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장. 으스러진 세계 - Lv. 1 └- [DQ] 천공의 레프리제

어느 마을이건 생기가 없었다. 그랑바니아로 향하는 입구인 티조트 산, 그 산을 향하는 여로의 마지막 마을인 넷드 마을도 마찬가지였다. 오랜 시간 태양을 보지 못해 사람들의 인상도, 분위기도 어둡고 암울했다. 유리에와 세이덴이 도착할 무렵엔 빗줄기가 거세어 더욱이 마을에는 인적이 뜸했다. 세이덴은 미리 봐 둔 여관에 마차를 댔다. 여관 안으로 들어서자 주인이 닦을 수건을 건네며 맞아주었다.
유리에는 세이덴이 숙박비를 치르고 주인과 이야기 하는 동안 난로 앞에서 몸을 녹였다.

“이 근처에서 본 얼굴은 아니구나. 너희도 그랑바니아의 사람이니?”
“그런 셈이죠. 난민들은 요즘 어때요?”
“요즘엔 좀 뜸해. 웬만한 생존자들은 진작 라인하트로 건너갔으니까.”

라인하트는 그랑바니아의 오랜 우군이자 동맹이며, 같은 혈통을 잇는 형제의 나라였다.
최초의 연결은 그랑바니아 12대 국왕, 아벨 시대. 아벨 왕 슬하의 쌍둥이 자식 중 오빠인 왕자가 전설에서 말하는 천공의 용자였다. 이들 왕가의 일족은 당시 세계를 지배하려 한 대마왕 밀드라스를 물리치고 세상에 평화를 가져왔다. 그 뒤 동생인 공주는 라인하트의 왕자와 결혼하여 양국의 하나 된 혈통을 이루었다. 그 후손이 현재의 라인하트를 다스렸다.
현 라인하트의 국왕, 레인포드 3세는 그랑바니아가 멸망한 뒤 쫓겨난 난민들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였다. 치안과 여럿 정황을 걱정한 신하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형제의 고통을 외면하면 사악한 마물과 무엇이 다르겠는가”라며 강행했다.

“저희도 그쪽으로 가요. 정기선 소식은 있어요?”
“난민들 발길도 뜸해져선지 요즘엔 한 달에 한 번 정도 오가는 것 같더라. 다만 아랫길로 가면 내일 출발해도 때에 맞추기 어려워.”
“곤란한데. 다른 길은요?”
“산으로 넘어가면 되긴 할 텐데……”

주인은 난처한 표정을 지었다. 옆에서 일을 돕던 직원이 손을 내저으며 만류했다.

“티조트 산길이라면 포기해요. 그랑바니아를 침공한 마물들이 티조트 산촌까지 박살내 버렸어요. 그 산길은 마물들이 가득하다구요. 산등성이 다른 마을의 소식도 끊겼다던데. 지금 그리로 들어가는 건 자살행위에요.”
“맞아. 좀 기다리더라도 다음 정기선을 이용하는 편이 나을 거야.”
“충고 감사합니다.”

세이덴이 유리에를 이끌어 2층으로 올라갔다. 방으로 들어오자마자 유리에의 옷자락 안에 숨어있던 슬라링이 튀어나와 침대 위를 통통 뛰어다녔다. 세이덴이 물었다.

“어쩔래? 무리해서 산을 넘을 필욘 없겠지?”
“천천히 가도 괜찮아. 하지만 놀랐어. 아직도 힘써주고 있구나.”
“뭐가?”
“레인.”
“라인하트의 왕 말인가. 그러고 보니 너희 남매와 친했지.”
“정확히는 오빠가 형처럼 잘 따랐어. 나한테도 잘 대해줬고. 왕자일 시절에는 종종 성에 놀러왔었어. 왕이 된 이후에는 즉위식 때 보고 못 봤지만. 세이덴은 만난 적 없어?”
“딱히.”

세이덴은 건성으로 반응하며 짐을 풀고 정리했다. 유리에도 뒤늦게 도우려고 일어났으나 제지당했다.

“넌 옷이나 갈아입고 쉬어. 이거 정리하면 밥 가져올게.”
“세이덴이 날 모실 필요는 없어.”
“바-보냐. 누가 너 같은 못난이를 모신다고. 아직 몸 안 좋잖아. 다 나으면 부려먹을 거니까 지금은 냅둬.”

퉁명스러운 어투였지만 배려심이 가득했다. 유리에는 더 고집 피우지 않고 순순히 말을 듣기로 했다.
욕실로 들어가 비에 젖은 옷을 벗었다. 작고 깡마른 몸을 거울에 비춰보았다. 가슴께에 손바닥 크기만 한 흉터가 흉물지게 남았다. 유리에의 생명을 거의 앗아갔던 관통상이었다. 눈을 감으면 그 때의 기억이 아직도 생생하게 돌이켜졌다. 방의 테라스, 유모와 시녀를 죽였던 거창을 든 해골 기사. 공포에 질린 유리에는 그 창에 몸을 꿰뚫렸다!
오스스 소름이 돋았다. 어지럼이 몰려와 벽에 몸을 기대고 숨을 골랐다. 그 뒤는 기억이 없었다. 세이덴의 말로는 정원에 천공의 검과 함께 쓰러져 있었다고 했으니, 아마도 테라스에서 떨어졌을 것이다. 다시 눈을 떴을 땐 내달리는 고통에 비명을 지르고 금방 혼절했다. 수도사들이 회복주문을 매일같이 퍼부어도 상처가 아물지 않아 안정될 때 까지 열흘은 걸렸다고 들었다.

“괜찮아. 지나간 일이야.”

가까스로 몸을 통제하고 새 옷으로 갈아입었다. 물기에 늘어진 붉은 머리카락을 손 갈퀴로 넘겨 정리하고, 다시 거울 앞에 서서 매무시를 정돈했다. 보라색 눈동자는 꼭 죽음을 박아 넣은 듯 이질적이었다. 분명 자신이나, 자신 같지 않은 얼굴을 들여다 본 뒤 방으로 돌아왔다. 세이덴은 어느새 자리를 비웠다.
침대에 드러눕자 슬라링이 얼굴 맡에서 몸을 부대꼈다. 부드러운 감촉을 느끼며 눈을 감았다. 방 안의 따듯한 온기에 졸음이 몰려왔다.

*

유리에 공주를 불경하게도 ‘못난이’라 부르는 사람은 세이덴이 유일했다. 그는 유모의 아들로, 유리에 보다 한 살이 더 많았으며 유리스 왕자와 동갑이었다. 자연스레 세 사람은 어릴 적부터 친구로 자랐다. 유리에는 무척 수줍음 많고 낯을 가리는 성격이어서 세이덴이 놀려대도 우물쭈물하기만 할 뿐 이렇다 할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세이덴은 언제나 그 점이 불만이었다.

“그럼 다정하게 대해주면 되잖아?”
“애당초 유리스 네가 너무 오냐오냐하고 받아주니까 나아지질 않잖아.”
“날 핑계 삼긴. 그냥 유리에가 걱정된다고 이야기 하면 될 것을.”
“뭐. 아니거든?”
“어쨌든 안심이야. 나도 유리에가 걱정이니까. 조금 있으면 시집보낼 나이가 될 텐데, 상대가 어디서 굴러다녔을지 모를 무뢰배라면 곤란해. 혹시 내가 유리에를 지키지 못한다면, 네가 지켜줘. 부탁하지.”

세이덴은 그 말을 하던 유리스의 표정이 이상했다고 돌이켰다. 마치 지금의 사태를 예상이라도 한 것 같은 말이었다.
이듬해 그랑바니아가 멸망했다. 세이덴이 심부름으로 성 밖에 잠깐 나갔다 온 사이 참극이 일어났다. 뒤늦게 돌아왔을 땐 처참한 상처를 입고 쓰러진 유리에를 추슬러 데려나올 수밖에 없었다. 가족의 안위, 왕가의 안위 모든 걸 포기하고 도망쳤다.
유리에가 재기하는 반 년 동안 그 옆을 지키며 세이덴도 복잡한 마음을 정리했다. 유모였던 어머니는 유리에의 이야기를 통해 죽었음을 확인했다. 성 밑 마을에 살던 나머지 가족들은 운이 좋으면 살아남았을지도 몰랐다. 라인하트에서 만날 수 있다면 좋을 것이었다. 꽤 빠르게 충격을 털고 일어난 자신과 달리 유리에는 시간이 오래 걸렸다.

“같이 온 애는 동생이니?”

식사를 주문하고 기다리는 동안 주인이 물었다.

“친구예요. 소꿉친구.”
“낯이 무척 창백하더라. 어디 아픈 건 아니야?”
“아팠어요. 지금도 좀 그렇고. 어디 솜씨 좋은 신관 없어요?”
“라인하트로 가서 찾아보는 편이 빠를 거야. 너희 둘 다 아직 성인은 아니어 보이는데 고생이 많구나.”
“실향민이 다 그렇죠, 괜찮아요.”
“어른스럽기도 해라.”

텁텁한 말이었다. 세이덴은 서둘러 절망에서 떨쳐 일어나는 쪽을 선택했다. 눈앞에서 사랑하는 사람들을 모두 잃고, 그 자신도 죽음의 문턱에서 간신히 돌아온 유리에였다. 그 앞에서 허우적 거려봤자 부끄러울 뿐이었다. 주인이 격려했다.

“좋아질 거야. 유리스테아 왕자님이 살아있다고 하니까.”
“예?”

세이덴은 귀를 의심했다. ‘왕자라고?’

“왕자가 살아있다고요?”
“그런 소문이 돌고 있어. 누군가 봤대. 큰 부상을 입고 어딘가 수도원에서 몸을 추스르고 있었나봐. 허긴, 천공의 용자로 선택된 분인데 그렇게 쉽게 돌아가실 리 없지. 조만간 힘을 키워 이 세상을 구해주실 거야.”

어안이 벙벙해진 세이덴이 뭔가 말하려다 관두었다. 어디서 소문이 퍼졌는지 알 수 없었다. 유리에와 세이덴이 기거한 수도원에는 여행자들이 자주 드나들었다. 그들 중 누군가가 눈치를 채고 이야기를 전했을 수도 있었다. 하지만, 어째서 공주가 아니라 왕자란 말인가?

“지금은 그런 이야기라도 들려오니 좀 희망이 생겨. 그렇지 않니?”

의문은 오래지 않았다. 세계를 구원하는 이는 용자였다. 살아남는다면 당연히 <용자>쪽이 마땅했다. 세이덴은 실소를 터트렸다. 살아남은 이는 사실 공주이고, 세계를 구원할 용자는 이미 마물에 의해 갈기갈기 찢겨 사라졌다는 이야기를 하면, 이 사람은 어떻게 반응할지 궁금했다.

“저어엉말 희망적인 이야기네요.”
“그럼, 그럼. 자. 여기 있다. 친구 잘 챙기려무나.”

세이덴의 자조 섞인 대답을 긍정의 의미로 받아들이고 주인은 따듯한 수프와 빵이 담긴 쟁반을 건네주었다. 방으로 돌아오는 걸음이 무거웠다.

‘이걸 녀석에게 말해야 하나?’

소문이 퍼졌다면 어차피 유리에도 알게 될 이야기였다. 욕지거리가 밀려왔다.

“젠장. 왜 녀석한테만……”

방으로 돌아오자 유리에는 잠들어있었다. 식사를 테이블 위에 올려두고 잠든 모습을 바라보았다. 열여섯 살, 막 성인이 되어 한창 어여뻐야 할 공주는 병들고 남루한 차림새로 한 순간에 비참의 나락으로 떨어졌다. “세이덴, 날 라인하트에 데려다 주지 않을래?”라고. 병상에서 창밖만 바라보며 죽은 시체처럼 지내던 유리에가 처음 입을 열어 한 말을 세이덴은 들어주겠노라 했다. 무엇을 생각하는지는 알 수 없어도, 그것으로 유리에의 삶의 심지에 불이 켜졌다면 거절할 이유가 없었다.
천으로 둘둘 감은 천공의 검으로 눈을 돌렸다. 어릴 적 유리스가 한 번 만져보게 해 주었을 때에는 바위처럼 무거워서 들 수가 없었다. 유리에를 탈주시킬 때부터는 평범한 무기와 비슷한 무게가 됐다. 소유주가 죽었기 때문일까? 칼집에서 결코 빠지지 않는 천공의 검은 왜 공주 곁에 남기를 선택했을까? 온통 의혹투성이였다.

“정말로 이유가 있으니까 구했지? 그렇지?”

세이덴이 천공의 검을 향해 복잡한 심경을 토로했다. 슬라링이 그런 세이덴이 이상하단 듯이 소리를 냈다.

“피키-?”
“아, 몰라. 어떻게든 되겠지. 유리에. 일어나서 밥 먹어. 안 먹고 자면 안 돼. 약도 먹어야 하잖아.”

유리에를 흔들어 깨워 억지로 식사를 들게 했다. 주인에게서 들은 이야기를 털어놓고 반응을 살폈다. 눈동자가 잠깐 흔들렸을 뿐, 별다른 말은 없었다. 세이덴은 못내 답답했으나 울화를 꾹꾹 참았다.
누구 하나 공주가 살아 있으리라 생각하지 않는다. 구원자인 용자는 당연히 살아 있으리라 모두가 믿는다. 유리에는 살아있되 살아있지 않았다. 세이덴이 나서서 공주가 살아있다고 말한들 유리에의 입장만 난처해질 뿐이었다.

‘이건 정말 불합리해.’

누구보다 이 상황을 가장 이해하고 있을 유리에였다. 세이덴은 억장이 무너진다는 말을 그 때 처음 이해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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