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장. 으스러진 세계 - Lv. 2 └- [DQ] 천공의 레프리제

아침 일찍 거리로 나간 세이덴은 무기점에서 고르고 골라 가볍고 검신이 날렵한 단검을 한 자루 샀다. 여행 비품을 보충하고 여관으로 돌아가는 길이 싫증났다. 비는 그쳤지만 회색 하늘 덕분에 시종일관 우중충했다. 기분마저 똑같은 색깔로 물들어버린 것 같았다.

“얘, 얘.”

여관 주인이 2층으로 올라가려던 세이덴을 불렀다. 주인의 앞에는 허름한 차림새의 여행자가 서있었다.

“마침 잘 왔어. 이 여행자가 사이네스 항구에서 왔다잖니. 너희에겐 좋지 않은 소식일 수도 있겠구나.”

세이덴이 불안한 눈으로 여행자를 돌아보았다. 초로의 여행자는 사정을 파악하고 혀를 찼다.

“라인하트로 가나보군. 라인하트 쪽에서 공고를 냈다네. 다음 정기선을 끝으로 해당 노선은 휴선 한다고 말이야. 갈만한 사람은 다 넘어갔다 생각했겠지.”
“이런, 정말 안 좋은 소식인데요. 다음 정기선은 언제 도착인데요?”
“열흘 뒤. 아랫길로 가면 빨라도 보름은 걸릴 테니 늦어.”
“그거 외에 라인하트로 갈 만 한 배는 없어요?”

여행자가 고개를 저었다.

“요즘 바다에 강력한 마물들이 창궐하고 있다네. 라인하트야 강대국이니 대응하고 있었지만, 민간 선박은 바다에 뜨지 못한지 오래야. 요즘은 근해까지 마물이 나타나서 고기잡이도 못 나간다더군.”
“난처하게 됐네요.”
“정 급하고 솜씨가 좋다면 티조트 산의 아랫목을 거쳐 서둘러 이동하는 쪽도 고려는 해보게. 산등성이만큼 마물이 극성은 아니라고 한 달 전 그 길을 거쳐 온 상인에게 들은 적 있으니까. 여로만 잘 정하면 마물과 조우는 최소한으로 줄이고 아슬아슬하게 도착할 수 있겠지.”

주인은 그래도 산길은 위험하지 않느냐 염려를 비췄다. 세이덴은 여행자에게서 들을 수 있을 만큼의 정보를 듣고, 그에게 술 한 잔을 산 뒤 방으로 돌아왔다. 창가에 앉아있던 유리에가 맞아주었다.

“어디 다녀왔어?”
“비품 좀 사러. 이건 네 거야.”

세이덴이 단검을 건네주었다. 유리에가 얼떨결에 받아들고 단검과 세이덴을 번갈아보았다.

“최대한 가볍고 튼튼한 걸로 샀어. 검 쓸 줄 알잖아?”
“능숙하진 않아.”
“알아. 그래도 만일에는 무기가 있는 편이 좋으니까. 어차피 저 녀석은 애물단지고.”
“천공의 검을 애물단지라고 말하면 안 돼.”
“쓸 수 없는 무기는 애물단지야. 틈틈이 연습 봐줄게. 긴 여행일 텐데, 검을 쓸 수 있는 편이 낫잖아. 내가 널 지키지 못 할 때도 있을테고.”

유리에는 눈을 깜박거리다 엷게 웃었다.

“고마워, 세이덴.”
“감사 받을 일 아니야. 그보다도 좋지 않은 소식이야.”

세이덴은 기분이 면구해지는 감사의 말을 정기선 건으로 돌렸다. 여행자에게 들은 이야기를 정리해 전달했다.

“위험하더라도 산 아랫목으로 가보겠어? 그랑바니아와 근접한 지역만 벗어나면 이후에는 아직 무사한 마을도 있다고 해. 한 달 전 정보인 점이 불안요소이려나.”

선택지가 한정적인 질문이었다. 유리에는 고민하다 선선히 수락했다.

“그렇게 해. 늦어지면 그 때 다른 방법을 생각해 보고."
“바보 같긴. 하겠다고 맘먹었으면 해내야지. 다음 계획 같은 건 생각하지 마. 바로 출발하자. 단숨에 돌파하는 거야!”

세이덴이 기합을 넣어 외치자 슬라링이 풀쩍 뛰어올라 호응했다.

“피키-!”
“우왁! 놀래라. 이 녀석은 대체 어디 숨었다가 불쑥 튀어나오는 거야?”
“내 가슴팍에.”
“우와, 호색한 슬라임 같으니라고.”
“피, 피키잇!”

슬라링이 억울한 울음을 내지르며 세이덴의 머리와 어깨에 몸을 부딪쳐 항의했다. 투닥거리는 둘을 유리에가 떼어놓았다.

“둘 다 진정해. 사람들이 슬라링을 보면 놀랄 테니까 이러는 편이 나아. 그리고 슬라링이 품에 있으면 이상하게 상처가 많이 아프지 않은 기분이 들어.”
“그거 정말이야? 기분 탓 아냐?”
“정말이야. 그 날 이후로 천공의 검과 이 아이가 내 몸을 지켜주는 것 같아.”

슬라링이 보란 듯이 세이덴 앞에서 떵떵거리다 유리에의 품으로 쏙 들어갔다. 세이덴은 의혹을 담아 눈을 부라렸지만, 곧 한숨 쉬고 짐을 챙겨들었다.
유리에의 상처는 완치되지 않았다. 수도사들은 창에 정체를 알 수 없는 저주가 걸려있었을 것이라 추측했다. 혹여 공주가 즉사하지 않더라도 착실히 죽음에 이르도록 만드는 지독한 저주가. 진작 죽어도 이상하지 않을 목숨이었다. 천공의 검이든 슬라임이든 유리에가 고통스럽지 않은 데 일조한다면, 혹은 그렇게 느낀다면 부정할 필요는 없었다.

세이덴은 평소보다 급히 말을 몰아 넷드 마을을 빠져나갔다. 너른 평지를 벗어나 북쪽 숲의 오솔길로, 오솔길에서 티조트 산맥의 아랫목을 가리키는 표지판을 따라 비탈로 접어들었다. 유리에는 틈틈이 세이덴이 준 단검을 잡고 휘두르는 연습을 했다. 왕가 교육의 일환으로 검술을 배웠으나, 기본적인 호신술 수준에 지나지 않았다. 그마저도 침상에 드러누운 사이 체력이 떨어져서 힘들었다.
점심 무렵에는 여관 주인이 싸준 도시락을 먹었다. 세이덴이 지도를 살피는 동안 유리에는 말에게 물을 먹였다. 불쑥 슬라링이 옷자락에서 튀어나왔다.

“피키!”
“왜 그래, 슬라링. 배고프니?”

파스스 수풀이 흔들리는 소리가 났다. 슬라링이 유리에의 앞을 가로막고 수풀을 향해 위협적인 소리를 냈다.

“유리에, 물러나. 뭔가 온다.”

세이덴도 심상치 않은 기운을 느끼고 허리춤의 부메랑을 빼들었다. 수풀이 떨리는 소리는 점점 크게, 가까이 들렸다. 그러다 귀를 날카롭게 긁은 비명소리와 함께 마물이 나타났다!
미끌미끌한 초록색 표면이 흉물스러운 거대한 애벌레였다. 수십 개의 짧은 다리가 꾸물거리고 길쭉한 더듬이 끝에는 눈이 달렸다. 온 몸을 덮은 진액이 벌레가 움직일 때 마다 후두둑 떨어졌다.
유리에가 퍼지는 악취에 미간을 찡그리고 주춤 물러났다. 애벌레는 더듬이를 사방으로 빙글빙글 돌리다 몸을 세우고 키익거리며 일행을 위협했다.

“녹색 벌레로군. 저렇게 큰 건 처음 보는데.”
“어떡하지?”
“불에 약한 녀석이야. 내가 주의를 끌겠어.”

세이덴이 튕기듯 움직여 부메랑을 던졌다. 부메랑이 벌레의 얼굴을 크게 스치고 지나갔다. 화가 난 벌레가 세이덴이 움직이는 방향으로 육중한 몸을 미끄러트렸다. 세이덴은 지속적으로 부메랑을 던져 공격을 가했으나 미끄러지기만 할 뿐 이렇다 할 피해를 주지 못했다.
유리에가 쿵쾅거리는 긴장을 간신히 억누르고 차분하게 손끝에서 주문을 불러냈다. 손끝에 따듯한 기운이 샘솟고 곧 대기를 태우며 주먹만 한 불구슬이 나타났다. 벌레의 움직임은 유리에가 생각한 이상으로 빠르고 거칠었다. 유리에는 어디를 노려야할지 몰라 갈팡질팡하다, 세이덴이 물릴 위기에 처하자 다짜고짜 불구슬을 내던졌다.

“메라!”

벌레의 등에 불길이 닿았다. 불길은 점액을 삽시간에 태우며 썩은 고기 태우는 냄새를 사방에 풍겼다. 유리에는 비위가 상해 헛구역질을 했다.
메라 역시 두꺼운 껍질을 뚫어 타격을 주기엔 역부족이었다. 벌레는 불길을 업고서 발광하더니 유리에 쪽으로 몸을 틀었다.

“아……”

피해야했으나 발이 움직이지 않았다. 순간 유리에는 과거의 잔영을 보고 겁에 질렸다.

“피키이이잇-!”

슬라링이 온 몸을 던져 유리에를 밀쳤다. 나뒹굴어 아슬아슬하게 벌레에게 깔리는 사태는 모면했다. 틈을 놓치지 않고 세이덴은 부메랑을 힘껏 던져 벌레의 두 더듬이를 절단 냈다. 벌레가 배를 까뒤집고 버둥거렸다.

“유리! 그 녀석의 배를 노려!”

유리에가 몸을 일으키고 단검을 빼들었다. 혼비백산해서 손이며 입술이 덜덜 떨렸다.

‘괜찮아. 괜찮아. 할 수 있어.’

가슴에 내달리는 묵직한 고통은 두려움과 늘 함께했다. 유리에는 아랫입술을 악 물고 벌레의 배를 향해 단검을 내리꽂았다. 날카로운 칼날이 쉽게 살에 박혔다. 벌레의 몸이 크게 요동쳤다. 얼마나 저항이 심한지 유리에는 검을 박은채로 이리저리 끌려 다녔다. 휘말린 가운데도 검을 잡은 손은 결단코 놓지 않았다.

“됐어, 됐어! 유리, 그만 놔!”

잠깐 정신을 잃었다가 세이덴의 목소리에 화들짝 놀라 눈을 떴다. 어느새 벌레는 행동을 멈추고 뻣뻣하게 늘어져있었다.

“주, 죽었어?”
“그래. 그러니까 그만 놔도 돼.”

손이 굳은 듯이 펴지지 않았다. 억지로 풀자 격통이 내달렸다.

“아파.”
“손을 베였어. 막무가내로 달려드니까 그렇지.”

세이덴이 굳은 유리에의 손을 주물러 풀어주고 눈을 감았다. 낮게 뭔가를 웅얼거리고 주문을 완성했다. “호이미.” 잡은 손에서 밝은 빛이 일렁였다. 상처와 통증이 사라졌다. 유리에가 놀라 물었다.

“세이덴, 신성주문을 쓸 수 있었어?”
“수도사들이 필요할 거라면서 가르쳐 줬어. 약초 값도 아낄 겸 배웠을 뿐이야.”

유리에는 더 묻지 않고 묵묵히 세이덴의 손길에 몸을 맡겼다. 손은 마지막으로 유리에의 머리에 닿았다.

“잘했어. 무서웠지?”

서툰 칭찬의 몸짓과 말에 유리에는 눈물이 날 뻔 했다. 꾹 참고 고개만 한 번 끄덕, 했다.

“가자. 조금 더 힘내자고.”
“응.”

마차가 다시 출발했다. 유리에는 슬라링에게 감사를 전했다. 무릎을 안고 몇 번이나 숨을 가다듬으며 치미는 두려움을 억눌렀다. 울고 있을 틈이 없었다. 두려워 할 틈도 없었다. 가야 할 길이 너무 멀었기 때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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