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DF] 일발 (一發) └- 불새, 불꽃의 연인

'독재자'라는 컨셉으로 쓴, 엔리케와 모이세스, 그리고 '그'(리카르도)에 대한 짧은 소고. 작중에 하인리히와 모세는 엔리케와 모이세스의 독일식 표기법이에요. 일반 단편 느낌으로 쓰고 싶었는데, 생각보다 풀어내기가 어려워서 불새 캠페인의 루트 B의 분기같은 느낌의 진행이 되버렸지요. 패러디 정도가 되었습니다. 굉장히 오래 붙들고 있었지만 너무 생각이 많아져서 역으로 그리 좋은 글은 되지 못한 것 같습니다. 수정의 여지가 있어서 좀 더 고민해 볼 생각입니다.

캠페인의 소설화에 있어, PC들의 이야기는 지나치게 복잡하고 인과관계가 깔끔하지 못한 성격을 띄기 때문에 소설화 하기가 무척 힘든 반면, 개개인에게 얽힌 NPC 자체는 '필요한 만큼'의 지분을 가지고 그 이상으로 잘 발전되기 어렵기 때문에 오히려 소설화 하기에는 편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물론 PC들도 다른 PC들과의 관계를 최소로 정리하고 최적의 맥만 짚어낸다면 어느정도 소화할 수는 있겠지만요.

아무튼, '엔리케'의 원형입니다. 현재 불새의 엔리케와는 좀 다릅니다. 이쪽이 더 원색적이지요. 실지로 '엔리케'에게 부여하고 기대했던 점은 하인리히가 맞습니다. 하인리히와 모세의 형제 싸움을 조장하고 마무리를 짓는다는 라인 자체도 불새 시나리오 노선을 논의하면서 나왔던 안입니다.

즐겁게 읽어주세요~

* * * * *



피가 흘러내렸다. 제법 큰 부상이었다. 아직 죽지 않았다. 씩씩, 거친 숨을 몰아 쉬며 하인리히는 바닥에 쓰러진 형체를 날카롭게 일별했다. 개구리처럼 엎드려 침묵한 형체의 무거운 몸뚱이 아래로 검고 붉은 피가 흥건하게 고여 있었다. 두 번 발로 걷어찬다. 아무런 미동도 없다. 정말로 죽었음을 확인한 후에야 시체에서 뒷걸음질쳤다. 차가운 대리석 기둥에 등을 기대고 코트 안주머니에 손을 집어넣었다. 마리화나를 말아둔 갑을 꺼낸다. 한가치 떨리는 손으로 집어 입에 가져갔다. 입술이 파래져 덜덜 떨렸다. 성냥을 긋는다. 칙, 칙. 손에 힘이 들어가지 않았다. 욕지기가 밀려왔다. 여덟 번째 간신히 지펴진 불을 붙였다. 성냥을 바닥에 던진다. 거칠게 샌 숨으로 들이키고, 드센 기침과 함께 연기를 내뱉는다. 바깥에서 비가 건물을 강타하고 있었다. 밖으로 나간다면 비에 관통당해 죽을 것이라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의 폭우였다. 현기증을 느끼며 바닥에 주저앉았다. 한차례 칼에 찔린 가슴에 손을 댔다. 셔츠는 이미 붉게 젖어 피부에 들러붙었다. 건드리는 것만으로도 자지러질 만큼 아팠고, 몸을 비틀 때마다 숨이 턱턱 차올랐다.
천장을 바라본다. 어둠에 반쯤 삼켜진 천장화를 눈 끝으로 훑었다. 세상에서 가장 신성한 목자의 삶과 죽음과 하늘에 계신 유일한 신께 바치는 그림이었다. 번개가 쳤다. 일순 어둠이 가신 목자의 얼굴과 대면했다. 하인리히를 향한 시선은 번개의 빛처럼 하얗고 그 그림자처럼 푸르렀다. 섬뜩한 냉기를 느꼈다. 네 죄가 어찌 그리 깊더냐, 물으시니, 하인리히는 비틀린 웃음을 띠었다. 고통이 점점 사라지고 감각이 둔해졌다. 그 와중에도 비의 굉음에 섞인 요동만큼은 똑똑히 들렸다. 무뎌지면 무뎌질수록 더 생생하게 들렸다. 거대한 덩어리 같았던 요동은 점차 알알이 분해되었고, 그것은 온몸으로 부르짖는 사람들의 목소리였다. 하인리히는 눈을 감고 고개를 숙였다. 한기가 몰려왔다. 코트 자락을 강하게 여미고 무릎에 얼굴을 묻었다.

“초라한 행색이지 않으냐.”

목소리에 고개를 들었다. 시체라고 생각했던 형체가 몸을 움직였다. 천천히 팔을 풀고 다리를 들어 바닥을 지지했다. 얼굴과 몸은 피에 절어 혐오스럽기 이를 데 없었다. 차갑게 식은 눈으로 노려본다. 남자는 척척 아무렇지도 않게 걸어, 하인리히를 스쳐지나 저편의 십자가 앞에 무릎을 꿇었다. 성호를 긋고 기도를 올린다. 동생의 죄를 사하소서, 아멘.
하인리히는 미간을 찌푸렸다. 모세의 형체가 흐릿하게 보인다 싶더니 곧 지금의 모세가 아닌 모습이 되었다. 모세는 몸을 일으키고 하인리히를 돌아보았다. 정확히는 하인리히가 아닌, 하인리히 앞에 나타난 어린 아이를 보고 있었다.

- 하인리히? 난 모세라고 한다. 오늘부터 네 형이다. 형님이라고 부르렴.

다정하게 인사를 건네고 있었지만, 눈은 웃고 있지 않았다. 그는 재미난 물건을 본 것 같은 시선으로 하인리히를 바라보았다. 하인리히는 그런 모세를 무서운 괴물 같다고 여겼다. 20년도 전의 일이었다. 친모와 떨어져 처음 가문으로 들어왔을 때의 기억이다. 이후 형제의 틈은 단 한 번도 좁혀지지 않았다. 가문의 단 하나뿐인 적자(嫡子)로 군인 가계의 맥을 잇는 정통성 있는 후계자, 모세. 그와 10년 뒤져 있는 하인리히는 그저 밖에서 낳아온 서자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무관심과 폭력은 존재가 사멸될 것 같은 위기감을 주었다. 하인리히는 주위의 모든 것에 환멸을 느꼈다. 아버지, 정실, 모세, 가문, 돈, 권력, 치가 떨리는 생태의 부르주아들. 하인리히는 자신에게 닥친 불행이 단지 불행이 아님을 알고 있었다. 하인리히의 태생과 삶부터가 이미 사회 부조리의 반증이었다.
형제의 환영이 증발하고 다시 지금의 모세와 마주했다. 그때나 지금이나 모세가 하인리히를 바라보는 시선은 변함이 없다. 인간이라는 개체로 보지 않는다. 허탈한 웃음 속에 울분이 뒤섞였다.

“역시 괴물이군요, 형님은.”
“그럴지도 모르지.”
“당신은 절대로 해선 안될 짓을 했어요. 모든 것을 가진 당신이 제 것을 뺐다니요. 죽어도 마땅합니다.”
“그가 그렇게나 중요한가?”

아무렴요. 중요하고 말고요. 이죽대며 대꾸한다. 기억 너머의 형체를 끄집어냈다. 눈을 감았다. 눈꺼풀 안쪽의 어둠 속에서도 명확히 빛나는 형체를 직조해낸다.
시건방지다고 생각했다. 발칙하다고 생각했다. 처음 ‘그’를 보았을 때 그렇게 생각했다. 이제 이십 대에 접어든 금발의 청년은 어떤 압제에도 굴하지 않는 기개가 있었다. 성마르고 날카롭게 벼려진 칼 같았다. 표독스럽게 튀어나오는 말, 손끝에서 빚어지는 냉철한 분석의 언어는 푸르게 타는 불꽃 같았다. 본능적으로 깨달을 수 있었다. 그는 이 세상에 필요한 인간이었다. 그는 가압적인 왕정을 비판하고, 그릇된 자본주의를 비판하고, 부르주아지를 비판하고, 세포 한 톨마저 놓치지 않도록 인간을 비판했다. 프롤레타리아를 옹호했다. 하인리히의 예상대로 세상 사람들은 금세 그를 원하게 되었다. 그가 원하든 원하지 않든 걷잡을 수 없이 영향력이 생긴 청년은 현세에 강림한 메시아요, 세상에서 가장 신성한 목자였다.

“그는 정점에 설 자입니다. 먹이사슬의 꼭대기에서 모든 것을 호령할 남자죠. 그릇된 세계를 부수고 고난과 고통에 허덕이는 사람들을 해방해, 그 이름을 역사에 새기고 어떤 추락도 어떤 후퇴도 없이 잿더미가 될 사람입니다. 그가 그렇게 할 수 없다면 제가 기어이 그렇게 만들 겁니다.”
“미친놈.”

모세가 킬킬 웃으며 하인리히의 앞에 다가왔다. 주저앉아 시선을 맞춘다. 피투성이의 손으로 하인리히의 볼을 다정하게 쓰다듬었다. 끈적거리는 감각에 미간을 찌푸렸다. 모세는 곧 하인리히의 주머니에서 마리화나 갑을 꺼냈다. 한가치 빼물었다. 불은 피우지 않았다. 끝부터 질겅질겅 씹기 시작했다.
왕정은 무너졌다. 그는 시민의 가장 선두에 서서 왕을 끌어내렸다. 군중이 그의 이름을 드높였다. 거리에는 온통 그의 이름뿐이었다. 공화정이 시작되고 의회 정치가 도입되며, 그는 시민의 압도적인 지지를 받아 수상이 되었다. 당연한 절차였다. 하인리히는 그가 그 자리에 오르기까지 물심양면으로 도왔다. 남은 것은 그가 원하는 대로, 부르주아지를 소탕하고 진정한 의미의 프롤레타리아의 국가를 세우는 일뿐이었다. 승리의 붉은 깃발을 세우는 것이야말로 그의 투쟁의 이유이자 삶의 목적이었다.

“형님이 훼방만 놓지 않았다면 완벽했을 겁니다.”
“내 탓이라고 말하는 거냐?”
“그렇지 않습니까?”
“그의 인간적으로 소중한 가치를 뺏고, 파괴하면서 영웅이 되도록 못박아버린 네가 할 소리가 아니구나.”
“그는 마음이 여린 사람이죠. 마땅히 할 일을 했을 뿐입니다.”

인간인 이상 모든 부분에서 완전할 수는 없었다. 하인리히는 그가 나약해지는 것을 용납하지 않았다. 그가 사랑하는 사람을 만들고, 소중한 동료를 만드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다. 빼앗고, 없애버리고, 절망에 몸부림치는 그를 추동하고, 종국에는 모든 것을 비우게 했다. 오로지 그가 살아야 할 혁명이라는 단 하나의 목표만을 위해서. 누구에게도 종속되지 않는 깨끗한 존재로 남아 혁명을 달성하는 최후의 순간 죽을 수 있도록. 하인리히 자신의 손으로 죽일 계획이었다. 혹여 그전에 죽더라도 비참하게 죽게 하지 않기 위해 더욱더 철저하고 가혹하게 버리라 강요했다.
모세는 마치 괴물을 보는 양 하인리히를 보았다. 20년 전 하인리히의 시선과 똑같이.

“왜?”
“왜라뇨? 모든 사람이 그것을 바랍니다. 십자가에 못 박혀 죽을 목자를 원합니다. 아름다운 순교자를 바라지요. 목자의 신성은 그의 죽음으로 완전해 집니다. 그는 하늘에서 내려온 사람입니다. 흔들릴 때는 바로 잡아 주면 됩니다. 그렇게만 하면 그는 이 땅에 부조리한 것을 모두 치워버리고 유토피아를 가져옵니다.”
“갸륵할 만큼 필사적이구나. 불쌍한 녀석.”

동정과 연민이 가득한 말이었다.

- 당신 정말로 불쌍한 사람이군요.

모세의 말과 기억 저편에 한 여자의 목소리가 겹쳤다. 불쌍하다고? 내가? 무엇이? 하인리히는 의아해했다. 분명히, 그가 사랑한 여자가 마지막에 그런 이야기를 했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그의 아이를 배고 있던 여자는 그를 인간으로 돌려놓는 가장 위험한 방해물이었다. 모든 혁명가는 가족을 저버리고 배신한다. 그라고 예외일 수 없었다. 스스로 놓아버리도록 이간했다.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았다. 그는 결국 여자를 손에서 놓았고, 여자는 그를 떠나갔다. 하인리히에게는 잘 된 일이었다.

- 도대체 내게 왜 그러는 건데.

그는 하인리히를 향해 울며 말했다. 하인리히의 옷자락을 잡고 늘어지며 자신에게 가해진 무자비한 폭력에 대해 절규했다. 흔들리고 있었다.

- 왜냐고? 당신은 그 자리에 있음이 마땅한 인간이니까. 당신은 그 자리에 있어야만 하는 자이니까. 당신이 해야 할 일을 하세요. 당신의 이름을 부르짖는 저 사람들을 기만하지 마십시오. 모든 걸 버리고 일어나세요. 지금에야 비로소 당신은 진정한 혁명을 이뤄낼 수 있습니다.

실지로 이후, 그는 모든 사사로운 감정을 버린 듯이 오로지 혁명에만 몰두했다. 바로 선 것이다. 무엇이 불쌍하단 말인가, 이토록 잘 진행되고 있지 않았나. 물론 모세의 개입은 예측하지 못한 부분이었지만, 하인리히는 그들이 말하는 불쌍하다는 말의 의미를 전혀 이해할 수 없었다.
모세는 짓이겨진 마리화나를 뱉어내고 스테인드글라스 장식의 창문으로 걸어갔다. 창문을 열자 비가 쏟아져 들어왔다. 빗물이 모세의 얼굴과 몸을 적시며 피를 씻어냈다. 혼탁한 핏물이 바닥에 후두두 떨어진다.

“그렇게 그를 죽이고서는? 어쩔 생각이었지? 그의 유지를 이어 네가 그 자리를 이어받기라도 할 생각이었느냐?”
“아뇨. 그런 일은 하지 않습니다. 물론 측근으로서 그의 뒤를 잇겠지만, 그가 바라는 세계는 유지할 수 없습니다.”
“어째서?”
“당연하게도. 그가 만들고자 한 세상은, 세계는 오로지 그가 존재하기에 가능한 것입니다. 그의 유지를 다른 누가 이어받는다 한 들 예정된 파멸이 찾아올 뿐입니다. 그가 죽으면 그의 신념과 사상과 유토피아 역시 사라짐이 마땅합니다.”

혁명이 성공한다. 그는 죽는다. 하인리히는 그의 뒤를 잇는다. 그리고 그가 이룩한 모든 것을 파괴하고 무위로 돌린다. 그의 지위와 마찬가지로 그의 이상은 그렇게 사라지며 불멸이 되는 것이다. 설령 이후 누군가가 그의 이상을 이어 일어나더라도 그의 완전함을 끌어내릴 수는 없다. 모든 인간의 이상에는 추악한 결말이 기다릴 뿐이니까!
하인리히는 가혹한 권력을 행사할 생각이었다. 아주 가혹하게, 그와 분리되는 명확한 대비로 파괴를 선택한다. 상상만으로도 소름이 돋았다. 피식 피식 웃음이 새어 나왔다. 그러나 웃음은 사라지고 얼음장같이 차가운 가면이 남았다. 모세가 넌지시 말했다.

“그걸 내가 망쳤군.”
“네.”

모세는 승진에 승진을 거듭해 해군 총사령관이 되었다. 그에게 반대하는 부르주아지를 이끄는 자가 되었다. 골치 아픈 적이 된 것이다. 그러나 혁명을 멈출 수는 없었다. 피를 보는 싸움이 될지라도 승리해야만 했다. 거사 준비는 차근차근 진행되었다. 하인리히 그 자신이 지휘하고 감독하여 샐 틈 없이 치밀하게, 완벽하게 준비해 나갔다. 여기까지는 말할 것도 없이 좋았다. 그런데.
거사를 고작 사흘 앞둔 날 혁명의 정보가 모세에게 샜다. 정보를 제공한 장본인은, 그였다.
혁명의 주체이자 중심인 그가 모든 것을 배신하고 모세에게 투항한 것이다. 거사와 혁명군에 대한 정보를 팔아넘기고 그 자신은 모세의 군에 몸을 의탁했다. 이 무슨 일이란 말인가? 하인리히는 자신의 눈과 귀를 의심했다. 전혀 뜻밖의 상황이었다. 있어서도 안 되고 있을 가능성도 없는 일이었다. 사태가 명확해지자 온갖 감정이 들이닥쳤다. 박탈, 배신감, 난처, 두려움, 분노, 허탈이 뒤섞여 소용돌이쳤다. 도대체 왜? 무엇 때문에?

“그가 어떻게 행동했고 말 했는지 알려줄까?”
“듣기 싫습니다.”
“무기를 버리고 스스로를 결박해 내 앞에 무릎을 꿇었다. 모든 것에 복수하기 위해서라고 하더구나. 그렇게 고고하고 자존심 강한 사내가 넋을 잃은 얼굴로 기밀을 줄줄 뱉어내는 꼴이 얼마나 우습던지. 사람은 역시 지켜봐야 아는 법이야.”
“듣기 싫다고 했습니다.”
“어떠냐, 네가 그토록 원하고 소망하던 이 마저 내 앞에 굴복하지 않았느냐? 네가 틀렸다는 걸 인정하느냐?”

하인리히는 옷자락을 손가락으로 긁으며 술에 취한 사람처럼 윽박질렀다.

“형님 때문입니다! 당신은 늘 제가 가져야 할 걸 먼저 가지고, 최후에 빼앗아 가죠. 당신이란 존재가 있는 한 영원히 저는 굶주려 있을 겁니다! 당신이 없었다면 그도 그런 선택을 하지 않았을 테지! 형님이 없었다면 가문의 적자는 나였을 겁니다. 형님이 없었다면 모든 사랑은 내게 돌아왔을 겁니다. 형님이 없었다면 목숨의 위험도, 공허도, 폭력도 없었을 겁니다. 당신 때문입니다. 당신 때문입니다!”

모세가 천천히 돌아본다. 피가 씻겨나간 얼굴의 이마에는 총탄이 박힌 자국이 있었다. 피는 그곳에서 계속 흘러내렸다. 모세의 눈은 모든 것을 다 꿰뚫는 측은함을 비쳤다.

“그랬을까. 결국, 너는 네가 가질 수 없는 걸 죽이고 부수려 들 뿐이지 않으냐. 아버지도, 어머니도, 나도, 가문도, 그도, 그의 이상도.”
“닥치세요.”
“왜 아니라고 말 하지 못하느냐? 불멸이라고? 아주 그럴싸한 말이지. 너는 날 질투하고, 그를 시기하고 있을 뿐이지 않느냐? 가질 수 없으니 파괴해 버리고, 승리를 말하기 위함이 아니더냐?”

하인리히가 노성을 지르며 모세에게 달려들었다. 창가에 몸을 부딪치고 나뒹굴었다. 대자로 뻗었다. 가슴에 통증이 내달렸다. 마른기침을 토해내고 머리를 움직여 보았다. 모세는 피 웅덩이 위에 개구리처럼 납작하게 쓰러져 있었다. 시체였다. 죽은 것이 확실했다. 우스운 꼴이었다. 크게 소리 내 웃었다.
두 손을 들어 허공을 그러쥐었다. 아직도 촉감이 생생했다. 가장 처음으로 스스로 죽인 사람, 아버지의 목을 졸랐을 때가 떠올랐다. 아버지로서 의무만을 수행했을 뿐 한 번도 자식으로 대해준 적 없는 사람이었다. 늙고 허약해진 몸뚱이에서 생명을 빼앗는 일은 얼마나 손쉬웠나. 다음으로 죽인 것은 모세의 어머니였던 정실이었다. 질투로 눈이 먼 그녀는 하인리히의 어머니를 죽음으로 몰고 갔고, 어린 하인리히를 학대했다. 그래서 죽였다. 엉킨 매듭을 풀 수 없다면 잘라버리면 된다. 응당한 복수였다.

- 네가 죽였느냐?
- 네.

비가 내리는 장례식 날, 두 형제가 마주했다. 하인리히는 그가 화를 내기를 바랐지만 모세는 얼굴을 찡그리며 웃었을 뿐 도발에 움직이지 않았다.
무엇을 어떻게 하든, 하인리히가 가문에서 어떤 식으로 열심히 하든 모세를 이겨낼 수는 없었다. 부모의 사랑도 가문의 이름도 하인리히의 것이 아니었다. 하인리히는 아무것도 인정받지 못했다. 모세가 부러웠다. 그의 모든 것을 가지고 싶었다. 가질 수 없다면, 하다못해 끌어내리고 죽이고 싶었다. 어차피 돌아오지 않을 것이라면 없애버리고 싶었다. 몇 번이나 죽이려 시도했지만 번번이 실패했다. 그것이 모세와 하인리히의 절대 줄어들지 않는 차이 같았다. 좌절은 깊어졌다.
환멸의 대상을 모두 파묻어 버리기 위해 혁명에 투신했다. 그를 만났다. 하인리히와 전혀 다르게 순수한 그는 하인리히의 동경 그 자체였다. 아름답게 불타오르는 삶이 부러웠다. 그렇게 모두가 바라고 욕망하는 대상이 될 수 있는 사람 옆에서 지독한 패배감을 느꼈다. 그래서 뭐가 어떻단 말인가? 모든 투쟁은 정당했다. 정당하다. 정당하리라.
형제는 교회에서 만났다. 하인리히는 죽이려 들었다. 모세 역시 죽이려 했다. 서로의 심장에 칼과 총을 겨누고 싸웠다. 모세의 칼이 하인리히의 가슴을 꿰뚫어 기흉을 남겼다. 하인리히는 고통에 몸부림쳤다. 모세가 승리를 확신하고 아주 잠시 정신을 놓지 않았다면 납작하게 죽어 있을 것은 하인리히였을 것이다. 죽을 각오로 쏜 마지막 총탄이 모세의 이마에 박혔다. 한차례 꿈 같은 길고도 짧은 순간에 벌어진 일이었다. 하인리히로도 모든 것을 건 싸움이었다.

- 하인리히, 왜 그렇게 괴로워하고 있니.
- 당신 그렇게 괴로워하면서.

양쪽 귀에서 각기 다른 여자의 목소리가 들렸다. 하나는 하인리히의 어머니가 죽기 전 남긴 말이었고 또 하나는 그가 사랑한 여자가 한 말이었다. 여자들의 언어는 이해할 수 없다. 논리적인 이유가 없으면서 거슬리기 짝이 없는 말을 한다. 괴로운가? 숨을 쉬기 어렵고 상처가 아파서 괴로우냐면, 그렇다. 그밖에 무엇이 괴롭단 말인가. 정당한 투쟁, 마땅한 욕망, 쟁취, 찬탈. 그 모든 것이 하인리히가 살아가는 삶의 증거였다.

“나는 이렇게 살아 있는데, 무엇이 괴로운가. 나는 살아남을 것이다.”

주문을 걸듯이 중얼거렸다. 해야 할 일이 남아 있었다. 늦기 전에 움직여야 했는데 몸이 따라주지 않았다. 숨이 가빠졌다. 점차 숨쉬기가 힘들어진다. 피를 한번 토하고 몸을 일으켰다. 시민의 요동 소리가 점점 다가오고 있었다.

“다가오고 있다.”

다시, 모세가 일어섰다. 도대체 죽은 것이 맞는지 헷갈렸다. 무슨 조화인지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 고통스러웠다. 떨리는 손으로 마리화나를 한가치 더 물었다. 아무리 성냥을 그어도 불이 붙여지지 않았다.

“도와줄까?”
“필요 없습니다.”

성냥을 힘없이 던져버렸다. 모세의 발치로 미끄러져 간다. 모세가 성냥을 주워들고, 무척 손쉽게 불을 피웠다. 하인리히의 마리화나에 불을 지펴 주었다. 말 만큼 몸이 따라주지 않아 저항조차 할 수 없었다. 욕이 튀어나왔다. 정말 괴물이군, 빌어먹을.

“혁명가란 놈들은 말이야, 저 멍청한 시민을 하나의 인간으로 보지 않아.”
“그러면?”
“두드려 패서 가르치고 일깨워야 할 짐승들로 보지. 그렇지 않으냐? 너는 저들을 제대로 된 인간으로 본 적이 있느냐?”
“글쎄요. 그렇게 물으신다면 아니라고 답해야겠지요. 시민이 멍청한 것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입니다. 조금만 신경을 돌리면 제멋대로 폭주하죠. 눈앞의 일에만 급급하고 자기 자신밖에 모르고, 강한 자 앞에서는 스스로 일어설 줄도 모르는 이들입니다. 그런 인간들이라도 있어야 세상을 뒤집을 수 있다는 건 아이러니한 일이죠.”

하인리히는 시민에게도 환멸감을 느꼈다. 그들은 자신들을 대변해 줄 영웅을 자연스럽게 따른다. 바보 천치 같은 시민을 영리하고 영악한 자가 주무르고 일으켜 세울 때야 말로 무서운 군중이 된다. 왕정을 부숴줄 영웅을 바랐고 그가 나타났다. 가진 자들을 미워하는 군중의 바람을 들어주기 위해 그가 일어났다. 스스로 가치를 증명하기는커녕 그를 통해 존재를 인정받으려고 한다. 그는 시민의 욕망의 대상이었다. 무작정 신을 따르며 구원을 바라는 신도들처럼, 누구보다도 그가 신처럼 군림해주기 바라는 것은 시민이었다. 덜 떨어진 짐승들. 그렇기에 수백 년간 왕정의 지배에 허덕였고 자본이라는 악마에 휘둘리며, 부르주아들에게 착취당한다. 자신들을 인간이 아닌 지배당하는 것이 마땅한 짐승으로 격하시킨 건 누구보다도 시민 그 자신들이었다. 지금도 마찬가지다. 무엇이 다르단 말인가?

“저는 그들과 다릅니다. 저 또한 그를 욕망하지만, 저는 욕망에 지배당하고 패배하지 않습니다. 자신의 욕망을 이겨내지 못하고 그에게 굴복한 저 어리석은 시민과는 다릅니다. 제 욕망과 투쟁은 정직합니다. 저는 제 갈망과 욕망을 이겨 넘어 보일 겁니다. 그를 죽여서 반드시 거머쥘 것입니다.”
“죽일 생각이냐? 그가 배신했는데도?”
“물론. 그가 배신했다는 사실은 최측근 외에는 아무도 모릅니다. 더 늦기 전에 죽입니다. 그가 타락하고 더럽혀진 무언가가 되기 전에.”

그렇다. 이런 데서 시간 낭비할 틈은 없었다. 일어선다. 고통을 눌러 참았다. 숨을 몰아 쉰다. 뱃속부터 끓어오르는 격정을 소리로 내질렀다. 짐승의 포효였다. 하나의 명령이 머리를 하얗게 지배했다. 그를 죽인다. 그를 죽인다. 그를 죽인다. 그를 죽인다. 그를 죽인다. 그를 죽인다. 그를 죽인다. 그를 죽인다. 그를 죽인다. 그를 죽인다. 죽여야 한다. 죽여야만 한다. 죽일 것이다. 죽여라. 이겨라. 승리해라!
하인리히는 피 웅덩이 위로 걸어갔다. 개구리처럼 납작하게 누워있는 시체를 힘주어 밟았다. 움직이지 않는다. 괴물은 없었다. 20년간 계속되어 온 형제의 갈등은 끝났다. 성호를 긋는다. 이 사람의 죄를 사하소서, 아멘. 폭소가 터졌다. 정신 나간 사람처럼 자지러지게 웃었다. 구두 굽이 너덜거릴 정도로 밟고 또 밟았다.
시체의 형체를 알아보기 어려울 즈음 되어서야 노기가 가라앉았다. 말끔하게 정리됐다. 이제 남은 소임은 단 하나뿐이었다. 천장화를 올려다본다. 신성한 목자를 본다. 목자는 여전히 하인리히를 향해 묻고 있었다. 네 죄가 어찌 그리 깊더냐. 팔을 펼치고 목자를 향해 항변한다.

“당신은 당신의 어린 양들을 돌보심이 마땅합니다. 당신이야 말로, 인간으로 나시어 인간을 아우르는 자입니다. 그릇됨 없이 세상을 지배하고 계시지 않습니까. 당신이 안고 계시는 양들이야말로 인간이지 않습니까. 당신에게 인류는 짐승에 불과하지 않습니까. 어리석고 악한 짐승들을 기꺼이 계도하시지 않으셨습니까. 당신은 무질서한 세상을 신의 뜻으로 파괴하려 하였고, 짐승들의 왕이 되셨지 않으셨습니까. 당신은 십자가에 매달려 죽었고, 세상은 당신의 뜻과 정 반대로 미쳐 돌아가지 않습니까, 그렇기에 당신의 이름은 더 신성한 것이지 않습니까. 당신의 존재가 절대적인 것은 그 때문이지 않습니까! 당신은 홀로 완전하며 아름답습니다! 그렇기에 저는 당신을 죽일 것입니다. 당신의 재래를 맞아들이고, 당신을 팔아 치운 열세 번째의 제자가 될 것입니다! 당신을 기만하는 짐승들이 당신을 사악한 위정자로 만들기 전에, 그전에 내가 당신을 죽일 것입니다!”

목자의 모습이 그의 모습으로 변했다. 총을 겨누고 몇 발씩 쏘아댔다. 탕, 탕, 탕. 철커덕. 총알이 모두 떨어졌다. 버리고 모세의 시체를 뒤집어 품을 뒤지기 시작했다. 빗소리가 시끄러웠다. 차오르는 숨소리가 시끄러웠다. 손을 피로 치덕 물들이고 딱딱하게 잡히는 총을 꺼내 들었다. 씩 웃고서 탄창을 확인한다. 한발이 남아 있었다. 충분하다. 그의 머리에 총구를 들이밀고, 쏴 죽이는 데에는 단 한발이면 충분했다. 크게 심호흡한다. 눈을 감고, 깊이 의식을 가라앉히고, 눈을 뜬다.
하얀 번개가 번쩍였다. 세상이 온통 하얗게 물들었다. 빛은 오래도록 남아있었다. 눈이 부셔 다시 눈을 감았다. 소리가 사라졌다. 그토록 시끄럽던 빗소리, 군중의 소리가 정적에 잠기고 황홀한 음악 소리가 들렸다. 습한 푸른 풀 냄새와 말간 하늘 냄새, 오렌지 향을 닮은 태양의 냄새가 향기로웠다. 선선한 바람이 불어 피부에 와 닿았다. 눈꺼풀이 간질거렸다. 눈을 뜨고 고개를 들었다. 눈앞에 놀랍게도 목자가 하인리히의 일곱 걸음 앞에 서 있었다. 하얗고 푸른 의복을 느슨하게 걸치고 그가 돌보는 하얀 짐승들 사이에 말 그대로 강림했다. 자애롭고 성스럽고 아름답다. 그의 뒤로 낙원이 있었다. 짧은 풀이 사박대는 들판과 어디까지고 뻗어 있을 하늘이 있었다. 하인리히는 어린아이처럼 해맑게 웃었다. 목자가 하인리히를 애틋하게 바라보고, 손을 뻗었다.

- 너 여기에 있었느냐. 찾았단다.

하인리히는 무의식적으로 내민 손을 잡으려 팔을 들었다. 손에 차가운 금속이 쥐이어져 있음을 깨닫자 정신이 들었다. 총구를 겨눈다.

“죽으러 오셨습니까?”

목자는 고개를 저었다.

- 가엽게도. 이제 괴로움은 끝난단다. 내려놓거라. 내가 너를 구원하리라.

목자의 말은 거역할 수 없는 힘이 있었다. 하인리히의 팔은 하인리히의 의지를 거부하고 내려갔다. 손에서 힘이 풀렸다. 총이 바닥에 떨어졌다. 목자는 천천히 일곱 걸음을 걸어와서 하인리히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신비로운 감각이었다. 고통과 괴로움이 멎었다. 순식간에 사라져 버렸다. 목자의 얼굴이 희미해졌다. 세상의 빛이 너무도 환했다. 감당할 수 없는 질량이 들이닥쳤다. 하인리히는 이제껏 겪어보지 못한 평화를 만끽했다. 육체의 고통뿐 아니라 가슴속에 응어리져 있었던 무게가 영영 사라졌다. 하인리히는 그제야 어머니와 여자가 말했던 ‘괴로움’이 무엇인지 알았다. 깨닫자마자 사라져 버렸다. 이 얼마나 경외의 순간이란 말인가?

- 세상에서 가장 가여운 나의 아들아. 잠에 들 거라. 편히 쉬어라.

빗소리가 들렸다. 세상은 어두웠다. 목자의 음성은 그의 음성이 되었다. 하인리히는 자신에게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알지 못했다. 세상이 기울어졌다. 차가운 대리석 바닥이 볼에 닿아 있었다. 피가 콧잔등을 타고 흘러내렸다. 몸을 움직일 수 없었다. 간신히 눈동자만 굴렸다. 금발의 그는 애처롭게 하인리히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의 손에 화약 연기를 뿜는 총이 있었다. 하인리히는 웃었다.

- 세상에서 가장 성스럽고 아름다운 목자여. 홀로 완전한 자여, 절대의 존재여, 나의 신이여. 내가 당신을 기필코……

그는 숨이 끊어진 하인리히의 얼굴을 쓰다듬었다. 더없이 행복해 보였다. 하인리히와 모세를 모두 제거하기 위한 그의 계획은 매우 성공적이었다. 하인리히가 떨어뜨린 총을 주웠다. 그리고 모세의 목에 칼을 박아 넣고 잘랐다. 머리채를 든 채로 교회 밖으로 걸어나갔다. 교회 앞에 시민이 모여 있었다. 그들에게 살해의 증거를 들어 보였다. 광기에 젖은 환호가 치솟았다. 측근들이 그를 맞았다. 그는 아무 일 없었던 것처럼 시민을 향해 호령했다. 누구도 하인리히의 죽음에 대해 말하지 않았다. 그렇게 죽어야 함이 당연했으므로.
그는 허공을 향해 한 발의 총을 쏘았다. 혁명의 효시였다. 머지않은 훗날 그의 목숨을 앗아가는 것 또한, 한 발의 총이었다. 독재의 끝이었다.

- EN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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