 치즈루를 달래는 일이 더 급했다.
코도가 돌아와 사태를 수습하는 동안 이바는 치즈루를 달래면서 처음으로 자신의 무력함에 분한 감정을 느꼈다. 가장 용서할 수 없는 건 자신을 노린 무뢰배가 아니라, 자신 때문에 치즈루도 위험에 처할 뻔 했다는 사실이었다. 이바 자신도 닥쳐온 두려움이 버거울 지경이었지만 치즈루가 느꼈을 두려움에 비하면 아무 것도 아니라며 스스로를 질책했다.

“미안해요, 치즈루.”

약한 자신이 싫다. 꼼짝도 하지 못하고 소녀에게 도움을 받은 자신이 한심하다. 소년은 그 때 처음으로 바랐다.
강해지고 싶다, 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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