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DF] 성채 (Citadels) └- 불새, 불꽃의 연인

소년은 황금의 열쇠를 구멍에 꽂아 넣고, 문을 열었다. 무거운 문을 열자 건조한 공기가 코 끝을 스쳤다. 햇살이 비쳐 드는 복도와 달리 방 안은 어두웠고 선득한 냉기만이 감돌았다. 햇빛 아래서 불안하게 서 있던 소년은 어두운 방으로 들어가 문을 닫았다. 그 곳에 동화된 듯 편안하게 숨을 내쉬었다. 공기만큼이나 건조한 시선으로 방 안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이 곳은 보물창고였다. 단지 금은보화가 아닌 종이로 만들어진 보물들의 요람이었다. 지금보다 어렸던 때, 소년이 아버지의 손을 잡고 처음 이 곳에 왔을 때 세상 그 어떤 것 보다 커다란 선물을 받은 기분이었다. 그 때 만큼은 아버지에게 진심으로 감사했다. 소년의 아버지는 아들이 자신의 뜻과 다른 방향으로만 욕망을 보이는 것을 늘 마음에 들어 하지 않았지만, 결국 아들이 원하는 것은 무엇이든 해 주었다.
원형의 천장이 높은 방, 도미노처럼 일정한 간격으로 서 있는 책장들은 2층까지 이어져 틈새 안으로 어둠을 머금고 있었다. 형형색색의 책들이 분류법에 따라 빼곡하게 들어차 빼내 줄 사람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차가운 대리석 바닥 위로 동방에서 들여온 기하학적인 무늬의 카페트가 깔려 있었다. 방의 정 중앙에는 책이 있는 곳이라면 으레 있을 법한 책상과 의자 대신, 과하다 싶을 정도로 크고 화려한 쇼파와 카우치와 티 테이블이 사선으로 비스듬히 놓여 있었다. 이 곳을 찾는 이들이 어떤 사람인지를 알려주는 극단적인 배치였다. 소년은 처진 눈꼬리를 가늘게 뜨며 자조적으로 웃고, 명확한 발걸음 소리를 내며 방 안으로 걸어 들어왔다. 손가락으로 미량의 먼지가 쌓인 책장 턱을 훑었다. 이쯤 규모라면 매일같이 청소를 하라는 것이 하녀들에게는 지나치게 가혹하다.
소년은 쇼파에서 쿠션과 모포를 집어 들고 방 가장 안쪽의 책장 틈 사이로 들어갔다. 촛불 등을 켜고 벽에 붙어 앉아 위를 올려다 보았다. 양쪽 책장이 거대한 거인의 다리 같았다. 거인의 다리 사이에 앉아서 밟혀 죽을 때만을 기다리는 난쟁이 같다고 생각했다. 기왕 죽는다면 밟혀 죽는 것도 나쁘지 않겠지. 이죽대며 가까이 있는 책 한 권을 꺼내 들었다. 모노클을 바로 끼고, 먼지를 한번 털어낸 뒤 표지를 열었다. <신앙 관점에서의 인간 본성에 관한 고찰>. 아이전의 저명한 신학자 마틴 쿤첸슈타트 저, 까스띠예 완역본. 2쇄.
지지리도 재미가 없는 주제였다. 거기다 이미 한번 읽어본 적이 있는 책이다. 소년은 이골 내며 책을 덮어 발치에 던져두고 다른 책을 꺼내 들었다. <자연 철학 사조>. 역시 이미 읽어본 것이다. 던져둔다. 또 다른 책을 골라 들었다. <테우스 성경의 유산>. 역시나. 몇 권의 책을 꺼내 보았지만 도무지 새로운 것이 보이지 않았다. 바닥에 멋대로 쌓이는 책들이 열 권이 되고 스무 권이 되자, 소년은 새로운 책을 포기하고 쌓여있는 책들에 손을 뻗어 가지런히 탑을 쌓기 시작했다.
이 곳에서 얼마나 많은 책을 읽었던가. 어림잡아 셈해도 천 단위는 될 것 같다. 이 곳 뿐만 아니라 대학에서, 집에서, 골방 대신 박혀 있었던 코르티잔 하우스에서 책에 파묻혀 지낸 시간까지 포함한다면? 소년은 곧 셈하던 것을 포기했다. 새로운 책이 나올 때 까지 읽었던 책들을 분류하며 바닥에 차곡차곡 쌓아 올렸다. 아무렇게나 쌓아 올린 책 줄은 그리 높게 쌓지 않았는데도 비틀거리며 무너지려 했다. 헝클어놓고, 비슷한 크기와 두께끼리 분류해서 다시 쌓았다. 한 층 한 층 쌓아 올리며, 손가락에 잡히는 책이라는 형태의 지식들이 구조화 되가는 현상을 오묘한 기분에 젖어 보았다. 생각지도 못한 발견이었다. 그저 매개라 생각한 종이 무더기들이 일정한 형태를 갖춰가며, 소년의 머릿속에 박혀진 산발된 지식들을 물질적으로 인식할 수 있게 만들었다. 보이지 않는 장난감을 드디어 손에 쥔 어린 아이처럼, 소년은 들떠 책장에서 읽었던 책을 모조리 빼내 자리 주위가 꽉 들어찰 만큼 쌓고 또 쌓았다.
형태를 보자면, 소년이 지루해하는 철학은 밋밋하고 단조로운 일자로, 재미있어 하는 수학은 세 개로 나뉜 삼각 탑의 형태로, 예술은 파도처럼 지그재그로. 쌓다가 무너져 발등을 찧기도, 높이 있는 책을 꺼내다 사다리에서 떨어질 뻔 해도 아랑곳 않고 건축가처럼 심취해 책의 탑을 만들었다. 하나 둘 완성된 탑들은 밖으로 나갈 작은 구멍 하나만 남겨둔 채 소년을 보이지도 않도록 감추고, 단단히 지키는 성벽이 되었다. 간신히 몸을 뉘일 수 있을 정도의 공간만 남아 더 이상 쌓기가 어려워질 수위에 이르자 소년은 만족하며 손뼉을 쳤고 실성한 사람처럼 낄낄대며 웃었다. 더 이상 새로운 책을 찾는 것은 포기하기로 했다. 소년은 쿠션을 베고 모포를 목까지 끌어올리고 손에 닿는 아무 책이나 들어 읽기 시작했다. 책이 지독하게 재미가 없고 읽었던 것이더라도 괘념치 않았다.

* * * * *

정면 승부를 원하십니까? 소년의 물음에 총사령관은 당연하지 않느냐며 반문했다.

“군세가 열악한 것도 아니오, 승기가 이쪽에 있으니 당연 정면으로 돌파해야겠지. 한참 사기도 올라 있는 상황이니 기세를 몰아 바로 돌격하는 것이 올바르지 않나? 적군도 죽음을 불사하고 끝까지 항전할 태세이고.”
“네. 당연 그래야겠죠. 하지만 그러면 왠지 저쪽에서 원하는 바가 될 것 같아서 말입니다.”
“원하는 바?”

총사령관으로 참전한 토레스 공, 펠릭스 팔마 데 베로니코 데 토레스는 도무지 건너편에 앉아있는 소년의 생각을 읽을 수가 없었다. 불의의 사고로 출전하지 못하게 된 현 알다나 공 대리로 참전한 소년은 전대 알다나 공 몬테로 알다나 데 알다나의 아들이자, 현 알다나 공 세자르 루이스 델 마르티네즈 데 알다나의 사촌동생인 라미로 세니에 델 테클라 데 알다나였다. 이제 열 여덟 살이라는 소년은 한번도 전쟁터에 나와본 적이 없었다고 했지만 전략 전술에 있어 여느 아카데미 출신 군사보다도 해박했다. 더군다나 적의 심리를 읽는 데에는 무서울 정도의 식견을 가지고 있었다. 현재 아군이 큰 피해 없이 승기를 잡을 수 있게 된 데의 절반 이상은 라미로의 덕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라미로는 테이블 위에 펼쳐진 대치 지도를 내려다 보며 말했다.

“애초부터 이 전쟁은 아옌데 측에 불리한 싸움이었어요. 지금 적군이 정면 승부를 받아들일 이유는 어디에도 없지요. 그런데도 응했다는 게 마음에 걸린단 말입니다. 물론 전쟁터의 군사들이라는 게 반쯤은 미쳐 있어서, 우두머리가 어떻게 홀리느냐에 따라 죽음도 불사하긴 하지만.”
“아옌데는 충분히 그럴 수 있는 인물이네.”
“압니다. 그러니 그 작자가 지금까지 목숨을 연명하고 살아올 수 있었죠. 다만, 아옌데가 이 자리에서 죽을 인물이 아니라는 걸 염두에 둔다면 적군의 결사적인 항쟁은 아옌데 한 명을 살리기 위한 개수작에 불과하다는 겁니다. 분명 아옌데는 자신을 따르는 군사를 미끼로 내놓고 본인은 도망칠 거라고요. 적군을 모두 처리한다는 데서는 좋은 성과겠지만, 적군의 대장을 잡지 못해서야.”
“어떻게 하고 싶은가?”
“마음에 안 들어요. 작전을 변경합시다. 시간이 조금 더 걸리더라도, 저 결사의 의지를 다지는 병신 같은 작자들에게 아옌데 같은 놈을 따르면 어떻게 되는지 충분히 알게 해 주자고요. 지킬 가치가 없도록. 우리 군은 절대로 정면승부를 하지 않습니다. 왜 그래야 하죠?”

차갑게 내뱉고 라미로는 측면과 후위를 둘러싸고, 적의 보급로를 끊어 궁지에 몰아넣은 뒤 말려 죽이는 작전을 고안해 말했다. 회의에 참가한 펠릭스를 비롯한 장교들은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어린 소년이 지시하는 대로 곧이 수긍하는 수 밖에 없었다. 작전회의가 끝나 장교들이 모두 나가고, 막사에는 펠릭스와 라미로만 남았다. 라미로는 품에서 곰방대를 꺼내 잎을 담고 불을 지폈다. 가장 상석에서 턱을 괴고 있는 펠릭스를 향해 넌지시 말했다.

“총사령관은 제지하실 줄 알았는데요.”
“내가?”
“명예로운 돈 토레스잖습니까.”
“너무 비아냥거리지 말게. 적군에게까지 보여줄 신사도는 없어. 전쟁은 어떤 대의명분을 붙이든 잔인한 일이지. 나 역시 아옌데에게는 개인적인 원한도 있고. 자네 말대로 적의 의도대로 해 줄 이유가 없으니까.”
“흐응.”
“다른 녀석들도 알고 있어. 그리고 무엇보다 자네 말을 거역하기가 어렵고.”

라미로는 묵묵히 곰방대를 빨고 연기를 뱉었다. 희부연 아지랑이가 공기를 혼탁하게 물들였다.

“몬테로의 아들놈이니까요.”

무심하게 내 뱉은 많은 의미가 담긴 그 말에 펠릭스는 쓰게 웃고 말았다. 라미로가 곰방대를 문 채로 도망치듯이 막사를 나왔다. 승기를 잡고 사기가 높아진 상황이라도 전쟁터는 그 자체로 아비규환이다. 화약 냄새와 피 냄새가 진동하며, 부상자들의 신음소리와 적을 몇이나 때려죽였다는 둥의 정신 나간 이야기들이 듣기 싫어도 귀에 꽂혔다. 단조롭지만 현기증을 불러 일으키는 색채와 원색적인 감정들만이 소용돌이치는 소리, 피부를 찔러대는 메스꺼운 공기. 막사 밖의 풍경에 염증을 느꼈다. 전쟁은 미친놈들이나 하는 짓이야. 전부 미쳤어. 속으로 욕지기를 퍼붓고 거주 막사로 걸음을 옮겼다.

“……몬테로의 아들이라니까.”
“그 아비에 그 아들이야.”

회의 내도록 바짝 겁에 질려있던 장교들이 저편에서 궐련을 피우며 떠드는 목소리에 화가 치밀었다. 입술을 잘근잘근 씹으며 막사로 돌아와 침대 위에 몸을 던지고 이불을 머리 끝까지 뒤집어 썼다. 듣기 싫다. 듣기 싫다. 이 곳에 있기 싫다. 가슴 속이 울렁거리며 역한 것들을 모두 토해내고 싶었다.
문득 웃음이 터져 나왔다. 머리를 부여잡고 몸을 웅크렸다. 이 곳에 있기 싫다니 무슨 소리야. 스스로를 비웃으며 몸부림쳤다. 그렇게나 떠나고 싶은 이 전쟁터가 실은 무척 즐거웠다. 전략이 맞아 떨어져 적들이 비명을 지르며 죽어가는 모습을 볼 때 마다 기쁨이 샘솟았다. 손 끝이 떨리며 안쪽으로 파고드는 희열과 고통은, 감정이라는 이름을 지닌 어떤 기관을 탈색시켰다. 잔혹함이 증가할수록 기쁨도 비례하듯 증가한다. 타인의 고통이 달콤한 미약이 된다. 채워지지 않는 굶주림과 갈증에 몸을 비틀고, 라미로는 그것이 자신에게 내재된 광기라는 것을 이미 알고 있었다.
기척도 없이 이불 위로 손길이 느껴졌다. 한없이 따듯하고 상냥한 손길이 라미로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그는 샌 목소리로 떠들기 시작했다. 억양의 높낮이가 드문 구연이었다.

“아버지는 악인이었다. 몬테로 알다나 데 알다나는 늙은 왕을 볼모로 잡고, 악정을 펼치며 시민들의 원성을 샀다. 잔혹하고 자비가 없어 거역하는 이들을 모두 피로 숙청했고, 파괴하려 했다. 결국 분노한 시민들의 응벌을 받아, 목이 잘리고 몸뚱이는 거리에 매달려 넝마가 되도록 해코지를 당했다. 사악한 위정자의 전형적인 최후였다. 어머니 또한 악인이었다. 소피아나 테클라 데 알다나는 물 밑에서 몬테로에게 조력하며, 방해가 되는 세력을 억압하고 제거하고 온갖 부정을 저질렀다. 그녀 또한 그녀에게 원한을 가진 이들의 손에 죽어 시신조차 남지 않았다. 한 시대를 풍미한 두 악인은 그렇게 죄의 대가를 치렀다.”

너는? 손길의 주인이 물었다. 라미로는 피식 피식 웃으며 답했다.

“나는 악인의 자식이다. 두 악의 피를 반씩 이어받은 악마와 다름 없다. 그렇도록 낙인 찍혀 있다. 아니라고 항변하거나 변명하는 것은 진작 그만뒀어. 죄가 없다고도 말하지 않아. 방조했지. 그 것 만으로 이미 죄였어. 설령 그것이 죄가 아니라고 할지라도 친 부모를 죽음으로 몰아 넣은 건 테우스 성경에서는 명백히 죄야. 결국, 악인의 자식으로 태어난 것이 가장 큰 죄겠지.”

원죄라고 말하고 싶은 거야? 손길의 주인이 다시 물었다. 라미로는 답하지 않고 크게 폭소를 터트렸다. 이불을 끌어 내리고 몽롱하게 고개를 돌렸다. 한 여자가 내려다 보고 있었다. 빨려 들어갈 것 같은 까만 눈동자를 애틋하게 올려다 본다. 까만 머리카락과 까만 눈동자의 여자는 어머니처럼 라미로의 곁을 지키고 있었다. 성모 마리아의 현신을 보는 듯 했다. 실제로 그녀는 입술을 달싹여 지극히 신성한 언어를 읊조렸다.

테우스께서 널 구원하실 거야. 너는 어떤 죄도 짓지 않았어. 단지 너는 그들을 막을 힘이 없었을 뿐이야.

“그리고 구원은 스스로 구하는 자에게 온다고?”

자애로운 마리아는 슬프게 웃었다. 라미로는 표정을 잃고 눈을 감았다. 몇 번 더 쓰다듬는 손길이 느껴졌고, 이윽고 사라졌다.

* * * * *

성벽에서 푸르스름하게 밝아오는 새벽을 응시했다. 등불의 기름이 마침 다 떨어졌다. 새로 불을 지피기 귀찮았던 터라, 그대로 해가 뜨기를 기다리기로 했다. 강가의 안개가 자욱했다. 성벽 난간에 턱을 괴고 강물의 경계와 그 너머로 펼쳐진 지평선을 눈으로 훑었다. 툭. 일순 손에서 힘이 풀려 들고 있던 책이 떨어졌다. 몇 개 계단 아래로 굴러갔다. 줍기 귀찮아서 내버려 두었다. 성벽 아래로 병영의 아침이 시작되고 있었다. 출정한지 며칠째더라. 세어보다 귀찮아져서 포기했다. 만사가 귀찮았다. 지루했다. 전쟁과 살육의 즐거움도 한 시 한 때였다. 턱을 괸 손이 입을 막았다. 막힌 소리로 웅얼거렸다.

“아버지도 매사 나태한 사람이었다. 그 사람에게 나라의 패권 같은 건 그다지 의미가 없었다. 그는 지루하지 않기 위해, 지루함 속에 파묻혀 문드러지는 것이 싫었을 뿐이다. 태만한 사람이었다. 그런 인간들은 권력을 가져선 안돼. 빨리 죽어서 이 나라에는 무척 잘 된 일이다. 나는 아버지와 정말로 많이 닮았다. 게으르고 나태하기 짝이 없다. 전쟁의 목적이나 삶의 목표 따위 의미가 없다. 매사가 지루할 뿐이다. 흥미가 없다. 즐겁지 않다. 어머니는 내가 아버지와 똑같기를 바라면서 아니기를 바랐다. 차라리 욕정에 미쳤다면 편했을 테지.”

그래서? 누군가가 되물었다. 라미로는 고개를 돌려 계단 다섯 개 아래에 나타난 사람을 보았다. 온통 하얀 옷을 입은 앳된 청년이 라미로가 방치한 책을 주워들었다. 선득할 정도로 매끄럽고 불완전하게 조형된 조각상 같았다. 관조적인 시선으로 형태를 훑어본다. 이 세상에 존재하는 것이 마땅한지 의문이 드는 청년이었다.

“수 없이 여자와 잤다. 딱히 뭔가를 한 건 아냐. 어머니가 보내온 여자들은 내게 아무 것도 하지 않아도 좋다고 했어. 일일이 응하기도 귀찮았다. 그냥 내버려 두면 알아서들 했어. 절정에 닿기 까지는 그다지 유쾌하지 않아. 몸도 마음도 제멋대로 날뛰는 걸 보는 건 썩 유쾌하지 않았다. 절정에 이르면, 글쎄 그건 나쁘지 않았어. 하지만 정말 무의미했지. 어느 순간에는 어머니도 포기하더군. 아버지는 검술을 가르쳤어. 그것도 재미 없지는 않았지. 어차피 발버둥 쳐 봤자 아버지를 이길 수는 없었고, 어느 수준까지 오르니 그마저도 흥미가 떨어졌다.”

정말 의욕 없는 녀석이군. 그래서 책에 파묻혀 사는 건가? 조롱 어린 물음이 이어졌다. 하얀 옷의 청년의 제스춰는 크고 유했다. 바라보는 것 만으로도 썩 흥미가 동했다.

“눈에 보이는 형태로, 별 달리 움직이지 않아도 얻을 수 있고, 그러면서 쉽게 지루해 지지 않았지.”

예술이라도 하지 그랬나. 그림을 그린다거나 글을 쓴다는 건 어떤가. 너는 결핍이 심한 인간이야. 그런 결핍을 창조적 기제로 승화시킨다면, 너는 희대의 천재가 되었을지도 몰라.

“그랬을지도. 귀찮아. 결국 내가 능동적으로 뭔가 성과를 만들어 내야 한다는 것이 가장 싫은 거야. 당면한 문제를 풀어 나가는 건 어긋난 큐브를 맞춰 가는 정도의 즐거움은 되겠지.”

라미로는 자리를 털고 일어섰다. 바람이 훅 불어와 안개를 흩었다. 하얀 청년은 어디론가 사라지고 없었다. 청년이 서 있던 자리에 떨어진 책이 속지를 펄럭이고 있었다. 무심하게 주워 성벽을 내려왔다.
야밤 중 적 진지의 배후 급습을 시도했던 군대가 귀환했다. 가장 선봉에서 말을 타고 들어온 펠릭스는 또렷한 목소리로 부하들에게 지시를 내렸다. 팔과 다리에 붕대가 매여 있었다. 보나마나 몸을 사리지 않고 전선에서 날뛰었음이 확실했다. 비아냥이 절로 튀어나왔다.

“명예로운 돈 토레스. 목숨이 아홉 개라도 되십니까?”
“무사히 귀환한 것에 대한 칭찬으로 듣지.”

넉살 좋게 웃어 넘기는 청년이 이해가 되지 않았다. 귀족으로써의 명예, 레이디를 지키고자 하는 기사도, 조국에 바치는 충성심. 그런 종류의 감정 만큼이나 불필요하고 쓸 데 없는 감정이 어디 있단 말인가. 한결 같은 모습에 짜증이 났지만 눌러 죽였다.

“어땠습니까.”
“습격은 성공적이었네. 적군의 식량을 모두 불태우고 퇴로를 끊었어. 대부분 포로가 되었지. 하지만 아옌데는……”
“놓쳤군요.”
“면목없네.”
“아니오. 어차피 반반의 확률이었으니까요. 이렇게 쉽게 잡혀줘도 아깝잖습니까. 물론 이 이후는 우리들 소관이 아니게 될 것 같지만요. 척후대를 남기고 개선합시다. 이걸로 아옌데는 당분간 움직일 수 없을 만큼 큰 타격을 입었습니다. 수고하셨습니다.”
“그렇게 하지. 자네도 수고했네.”

펠릭스는 승전을 외쳤다. 사기에 찬 병사들의 환호성이 병영을 떠날 듯 했다. 이제 이 짓도 끝이로군. 아쉬움은 들지 않았다. 그저 하나의 일이, 잠깐 즐거웠고 또 금세 지겨워진 일 하나가 끝났을 뿐이었다. 피와 뇌수가 꿀럭거리면서 몸 곳곳을 느리게 만들었다. 불현듯 짜증이 몰려왔다. 참기 어려운 혐오가 주르륵 쏟아져 내렸다. 정말 의미가 없다. 재미가 없다. 그래서 신물이 난다. 짜증이 난다. 죄다 부수고 파괴해버리고 싶은 충동의 냄새가 역했다. 병사들의 환호성 소리가 소름 돋았다.

죽여버리지 그래.

“뭘?”

하얀 옷의 청년의 목소리가 들렸다. 울분을 가라앉히고 정면으로 고개를 들었다. 궐련을 태우고 있는 치졸한 장교들이 라미로를 힐끔 쳐다보며 저들끼리 말하고 있었다. 몬테로의 자식. 악인의 자식. 인정을 받거나 감사를 받고자 한 일이 아니었다. 그러나 무슨 일을 해도 돌아오는 것은 죄인의 아들이라는 낙인 뿐이다. 얼마나 재미 없는 일인가?

소란 속에 하나 둘쯤 죽인다고 아무도 뭐라고 안 해.

“내가 왜.”

너. 화가 났잖아?

라미로는 홀린 듯이 걸었다. 시선을 의식한 장교들이 제각기 흩어졌다. 그들 중 한 명의 뒤를 따랐다. 라미로의 뒤로 하얀 옷을 입은 청년이 따라오고 있었다. 발 걸음 소리도 들리지 않았지만, 있다고 확실히 느낄 수 있었다. 조종당하는 인형처럼 걸었다. 환호성과 소리에 묻혀 비명 소리 따위는 들리지 않을 것이다.
장교가 무슨 일이냐고 물었다. 라미로는 칼을 빼 들었다. 심상치 않은 분위기를 감지한 장교가 역시 칼을 뽑아 들어 응수했다. 뭐라고 소리쳤지만 무슨 소리인지 들리지 않았다. 장교가 덤벼든다. 그러나 장교의 칼은 라미로의 옷깃 끝에도 스치지 못했다.

“하나 알려줄까?”

장교가 뭐라고 반문한다. 역시 들리지 않았다. 라미로 자신의 목소리만 왱왱 맴돌았다.

“나를 미치게 만든 건 나 자신이고, 내 부모님이다. 내 부모를 미치게 만든 건 그들이고, 이 나라다. 너희가 그토록 목숨을 바쳐 지키려는 이 나라가 미친놈을 만든 거야. 알아? 그럼 누굴 탓해야 할까. 나? 부모? 멍청한 왕? 멍청한 왕을 보필하려던 충신들? 이 나라의 신민? 아니면 테우스?”

장교는 죽었다. 사유는 상관 명령 불복종이었다.

* * * * *

긴 검은 머리 여자가 몸 위로 타고 올랐다. 볼과 턱을 핥고, 목덜미를 내려와 가슴팍을 풀어 헤치며 긴 키스를 남겼다. 가는 손가락이 민감하고 예민한 곳을 터치할 때 마다 숨이 흐트러졌다. 열에 들떠 감은 눈을 떴다. 흑진주 목걸이를 목에 건 아름답고 요사스러운 여자가 웃으며 내려다 보고 있었다. 아, 이건 기필코 꿈이군. 입 꼬리가 씰룩거렸다. 여자의 애무는 점차 농염해졌고, 이윽고 빳빳하게 곤두선 성기를 음란한 구멍으로 삼켰다. 몸이 제멋대로 반응하는 유쾌하지 않은 기분과, 여자의 구멍을 오가며 느껴지는 전율에 동시에 시달리며 마른 침을 삼켰다. 거친 숨이 뒤섞인 목소리로 평온을 가장하며 말했다.

“아버지는 최악의 인간이었다. 자신의 일이 뜻대로 되지 않아서, 그 분을 참지 못했고 열 두 살 밖에 되지 않은 소녀 한 명을 분풀이 상대로 썼다. 소녀의 머리채를 쥐어 잡고, 옷을 찢고, 짐승처럼 기게 만들고, 뒤로 범했다. 3년 동안 사육했다. 나는…… 몰랐어. 저택에서 줄곧 함께 살고 있었는데도. 매일 밤 무슨 일이 일어나는 지 전혀 몰랐다. 어느 날 우연히 목격했다. 소녀는 자신의 팔을 깨물며 소리를 참으려 했고, 아버지는 무참히 짓밟고 또 짓밟았다. 마치 소녀가 언제 자살할 지 기다리며 즐거워 하는 것 같았다. 오싹했다. 어머니는 일방적인 폭력에 시달리는 소녀를 용서하지 않았다. 소녀에게 매번 독을 먹였다. 대놓고 죽일 수는 없었다. 아버지가 화 낼 테니까. 차츰 죽이려고 했다. 어머니 역시, 최악의 인간이었다.”

너는 어땠니? 허리를 흔들며 여자가 물었다.

“나는…… 그녀를 도와줄 수 없었다. 그 날 밤 이후, 나는 종종 그녀가 범해지는 걸 숨어서 지켜봤어. 어느 날은 밤 늦게까지 그녀의 방에서 지내다가 미처 피하지 못하고 침대 밑에 숨어서 듣기도 했었지. 그게 얼마나 흥분 됐는지 알아? 단단히 미쳤지. 그 모습이 혐오스러울 만큼 싫었지만, 사실 가장 혐오스러웠던 건 나 자신이었어. 그 때처럼 흥분됐던 때가 없었거든. 충동적으로 아버지가 파고든 구멍에 내 것을 꽂아 넣고 싶다는 생각을 얼마나 많이 했는지 몰라. 수음도 많이 했지. 기쁨과 쾌락을 주고 싶었던 것이 아니라, 고통을 주고 싶었다. 아버지가 죽을 만큼 부러웠어.”

여자의 움직임이 격렬해졌다. 더 이상 말할 계제가 아니었다. 차락차락 흑진주 목걸이가 서로 부대끼는 소리가 났다. 긴 검은 머리카락이 얼굴을 간질거렸다. 단발마의 탄식을 터트리며 사정했다. 순간 아무런 생각도 나지 않는 절정이 찾아왔다. 팔로 눈을 가렸다. 빛이 한 가득 쏟아져 내렸다. 온 몸이 따듯했지만 눈이 부셨다. 여자의 입김이 얼굴 가까이에 와 있었다.

“나는 당신을 그렇게 내버려 두고 싶지 않았어.”

그랬니?

“힘이 없다고, 말릴 수 없었다고, 그런 거 다 변명에 불과해. 나는 그저 내 욕망을 이기지 못했을 뿐이야. 그걸로 아버지를 탓하고 어머니를 탓하고, 모든 것을 탓하다가 죄다 포기 해버린 것 뿐이지.”

그랬구나. 여자의 목소리가 멀어졌다. 따스한 온기도 차츰 사라져, 건조하고 한랭한 기운이 감돌았다. 팔을 거두고 천천히 눈을 떴다. 어둡고 높은 천장이 보였다. 빼곡한 책장이 보였고, 위태위태한 책의 탑이 보였다. 멍하니 올려다 보다 손가락에 걸리는 것에 고개를 돌렸다. 읽었고 읽고 있었던 책 세 권이 뒹굴고 있었다. <예언자의 어머니, 마리아>, <인간의 결핍과 위대한 예술 유산>, <비도덕적 욕망>. 몸을 일으켜 한동안 시체처럼 멍하니 앉아 있었다. 연료가 떨어진 기계처럼 느릿하게 움직였다. 세 권의 책을 성벽 위에 쌓았다. 무릎을 안고 쪼그려 앉았다.
펠릭스는 죽었다. 승전보를 안고 개선문으로 개선한 그 날, 아옌데의 암살자에 의해 목숨을 잃었다. 가장 영광을 바치고 싶었던 여자의 앞에 주검이 되어 나타났다. 미쳐 돌아가는 세상이었다. 이 성벽 속에서만 살아갈 수 있다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아무 것도 먹지 않고, 자지도 않고, 죽어버릴 수 있다면 좋겠다고 바랐다. 견고하고 견고한 성벽 속에서,

침식된다.
파묻힌다.
굳어간다.
부서진다.

소년은 낄낄, 실성한 사람처럼 웃었다. 아무 책이나 들어 소중한 보물을 지키는 양 끌어안고 표지에 볼을 부볐다. 모든 것이 완전해지는 순간이었다. 그 순간 그는 위대한 왕국의 유일한 지배자와 다름 없었다. 성벽 속의 소년은 지독히도 행복했다.




20100427 RALL. 라미로, 막간

덧글

  • 아밀 2010/04/29 01:15 #

    마감하다가문득생각나서완성한 쿠얼리티가 아닌데여 Aㅏ........ 도입부가 특히 아름답그나
  • 츄베랄 2010/04/29 06:13 #

    이걸 먼저 완성해버리는 바람에 파장에 혼선이 와서 정작 마감해야할 글을 못쓰고 있었다는 손나칸지 ...... 이래저래 손봐서 독자적인 단편으로 만들어버려야지 - 응? 도입부 나도 맘에 든다능 ㅇㅇ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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