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장. 으스러진 세계 - Lv. 3 └- [DQ] 천공의 레프리제

유리에가 아직 수도원 침상에 있을 무렵, 어느 날 밤 수도원장이 세이덴을 불러 말했다.

“공주는 앞으로 힘든 길을 가셔야 합니다.”
“어째서요?”
“숙명이기 때문입니다.”
“빌어먹을. 저 꼴이 됐는데, 더 힘든 일을 겪어야 한다고요?”

세이덴의 난폭한 언동에도 수도원장은 화내거나 말리지 않았다. 차분한, 어딘지 감정의 하나를 인위적으로 없앤 표정과 목소리로 선고하듯 말을 전할 뿐이었다.

“그리고 당신 또한 공주의 숙명에서 자유로울 수 없습니다. 당신이 선택한 바이기도 하지요.”
“영문 모를 소리만 하시네요.”
“정확히 두 분 앞에 어떤 일이 일어날지 알 순 없습니다. 그러나 공주의 피로 내려오는 숙명과 당신의 운명은 이전 시대로부터 하나로 이어져 왔습니다. 제게는 그 인연이 보입니다. 당신에게는 신의 힘을 받들 그릇이 있어요.”

그야말로 뚱딴지같은 소리라며 세이덴이 코웃음 쳤다. 자신은 평범한 사람이었다. 공주의 유모였던 어머니, 사냥꾼이었던 아버지 모두 평범한 집안에서 나고 자란 보통의 인간이었다. 으레 하나 쯤 있을법한 위대한 업적을 가진 조상도 없었다. 하물며 신과 연관된 직종이나 힘을 가진 사람이 있을 턱이 없었다.

“지금은 알 수 없습니다. 공주가 숙명을 깨우쳐 갈 무렵 당신도 알게 되겠지요. 당신에게 신의 힘 몇 가지를 전수하도록 하겠습니다. 공주에게도 필요할 테니까요.”

마음에 들지 않아도 신세를 의탁하는 처지에 싫다는 말도 할 수 없었다. 세이덴은 이후 유리에가 회복하는 동안 신성마법 몇 가지를 익혔다. 신의 힘을 사용하는 소질이 정말로 있었음을 알았을 때에는 무척 황당했다. 혹 자신이 주워온 자식이 아닌지 진지하게 의심했다.

*

이후 며칠간은 큰 문제없이 이동했다. 종종 산기슭의 마물이 나타나곤 했으나, 모험에 꽤 굳은살이 다져진 세이덴의 지시로 이럭저럭 해치우며 나아갈 수 있었다. 유리에도 조금씩 두려움을 이겨나갔다. 다만, 체력의 한계는 별개의 문제였다.
언제나 해질 무렵 유리에는 마차에 틀어박혀 늘어졌다. 밤이 찾아오면 가슴의 저주가 난동을 부렸다. 심할 때도, 덜 할 때도 있었으나 어느 쪽이든 고통스러웠다. 울상인 슬라링을 끌어안고 웅크려 참는 수밖에 없었다. 세이덴이 이를 모르지 않았다.
마부석에서 유리에의 앓는 소리를 들었다. 마차 움직이는 소리에 묻힐 법도 하건만, 얄궂게도 귀가 예민한 터라 선명하게 들렸다. 처음 며칠 괜찮으냐 물은 뒤로 유리에가 더더욱 소리를 내지 않으려고 해서 이후는 모른 척 했다.

‘저주를 해제하지 않으면 저 녀석 얼마나 살 수 있을까?’

복잡하고 슬픈 심경이었다. 천공의 검이 성스러운 힘을 계속 발하는 이상 당장 쓰러지진 않으리라. 그러나 기간이 길어져도 문제였다. 저렇게 매일같이 아파해서야 정신력이 먼저 떨어질까 염려했다.
세이덴은 말을 채근해 속도를 좀 더 내도록 했다. 오늘 여로의 끝에는 마을이 있었다. 티조트 산 서북쪽의 광산에 자리한 카니알 촌이었다. 정보를 준 여행자는 가급적이면 그 마을은 지나가라고 충고했다. 이유는 ‘사람들 분위기가 영 이상해서’였다. 한두 해 허투루 떠돌아다니지는 않았을 테니, 노련한 여행자의 충고는 아마도 합당할 것이라 생각했다. 그러나 세이덴은 유리에에게 하루라도 편한 잠자리를 마련해주고 싶었다.

어둠이 짙게 깔릴 무렵, 얼기설기 판자로 바리케이트를 친 카니알 촌의 입구에 도착했다. 스산하게 숲이 떨리는 소리 외에는 잠잠했다. 세이덴은 마차를 마을 입구에서 제법 떨어진 곳에 세우고 혼자 바리케이트로 향했다.

“누구냐.”

바리케이트 뒤에서 잔뜩 경직된 목소리가 들려왔다. 세이덴은 걸음을 멈추고 말했다.

“지나가는 여행잡니다. 밤이 늦어서 그런데 오늘 하루 머물러 갈 수 있을까요?”
“헛소리 하지 마!”

분에 찬 외침이었다.

“둔갑한 마물이 아닙니다. 어떻게 증명하라 하신다면 하겠……”
“필요 없으니 당장 꺼져라! 네 눈깔에 화살이 박히고 싶지 않으면 지금 당장.”

휙 공기를 가르는 소리와 함께 세이덴의 발치에 화살이 꽂혔다. 설득의 여지가 없었다. 세이덴이 낮게 욕지거리를 뱉고 마차로 돌아왔다. 마차 근처에서 유리에가 서성거리고 있었다.

“왜 나와 있냐.”
“세이덴이 없으니까. 마물이 나타날지도 모르고. 마을은 어때?”
“틀렸어. 너무 경계하는걸. 밤이라서 그런가봐.”
“어쩔 수 없지. 그런 시기니까. 그럼 여기서 쉴까?”
“너무 트인 데라서 위험해. 조금 더 돌아가면 여행자가 알려준 안전한 장소가 있어. 그리로 가자.”

두 사람은 마을 입구에서 10분 쯤 돌아 나와 야트막한 언덕길을 올랐다. 여행자가 머물렀다던 숲지기의 통나무집이 보였다.

“저기서 쉬면되겠군.”
“주인이 있지 않을까?”
“그럼 양해를 구하고. 빈집이었다고 들었는데.”

마차를 통나무집 옆에 대고 이번에도 세이덴이 먼저 내려 문을 두드렸다. 집을 둘러싼 분위기나 공기, 또 빛이 없는 상황을 보건대 빈집이 분명했다.

“역시 빈 집……”
“누구?”

문이 배꼼 열리며 집 안 어둠속에서 작은 소녀가 나왔다. 이제 여섯, 일곱 살 정도로 보이는 깡마르고 초췌한 아이였다. 세이덴이 순간 놀라 뒷걸음질 쳤다.

“어? 그러니까.”
“여행자?”
“그런데. 아. 부모님은 안 계시니?”
“지금은 나 혼자야. 오빠 잘 데가 없어서 왔어?”

세이덴은 서둘러 진정하고 소녀의 말에 수긍했다.

“오빠는 마물도 아니고 이상한 사람도 아니야. 동행인 언니가 몸이 안 좋아서 그러니 하루만 쉬어가게 해 줄래?”

소녀는 까만 눈동자로 세이덴을 물끄러미 올려다보더니 고개를 끄덕거렸다.

“응. 좋아. 오빠는 착한 사람처럼 보여. 대신에 부탁 하나만 들어줄래?”
“부탁?”
“냇가에 놀러갔다가 엄마의 반지를 잃어버렸어. 아빠가 소중히 간직하랬는데. 냇가에 마물이 나와서 이젠 나 혼자 갈 수가 없어.”

귀찮은 일이었다. 세이덴이 망설이는 사이 마차에서 내린 유리에가 대답했다.

“알았어. 찾아줄게.”
“유리.”

지체할 시간이 없었다. 세이덴이 책망어린 시선으로 유리에를 바라보았다.

“그 정도 여유는 있잖아. 냇가가 많이 넓니? 물에 빠트린 건 아니야?”
“으응. 조그마해. 물에 빠트리진 않았어. 분명히 근처에 있을 거야.”
“알았어. 찾아볼게.”
“고마워. 어서 들어와.”

세이덴은 적극적으로 말리지 못하고 한숨만 내쉬었다. 유리에는 한번 마음을 굳히면 웬만해선 돌아서지 않았다. 어릴 때부터 그랬다.

“남매가 똑같이 똥고집이야, 정말.”
“응? 무슨 말 했어?”
“아무 말도 안 했어. 그나저나 집안 꼴이 이게 뭐냐? 정리 좀 해야겠구만.”

집은 몇 달 동안이나 치우지 않고 방치한 마냥 엉망이었다. 도무지 사람 사는 집처럼 보이지 않았다. 세이덴은 괴이쩍은 기분으로 난로와 침대부터 정리했다. 유리에와 소녀는 시키는 대로 손을 도왔다.
난로에 불을 지피자 금방 훈기가 돌았다. 소녀는 자신의 이름을 메이라고 소개했다. 메이는 그간 제대로 먹지 못했는지, 세이덴이 가져온 식량으로 간단하게 음식을 해 내자 허겁지겁 닥치는 대로 먹어치웠다. 유리에는 메이와 둘이서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누다 함께 잠자리에 들었다.

“그럼 메이는 아빠랑 둘이서 살아?”
“응. 아빠는 숲지기야. 활을 아주 잘 쏴. 지금은 마을 순찰을 하러 갔어.”
“혼자선 무섭지 않니?”
“괜찮아. 익숙한 걸.”

배시시 웃는 메이를 유리에가 꼭 끌어안았다. 아직 어린 소녀였다. 혼자 덩그러니 집에 남겨져 무섭지 않을 리 없었다. 메이가 유리에의 가슴에 얼굴을 묻고 비볐다.

“언니한테서 좋은 냄새 나.”
“그래?”
“응. 해님 냄새야. 따듯하고 포근해.”

등을 토닥여주니 메이는 곧 잠들었다. 유리에도 오랜만에 사람의 온기에 취해 꿈 없는 단잠을 잤다.
두 사람이 곯아떨어진 것을 확인한 세이덴은 조용히 집을 나와 메이가 알려준 냇가로 향했다. 슬라링이 왜 그러냐며 묻듯이 세이덴의 어깨에 올라 피키? 하고 울었다.

“바쁜데 언제 내일 그걸 찾아다 와서 건네주고 그러냐. 시간 낭비는 줄여야지.”

투덜거리는 세이덴을 향해 슬라링이 피킷피킷거리며 웃었다. 고요한 밤에 부엉이 울음이 을씨년스러웠다. 메이의 집에서 동쪽의 작은 샛길을 따라 십여 분을 걸으니 물 흐르는 소리가 났다. 세이덴은 기척을 줄이고 천천히 냇가로 접근했다.
산의 상류의 한줄기를 타고 다섯 걸음 정도 폭의 물줄기가 흐르고 있었다. 물줄기는 완만히 굽이쳐 나오는 부분에 샘처럼 고여서, 그 인근만이 작은 공터를 형성했다. 세이덴은 혹 마물이 지키고 있지 않을까 긴장하여 동태를 살폈다.
몇 분을 가만 지켜보기만 했으나 특별히 이상한 분위기는 감지되지 않았다.

“슬슬 시작해볼까. 너도 좀 도와. 난 이쪽에서 찾을 테니까, 넌 건너편에서. 알았지?”
“피키-”

슬라링은 맡겨만 달라며 비장한 표정으로 몸을 부풀리더니 바닥으로 폴짝 뛰어내렸다. 둘은 공터의 땅 수풀을 꼼꼼히 헤집으며 수색했다.
세이덴이 물줄기를 조금 거슬러 올라가자, 발길에 뭔가가 채여 덜그럭 소리를 냈다. 불빛을 비춰보니 하얀 뼈가 보였다.

“이건 뭐지?”

자세히 들여다보자 어린아이로 추측되는 크기의 해골이었다. 걸친 옷은 헤졌으나 강한 기시감을 느꼈다. 해골의 손가락에 은으로 만든 낡은 반지가 끼워져 있었다. 세이덴은 그 순간 아무 생각이 나지 않아 뻣뻣하게 서있기만 했다.

“피킷?”

슬라링이 머리 위로 뛰어올라 불러서야 막힌 숨을 토해내며 정신을 차렸다. 조심조심 반지를 꺼내고 깊은 시름에 잠겼다.
집으로 돌아와 유리에와 메이가 잠든 침대로 다가갔다. 유리에가 세상에서 가장 편안한 표정으로 곤히 잠들어 있었다. 방치된 집에 혼자 아빠를 기다리던 깡마른 소녀는, 거기에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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