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DF] 하이랜드에서 들려온 이야기 └- 불새, 불꽃의 연인


168x년, 11월. 에두아르도의 하이랜드 여행, 그리고 귀환 후의 기록

하이랜드는 참 아름다운 곳이야. 방금 비가 오다 멎었는데, 돌로 만들어진 도시가 푸른 빛으로 빛나더군. 복잡하게 얽혀있는 클로즈들을 재미삼아 돌아다니다 보니 내가 어디 있는지 모르겠더라고. 탐험한다는 셈 치고 돌아다니고 있네. 숙소는 걷다 지치면 아무데나 잡으면 되겠지. 곳곳에 퀼트를 입은 남자들이 넘쳐나. 자네가 입으면 귀엽겠더군.
오후에는 하이랜드식 스콘을 벗삼아 차를 마셨다네. 아발론식에 비해 스콘이 조금 퍽퍽하고 담백하더군. 클로티드 크림과 사과잼을 발라 먹었는데 맛있었어. 비가 내리니 무척 운치가 있더군. 아발론은 회색이라는 느낌인데, 하이랜드는 푸른색이라는 인상을 지울 수가 없게 됐어. 자네도 분명 마음에 들어할거야. 그러고보니 클로즈를 걷다가 잠시 벤치에 앉아 쉬는데, 개를 데리고 산책하는 한 신사를 만났다네. 아발론식 정장을 입은 멋진 중년 신사였는데, 어쩐지 자네랑 비슷한 냄새가 나서 나도 모르게 말을 걸었지 뭔가. 하하. 까스띠예 정세를 묻길래 아는 한에서 이야기 했더니, 아발론 정치체제에 대해 말하면서 여러모로 조언에 가까운 이야기를 해주더군. 공부가 많이 됐어. 이런데서 한가로이 있기에는 꽤 큰 인물처럼 보이던데, 뭐 자네같은 사람도 그러고 있으니 이상한 일은 아닐거야. 성함을 여쭸는데 이안이라고만 답하던데...... 설마 그 이안 커티스는 아니겠지.
음, 그래. 하이랜드는 그야말로 '하늘과 맞닿은' 곳이란 느낌이야. 테아에서 가장 북부에 있기 때문도 있겠지만, 하늘과 가장 가깝기 때문에 이토록 아름다운 하늘의 푸른색을 머금고 있는거라고. 그런 생각이 들었어. 나는 이제 이 도시의 끝이라는 '세상의 끝' 클로즈를 찾아 여행을 떠날 생각이네. 그 끝에 뭐가 있는지 보고 오도록 하지. 나 없다고 너무 외로워 하고 있진 말게나. 뭐, 사실 어느정도는 외로워해줬음 좋겠어. 나만 외로워한다 생각하면 억울하잖나.
아참, 깜박했군. 지금 위치는 하이랜드 수도 커크월이라네.

세상의 끝 클로즈 끝에는, 거대한 성벽이 가로막고 있더군. 그 너머로 넓은 벌판이 펼쳐져 있었고, 어디가 땅의 끝인지 알 수 없게 수평선과 맞물려 있었어. 신기하지. 사실 어디에도 없다고는 할 수 없는 풍경인데, 단지 '세상의 끝'이라고 명명된 곳을 지나 바라보니 그렇게 각별할 수가 없더군. 어두워 질 때 까지 바라보고 이제 돌아온 참이네. 위스키 한잔 하고 좀 쉬어야겠어. 여기 위스키 정말 맛이 좋아. 반할거야. 아아. 많이 안마신다니깐. 한잔만 할거야. 호들갑 떨면 애 떨어진다?



빗소리에 잠에서 깼어. 빗소리마저도, 이 곳에서는 특별하게 들려. 아름다운 목소리로 노래하는 것 같아. 아마도 돌로 만들어진 벽과 바닥에 부딪치면서 나는 소리겠지만, 물내음과 소리에 민감한 나는 그 뿐임에도 모든 정경이 신비롭게 보여.
오늘은 하이랜드 섬 끝까지 가볼 생각이야.
거기까지 가는 마차를 구하는데, 집이 그 인근이라고 같이 가지 않겠냐며 한 아가씨가 청하더군. 식료품을 사서 가는지 마차에 짐이 한가득이었어. 동행이라도 있으면 했으니, 거절하지 않고 함께 가기로 했네. 아가씨에게 꽤 친숙한 물내음이 났어. 무척 아름다운 아가씨였네. 아마 세뇨르 테일러와 비슷한 인종일 것 같았는데. 마차가 출발하고 커크월을 벗어나며 아가씨가 내게 말했네. 당신에게서 그리운 내음이 난다고. 혹시 시 였냐고 묻길래, 질문을 되돌려 줬지. 당신이야말로 시가 아니었냐고. 아가씨는 웃으면서 자기는 셸키였고, 지금은 인간의 모습으로 자매들과 함께 하이랜드의 땅 끝에 마을을 이루어 살고 있다고 했네. 다시 돌아갈 수 없는 어머니의 바다를 곁에 두고, 그리워하며, 셸키 아가씨들은 인간으로써의 삶을 살고 있었던 거야. 언젠가 자네와 했던 인어공주 이야기가 생각나서 괜시리 눈물이 날 것 같더군. 우리는 많은 이야기를 했어. 나는 비록 시가 아니어서 그녀들의 애수나 애환을 모두 이해하고 알아듣지 못했지만. 셸키 아가씨는 요정 여왕의 내음이 나는 내가 그저 반가웠나봐. 오늘 밤은 그녀들의 마을에서 지낼 듯 해. 아가씨의 이름은 브란디였어.
그리고 시의 혈통을 타고 나지 않은 내가 호수의 여왕의 힘을 쓸 수 있는 건, 그녀의 축복을 받았기 때문일거라고 해. 한 때 브린 브라실에 속해 있었기 때문에 시 같은 냄새가 나는거라고 하더군. 아버지로 부터 아발론에서 태어났다는 이야기는 들었지만, 확인 받으니 기분이 묘해. 내 잃어버린 5년 동안이 브린 브라실에서의 삶이었다면, 인간인 나는 오랜 시간 그 곳에 있지 못했을테니까. 아마도 내보내졌던 거겠지. 다만, 왜 내가 호수의 여왕의 권속이었는지는 아직도 의문이야. 친 부모님의 사망은 지금 알아보기에는 너무 늦었다는 생각이 들어.
브란디라는 아가씨는 내 이야기를 듣더니, 차라리 호수의 여왕의 권속이었던 시를 찾아보는 것이 좋지 않겠냐고 권했어. 20여년 정도면 기억하는 자도 분명 있을거라고. 다음에 아발론에 가게 되면 한번 그렇게 해 볼까봐.
까스띠예는 지금쯤 시에스타겠군. 여긴 계속 비가 내리고 있다네. 어쩐지 늘어지고 싶은 날이야. 역시, 안되겠어. 비가 너무 자주 오니까. 난 태양빛이 더 좋은 사람인데. 하하.
구슬픈 파도소리야. 셸키들은 밤이 되면 노래를 부르는데, 가슴 속이 울렁거려서 참을 수가 없었어. 파도 소리에 녹아서..... 슬펐어. 자네에게 들려주고 싶기도, 아니기도 해. 여기 아가씨들은 전부 피부가 새하얗고 예뻐서, 나도 제법 하얀 피부의 소유자라 생각하는데, 섞이지 못하는 사람처럼 확 눈에 띄더군. 재미있었어.
셸키들은 마을 밖으로 잘 나가지 않지만, 가끔 인간 남자와 눈이 맞아 결혼해 마을 밖으로 떠난다고 하네. 시 핏줄이 남아있어서 그들은 오래 늙지 않고, 죽을 때 까지 젊은 모습이라. 그 모습 때문에 인간들 사이에 잘 섞이지 못해서 버림받고 다시 되돌아 오는 경우도 흔하다고 해. 또 그녀들은 딸 밖에 낳지 못한다고 하더군. 딸의 손을 잡고 함께 마을에서 생활하는 셸키들을 보았다네.
내가 인간이라 다행이야. 인간으로, 당신과 만나고 사랑할 수 있어서 다행이야. 동화속 인어공주도, 시도 아니라서 다행이야. 고마워 리카르도. 사랑해......

너무 먹고 마셨어. 아, 술은 많이 안마셨다니까. 아가씨들이 내 상태를 알더군. 즐겁게 춤추고 노래했다네. 별천지같아. 셸키 아가씨들은 아침에 고기잡이를 나가는 것 같아. 일찍 일어난다면 볼 수 있겠지. 어부들처럼 배를 타고 나가는 게 아니라,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고 바다로 뛰어들어서 물고기를 잡고 해산물을 캐온다더군. 함께 할까 생각했는데 역시 그건 일찍 일어난다면 생각해 봐야겠어. 어쩐지 질투 날 것 같기도 하고 말야.
뭐야, 여기 아가씨들 죄다 예쁘단 말야. 나 같은 외모는 평범한 것 보다 쬐끔 나은 정도. 역시 여기는 당신이랑 오면 안되겠어! ......흑. 조금만 더 예뻤으면 좋겠다...... 잘거야. 히잉.



결국 밤을 새고 아침 고기잡이까지 따라 갔다왔어. 졸려 죽겠군. 일단 한 숨 자고, 저녁무렵 돌아가서 이야기 해주겠네.

돌아왔는데 아직 안왔나? 어디 간거야. 일 아직 안끝났나보군. 정리할 겸...... 써둬야겠군.

셸키 아가씨들과 이런 저런 이야기를 하면서 밤을 보냈네. 동 트기전에 고기잡이를 나간다기에 따라나갔어. 고기잡이는 셸키 아가씨들에겐 나이와 별 관계가 없나봐. 오히려 나이가 많은 셸키일 수록 더 잘 잡는다더군. 인간과의 혼혈인 아가씨들은 핏줄에 따라 다르지만, 인간의 피를 많이 이었다면 물 속에서 숨을 쉬는 능력은 없다고 하더군. 물과 친화력은 있어서 수영을 잘 하거나 숨을 보통 사람들보다 오래 참을 수는 있지만 한계가 있다고 해. 셸키의 피가 진하면 능력 몇가지는 보존이 되서, 그런 아가씨들은 함께 고기잡이를 나가지. 그래서 새벽에는 마을이 조용해. 아이들을 돌보는 보모역의 셸키 아가씨 두 명을 제외하고, 혼혈 아가씨들을 제외하고 전부 나간다고 봐도 돼.
말했듯이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고, 맨 몸으로 바다로 들어갔어. 11월에 북부는 상당히 추웠지만, 아가씨들은 추위를 안느끼나 보더군. 나도 일단 따라가니까 벗지 않을 순 없고...... 추웠어. 추웠다고! 아, 물론 바다로 들어가니 전혀 춥지 않았지만. 하하. 나도 결국 물에 가까운 인간이니까. 나올 때가 걱정되겠더군. 어쨌든, 주먹만한 입구가 있는 원통형의 발을 하나씩 들고 가서 잠수를 해. 물고기들은 셸키들을 무서워하지 않아서 잡기는 무척 수월했네. 고기잡이래도 그렇게 시간이 오래 걸리지 않았어. 한시간도 걸리지 않았지. 먹을만한 해초와 조개도 넣고 발이 가득 차면 하나 둘 돌아가기 시작하네. 젊은 아가씨들은 남아서 술래잡기 하면서 놀기도 하고. 상상이 되나? 자네가 언젠가 나와 함께 보았던 그 푸른 바다에, 하얗고 아름다운 나신의 셸키 아가씨들이 무리지어 우아하게 유영하는 모습.
셸키들의 피부는 놀라우리만큼 하얗고, 머리카락은 색조가 엷은 금빛이거나 백금빛이야. 눈동자도 바다의 신비로운 푸른색. 녹색. 청록색. 또는 은색. 키가 크고, 군살이 없고, 매끈하게 뻗은 팔 다리. 그런 아가씨들 곁에 있으니 내가 정말 이질적인 인간으로 느껴지더군. 나도 까스띠얀 치고는 꽤 피부가 하얗다고 생각하는데, 눈에 띌 정도로 차이가 났어. 그들과 전혀 다른 까만 머리카락, 까만 눈, 키는 작고(물론 나도 까스띠얀 여자 기준으로는 꽤 큰데!), 이리저리 굴곡이 크니까. 뭔가 혼자 사람 사이에 낀 괴물이나 동물같다는 생각이 들어서 좀 이상한 기분이었어.
미의 기준이라는게 사람마다 지역마다 다 다르긴 하지만 말야. 내가 예쁘다고 자만하면 안될 것 같아. 음. 솔직히 좀 충격. 기가 좀 죽었어. 음. 이해하게. 여자는 생긴 거에 민감하다고. 뭐 그렇다고 자네 아가씨가 미에 심취해서 다른거 등한시하는 성격은 아니잖는가.
살다 보면 생긴 거 가지고 우월감에 좀 젖고 싶을 때도 있고. 패배감 느낄 때도 있고 그런 거지 뭐...... 빈 말 아니라는 거 아니까, 돌아오면 자네 아가씨에게 예쁘다고 해주게나. 상심한 마음을 달래줄 수 있는 건 자네 뿐이지 않나.

셸키 이야기를 하다가 이상한데로 빠졌군. 고기잡이를 마치고, 좀 놀다가 물 밖으로 나오니 정말 춥더군!! 미친 듯이 추웠어! 덜덜덜 떨면서 돌아가서 이불 도롱이 하고 난로 앞에 있었어. 따듯해 지라고 버터와 생강을 넣은 차를 대접하더군. 색다른 맛이었어. 금세 몸이 따듯해 지던 걸. 잡아온 생선과 해산물로 아침을 먹고, 좀 쉬어두는 게 좋을 듯 해서 몸을 뉘었네. 근데 이상하게 잠을 설쳐서, 한 시간 마다 깨더니 결국 세 시간을 채 못채우고 일어나버렸어. 음. 그 뒤로 잠이 잘 안오더군.
정오가 지나 점심까지 대접받고, 브란디양의 안내를 받아 보고싶었던 하이랜드 섬 최북부로 가보았네. 아주 멋진 절벽 같은걸 기대했는데, 해변가더군. 파도가 거칠었어. 모래는 알이 굵고 유난히 까슬하더군. 돌이 섞여있어서 탁한 노란색이었어. 이 너머에 무엇이 있는지 궁금해서 떠난 사람들이 많다고 하더군. 하지만 돌아온 사람은 없다고 했어. 사람의 발길이 닿을 수 없는 바다만이, 오로지 바다만이 하늘을 향해 뻗어있을 뿐이었네.
문득 바라보고 있자니, 그럴 만 하다는 생각이 들었어. 나도 어쩐지, 저 바다를 건너가면 하늘로 빠져들 수 있을 것 같다고 생각했어. 돌아오지 않은 사람들은 어딘가 하늘에서 유유자적 살고 있는 건 아닐까. 웃기는 생각이지만, 그렇게 믿으려고 해. 바다를 바라보던 브란디양이 노래를 하더군. 역시나 구슬픈 노래였어. 노래가 울려퍼지는 동안 파도가 약간 온화해 진 것 같았는데, 착각이었을까. 깊고 푸른 청회색의 바다, 눈 내리는 겨울에 왔으면 좋겠어. 그 땐 자네도 함께이길 바라지.
브란디 양은 마차를 탈 수 있는 곳 까지 배웅해줬네. 환대에 감사하자, 오히려 날 더러 고맙다고 하고 안아주더군. 언제든 놀러오라고 했어. 남편이 못살게 굴면 자기네들한테 오면 기꺼이 일원으로 받아주겠다던데? 하하. 자네 잘 해야겠어. 짐 싸서 도망칠 곳이 생겼으니 말야. 서운하게 하면 바로 튀어버리지.

커크월에 돌아오니 이미 어둑해져 있더군. 또 비가 왔었나봐. 땅이 젖어있었어. 자네 줄 위스키와 셸키 마을에서 잡은 연어랑, 홍차랑, 퀼트를 마련했네. 어서 돌아와.



난 지금 잠이 부족해. 당신 오는거 맞아주고 자고 싶어...... 당신한테 잘 돌아왔다고, 잘 다녀왔다고 인사 나누고...... 당신 품에서 어리광 피우고, 키스하고싶어. 기분이 좋아...... 피곤한데 자고 싶지가 않아.
이마에, 볼에, 코에, 턱에, 입술에 키스해줬으면 해. 목덜미에 얼굴을 묻고 마음껏 내 향내를 가져갔음 해. 난 당신의 피부에 몸 곳곳을 비벼서, 살짝 까슬하고 따듯한 감촉에 행복해 할거야. 손바닥으로 당신의 금빛 갈기를 몇 번이고 쓰다듬을래. 당신 눈꼬리를 혀끝로 간질이면, 아마도 살며시 웃는다면, 내가 보고 싶은 당신의 얼굴이야. 침대 시트의 서늘함을 걱정하진 않을래. 금세 따듯해 질테니까!
셸키의 노래를 속삭여서 당신을 애태우고 싶어. 그치만 걱정마, 내 발 뒷꿈치에서 파도 소리가 들리진 않을테니까. 내 파도 소리는 당신과 내가 맞닿았을 때 나는 고동소리니까. 아아- 보고싶다아. 사랑해, 사랑해애애애애- 리카르도 사랑해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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