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장. 으스러진 세계 - Lv. 4 └- [DQ] 천공의 레프리제

자욱한 안개 너머에서 여자의 가냘픈 흐느낌을 들었다. 어딘지 마음을 저미게 만드는 목소리였다. 유리에는 분명 꿈을 꾸고 있음을 알았다. 의식이 깨어있어 잠들기 전 기억이 생생했다. 하지만 도통 이상한 꿈이었다. 자각할 수 있는 꿈을 지금껏 한 번도 꿔 본적이 없었다.

- 당신이 왜 울어.

흐느낌을 달래는 또 다른 목소리를 들었다. 들어본 적 없지만, 그리움을 불러일으키는 상냥한 남자의 목소리였다.

- 내가 왜 우냐고? 그건 당신이-

울음 젖은 여자의 목소리가 말했다. 이후 두 목소리는 좀 더 이야기를 나누는 듯 했으나 소리가 뭉개져 잘 들리지 않았다. 유리에가 목소리가 들리는 방향으로 걸었다. 그러나 좀처럼 가까워지지 않았다.

“거기 누구 있어요?”

대답은 돌아오지 않았다. 대신 새카만 어둠이 엄습하고 유리에는 잠에서 깼다. 세이덴이 내려다보고 있었다.

“깼어?”
“……”
“유리.”
“아침이야?”
“그래. 어디 아픈 건 아니지?”
“이상한 꿈을 꿨을 뿐이야.”

유리에가 비틀거리며 일어나 창밖을 보자 흐린 아침의 빛이 새어 들어오고 있었다. 세계가 태양의 빛을 잃은 후부터 자고 일어나도 언제나 노곤함이 남는 느낌이었다. 유리에는 고개를 저어 잠을 몰아냈다.

“메이는?”

옆에 자고 있어야 할 메이가 없었다. 세이덴은 먹먹한 표정으로 침묵했다.

“세이덴. 무슨 일 있었어?”

세이덴이 주머니에서 반지를 꺼내 건네주었다. 낡고 녹슨 은반지를 내려다보고, 유리에는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가면서 설명해줄게. 일단 아침부터 먹어.”

유리에는 더 캐묻지 않았다. 세이덴은 기본적으로 말을 많이 가리는 사람이 아니었다. 그런 그가 저렇게 말을 아낄 정도라면, 분명 자신을 생각했기 때문이라 판단했다.
간단하게 소세를 하고 세이덴이 차려준 식사로 허기를 달랬다. 출발 준비를 마치자 세이덴은 지난 밤 갔던 냇가로 유리에를 데려갔다.

“어젯밤에 반지를 찾으러 갔어.”
“왜 혼자 갔어.”
“시간을 아끼고 싶었으니까. 그 반지는 냇가 근처에 떨어져 있었어.”

유리에가 반지를 만지작거렸다. 별다른 장식 없는 볼품없는 반지였으나 따듯하고 정겨운 느낌이 드는 물건이었다. 꼭 메이의 온기처럼 느껴졌다.
유리에는 세이덴이 안내한 지점에 다다라 작은 해골을 보고서야 그가 말을 아낀 이유를 이해했다. 형언할 수 없는 깊고 아득한 기분이 온 몸에 퍼졌다. 유리에는 순간 중심을 잃고 비틀거렸다. 세이덴이 황급히 붙잡아주지 않았다면 바닥에 주저앉을 뻔 했다.

“괜찮아?”
“어, 으, 응. 그럼 어젯밤은,”
“잠깐. 뭔가 와.”

세이덴이 멀지 않은 곳에서 기척을 느끼고 유리에와 반대편 수풀 뒤로 몸을 숨겼다. ‘마물인가?’ 긴장해서 추이를 지켜보자 두 사람의 반대편 수풀을 헤치고 사람들이 나타났다. 카니알 촌 사람들로 보였다. 분위기는 좋지 않았다.
장정 두 사람이 손과 발, 입을 결박한 여자를 짊어졌다. 그 뒤로 한 명의 노인이 다른 남자 두 명의 보호를 받으며 뒤따르고 있었다. 여자는 온 몸을 들썩이며 저항했으나 빠져나올 수 없었다. 여자는 공터의 풀밭 위로 내던져졌다. 여자는 막힌 울음을 터트리며 애원하는 듯 했다. 노인이 침통하게 말했다.

“미안하구나, 아시야. 마을의 모두를 위한 일이란다. 너의 희생으로 많은 사람들이 살게 될 게야. 정말 미안하다. 날 원망해도 좋다.”

남자들의 무리가 아시야라 부른 여자만을 내버려둔 채 떠나갔다. 여자는 절망의 소리를 냈다.

“세이덴, 대체 저건 뭐지?”
“알아보지 않아도 각이 딱 나오는데.”

유리에가 일어섰다.

“도와주자.”
“이견 없어. 어제 마을에 들어가지 못해서 다행이군. 바리케이트에서 막힌 게 천만 다행이야.”
“뭔가가 나오겠지?”
“잘 대비해. 가자.”

두 사람이 튀어나가 서둘러 얕은 내를 넘어갔다. 쓰러진 아시야를 일으켜 세웠다. 아시야는 갑작스런 낯선 이들의 도움에 눈이 휘둥그레졌다. 세이덴이 손발의 결박을 잘라내는 동안 유리에가 재갈을 풀어주었다.

“괜찮아요?”
“당신들은, 누구죠?”
“지나가는 여행자예요.”
“뒤, 뒤를 조심해요!”

아시야가 외치자 유리에가 반사적으로 검을 뽑아들어 힘껏 휘둘렀다. 칼날에 뭔가가 맞아 튕겨나며 어깨까지 충격이 찌르르 올라왔다.

“윽!”

반동으로 검을 놓칠 뻔 했다. 냇가 안쪽 물줄기에서 기다란 촉수가 뻗어져 나와 허공을 유린했다. 촉수의 끝은 뱀 혓바닥처럼 갈라져 눅진한 액체를 뚝뚝 흘렸다. 유리에의 위치에서는 잘 보이지 않는 냇가의 비스듬한 아래쪽으로 동굴이 있었다. 그 어둠 안쪽에서 그르릉거리는 불길한 숨소리가 울려 퍼졌다.
세이덴이 부메랑을 던져 촉수를 후려치자 촉수는 다시 굴 안으로 들어갔다.

“도망쳤나?”
“아니오. 놀라서 잠깐 몸을 숨겼을 뿐, 해가 지면 기어 올라올 거예요.”

아시야가 덜덜 떨며 설명했다. 유리에와 세이덴은 촉수 길이가 닿지 않는 위치로 좀 더 물러나 아시야의 상태를 살폈다. 세이덴이 상처를 치료하려고 하자, 아시야는 사양하고 스스로 호이미를 외워 몸을 회복했다. 공황에서 벗어나자 두 사람에게 꾸벅 고개를 숙여 감사를 전했다.

“구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저는 아시야. 카니알 촌 출신의 수습 신관입니다.”
“무사해서 다행이에요. 아까 그 사람들은 마을 사람들인가요?”
“공교롭게도 그렇습니다.”
“저 안의 몬스터가 제물을 요구했나보군.”

세이덴의 지적에 아시야는 입술을 깨물고 고개를 떨궜다.

“저는 북쪽 수도원에서 수련하고 있던 신관이었습니다. 몇 달 전부터 가족들과 소식이 끊겼지요. 고향 인근이 마물들에 의해 점령됐을지도 모른단 이야길 듣고 서둘러 돌아왔어요. 하지만 이미, 가족들은 모두 제물로 바쳐진지 오래더군요.”
“어떻게 그런 짓을 해요? 같은 마을 사람인데!”
“마왕의 수하가 사람들을 겁박했어요. 아주 강력한 마족이었다고 하더군요. 매 달 여기에 제물을 바치지 않으면 마을을 몰살시키겠다고. 대신 제물을 제 때 바치면, 이 인근 모두를 지배하더라도 마을과 마을 사람들만큼은 지켜주겠노라고. 그래서 마을 사람들은 제물을 바치지 시작했어요. 마을 사람이 아닌 외지인들부터, 그리고 멋모르고 찾아오는 여행가들부터. 저희 가족은 부모님 대에야 마을에 정착한 사람들이었으니까, 그래서.”

지독한 이야기였다. 아시야의 눈에서 눈물이 가시지 않았다. 유리에가 손수건을 꺼내 건네주었다. 세이덴이 기분 나쁜 표정으로 이야기를 곱씹다가 문득 의아했다.

“외지인부터? 그럼 어제 내가 찾아갔을 때 왜 들여보내주지 않았지?”
“그건, 잘 모르겠습니다. 누가 들이지 않았지요? 그 바리케이트는 늘 열려 있어요.”
“활까지 쏘면서 꺼지라며 축객했어.”
“그럴 리가 없는데, 마을에 활을 쏘는 사람은 이제 없을 텐데요.”
“이제 없다?”
“자경단 겸 숲지기를 하던 티티토 씨는 마을 유일한 전사였어요. 딸인 메이와 함께 마을 밖 숲에서 살았지요. 아내를 잃은 뒤 실의에 빠져서 방황하다 이곳에 정착하게 된, 저희 가족과 같은 외지인이었어요. 제물에 대해 반대하다 마을 사람들의 분노를 샀고, 결국 돌아가셨다고 들었습니다. 그 뒤 메이도 제물로……”

유리에는 가슴 안쪽에서 끓어오르는 고통을 낮은 신음을 터트려 토해냈다. 머리가 어지럽고 구역질이 났다. 손으로 이마를 짚고 눈을 감았다.

‘마왕이 바라는 세계는 이런 세계였구나. 그저 죽이고, 파괴하는 게 아니라.’

일그러진 세상의 시작일 뿐이었다. 유리에는 이곳의 일이 세계 전체의 일이 되었을 때를 상상하고 몸을 떨었다. 온 몸의 피가 끓는 듯 분노가 치밀었고, 반대로 머리는 차가웠다.

“세이덴, 저 녀석을 쓰러트리겠어. 저대로 놔두고 싶지 않아.”
“얼마나 강한 녀석인지도 모르면서. 무모한 짓 하지 마.”

세이덴이 만류하고 나섰다. 아시야가 유리에를 거들었다.

“독 두꺼비의 변종이에요. 마을을 궁지로 몰아넣은 마왕의 수하가 이 곳 근처에 자생하는 독 두꺼비에게 진화의 비법을 걸어 만든 마물이죠. 대처방법만 안다면 쓰러트릴 수 있을 거예요. 제가 돕겠습니다. 가족의 원수를 갚게 해주세요.”
“당신은 어떻게 잘 알지? 진화의 비법은 또 뭐야.”
“진화의 비법이란 아주 오래 전, 분에 넘치는 힘을 원했던 인간이 만든 사악한 비술입니다. 인간계에서는 금지당해 사라졌지만, 오랜 시간을 사는 마족 중에는 이 비법에 대해 아는 자가 있다고 합니다. 저는 단지 가족의 생사를 알기 위해 온 것만은 아니었습니다. 사정은 차차 이야기 드릴 테니, 제발 돕게 해주세요.”

세이덴은 이번에도 이길 명분이 없음을 알고 유리에의 의견에 따르기로 했다. 아시야는 독 두꺼비가 야행성이며, 낮에는 밖에 나오지 않기 때문에 긴 혓바닥을 이용해 제물을 채어 굴로 끌어들인다고 알려주었다. 밤에는 본래의 힘이 나오므로 가급적이면 낮에 약해져 있을 때 물리쳐야하며, 가장 굶주려있을 지금이 그 때임을 강조했다.
아시야는 설명하는 내도록 분노에서 평정을 지키느라 몇 번이고 눈물을 흘리고 삼키길 반복했다. 세이덴은 아시야가 더 말하지 않은 부분을 의심했다. 추궁하여 캐낸다면 캐낼 수도 있겠지만, 유리에가 그러지 말라는 엄한 눈으로 바라보아 섣불리 말하지 못했다.

세 사람은 독 두꺼비를 퇴치할 때 쓰는 푸른색 질경이를 주변에서 캤다. 주물러 즙을 낸 후 몸에 바르고서 굴로 향했다. 세이덴이 등불을 켜고 가장 선두에서 조심스레 전진했다.
굴 안쪽은 제법 깊어서 커다란 미궁 같았다. 사악한 기운이 가득해 이미 마물이 득시글거렸다. 거대 박쥐나 지렁이, 때때로 독 슬라임도 모습을 드러냈다. 가벼운 독에 당하기도 했으나 아시야가 키아리로 해독해주어 큰 피해는 입지 않았다.
통로 중간에서 잠깐 쉬며 숨을 돌릴 때 세이덴이 말했다.

“당신은 이 마물이 생겨난 원인도, 퇴치 방법도 알고 있어. 그렇지?”
“네.”
“그런데도 당신이 제물로 바쳐졌다는 건, 마을 사람들이 거부했기 때문인가?”

아시야의 얼굴이 순식간에 창백해졌다. 유리에가 이해하지 못하고 두 사람을 번갈아보았다.

“무슨 말이죠?”

아시야는 허탈한 웃음을 짓고 대꾸했다. 세상의 모든 비탄이 거기에 사무쳐 있었다.

“엎지른 물을 주워 담는 걸 포기했기 때문이겠지요. 마물을 퇴치한다고 해도, 카니알은 이제 끝이에요. 차라리 몰살당하는 편이 나았을지도 몰라요. 차라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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