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장. 으스러진 세계 - Lv. 6 └- [DQ] 천공의 레프리제

카니알 마을 이후에는 큰 문제없이 순탄했다. 유리에와 아시야는 며칠 사이 부쩍 친해졌다. 가족을 잃고 고향을 잃은 외로움을 서로 위로하며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다. 아시야는 마음이 강한 사람이었다. 금방 의연하게 마음을 다지고 유리에를 신경써주었다.

“비앙카라고 하셨나요?”

유리에는 최근 꾸었던 꿈에 대해서도 이야기했다. 아시야는 그 이름이 마음에 걸리는지 다시 물어왔다.

“네. 흔한 이름이잖아요.”
“그렇긴 합니다만, 공주님의 꿈이란 점이 마음에 걸립니다.”
“어째서요?”
“그랑바니아 왕가는 엘헤븐의 성스러운 핏줄도 함께 이어지지요. 아벨 왕 이후 어떤 왕족도 평범했던 적은 없다고 들었습니다. 많든 적든 천공의 피와 엘헤븐의 피 어느 한 쪽의 힘이 이어져 내려오지요. 그저 지나가는 꿈이 아닐지도 모릅니다. 그 이름과 관련해 짐작 가는 부분은 하나도 없으신지요?”

유리에는 곰곰이 생각했지만, 마땅히 짚이는 바가 없었다.

“제 주위에는 많지 않았지만, 비앙카란 이름은 그랑바니아에서 여자아이에게 흔히 붙이는 이름 중 하나에요. 아벨 왕의 부인이셨던 비앙카 왕비가 시초였대요. 비앙카란 이름을 가진 여자아이는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신부가 된다던가. 선대 왕이나 공주 출신중에서도 그 이름을 지닌 분이 몇 분 계셨어요. 그 외에는 잘 모르겠어요.”

아시야가 고개를 끄덕이고 유리에의 손을 꼭 쥐었다.

“꿈을 너무 간과하지 말도록 하세요. 제가 이런 말을 드리면 강요처럼 들릴지 모르겠지만, 공주님은 당신 생각 이상으로 많은 것에 보호받고 있을 겁니다. 조그마한 전조가 큰 희망이 될지도 몰라요. 그러니 부디, 당신 자신을 좀 더 소중히 여기시기를 바라요.”

유리에는 차마 고개를 들지 못하고, 죄책감과 미안함이 묻은 목소리로 고맙다고 대답할 뿐이었다.

사이네스 항구에 도착했을 때가 때마침 정기선이 출항하는 날이었다. 사이네스는 그랑바니아가 마물의 침공을 받기 얼마 전, 커다란 해일로 인해 항구의 절반 이상이 파괴되는 참극을 겪었다. 아직도 수습되지 못한 잔재가 도처에 널려있었다. 큰 비극의 뒤고 세상에 절망이 만연했으나, 그럼에도 항구 거리에는 생기가 돌았다.
세이덴이 발 빠르게 탑승 수속을 밟는 동안 아시야와 유리에는 이별을 나누었다.

“건강해요, 아시야. 다시 돌아올 때 또 만날 수 있기를 바라요.”
“공주님도 부디 조심하세요. 무엇보다도, 당신의 생명을 좀먹는 저주를 가장 먼저 해결할 과제로 삼아주세요.”
“명심할게요.”
“여러분의 길에 신의 가호가 언제나 함께하기를.”

아시야와 몇 마을 사람들의 전송을 받으며 배가 출항했다. 라인하트의 배는 무척 큰 범선으로, 단단한 무장을 갖춘 전투선이었다. 선원들 외에도 싸울 준비에 만전을 기한 병사들이 바다를 향해 경계를 풀지 않았다.
마지막 정기선이었기에 탑승객은 많지 않았다. 유리에와 세이덴을 포함해 십여명 정도에 불과했다. 멀어져가는 그랑바니아 대륙의 모습을 유리에는 쓸쓸하게 지켜보았다.
온통 바다만 보일 무렵에는 병사의 제지에 방으로 돌아갈 수밖에 없었다. 꽤 자주 마물이 나타나는지, 하루에 두 세 번씩은 갑판 쪽이 소란스러웠다. 유리에는 더 이상 정기선을 운행하지 않는 이유를 깊게 이해했다. 이처럼 위험한 바다라면 오가는 위험부담이 너무 컸다.

“너 루라를 배웠었지?”

세이덴이 물었다. 한 번이라도 가 본 장소라면 어디든 이동할 수 있는 순간이동 주문, 루라. 이 주문도 아벨 왕이 남긴 위대한 그랑바니아의 유산이었다. 유리에가 수긍했다.

“다섯 살 때 전승을 받았어.”
“쓸 수 있어?”
“지금은 안 돼. 주문이 발동하질 않아.”
“도구점 주인이 키메라의 날개가 작동하지 않는다고 했어. 그렇단 건 이동 마법이 통째로 봉인 당했나?”
“아마도. 여행의 문도 작동하지 않을 거야. 마법 이론시간에 들은 적 있어. 사악한 힘이 세계에 압력을 가할 때 가장 먼저 영향을 받는 마법이 이동 마법이라고. 그래서 루라가 봉인되거나 여행의 문이 작동하지 않을 때는 세계에 위험이 닥쳐온 전조래.”

당분간은 그랑바니아로 돌아오긴 힘들게 되었다. 라인하트로 넘어가겠다고 여로를 세웠을 때 어느 정도 예상한 일이지만, 막상 떠나게 되니 유리에도 세이덴도 마음이 적잖게 심란했다.
유리에의 무릎 위에서 졸던 슬라링이 갑자기 풀쩍 뛰어올랐다. 슬라링은 작게 난 방의 창문턱에 올라가더니 바깥을 향해 위협적인 소리를 냈다.

“왜 그러니?”

두 사람이 의아해 함께 창가에 다가갔다. 바다 저편 하늘에 이상한 먹구름이 생겨나고 있었다. 주변을 온통 시커멓게 만드는 안개가 끼어 꼭 그쪽만 별개의 세상 같았다. 세이덴은 순간 온 몸을 헤집는 한기에 딱딱하게 얼어붙었다.

“뭐야, 저거. 이게 대체 무슨 감각이야……”

어둠 속에서 어떤 형체가 일렁거렸다. 바다에서 하늘까지 닿을 만큼 거대한 형상이었다. 두른 어둠으로 정확한 모습은 알지 못했으나, 붉게 빛나는 눈동자만큼은 사악하기 그지없었다.

- 어리석은 인간들이여.

머릿속으로 음성이 파고들었다. 무겁고, 무섭고, 기괴하게 비틀린 목소리였다. 유리에가 놀라 숨을 삼켰다.

- 아직도 희망에 기대는가? 가엽게도. 그대들의 희망은 이미 이 세상에 없거늘.

동정과 비웃음. 그리고 안개 속에서 어떤 영상이 떠올랐다.

“아……”

잿더미가 된 그랑바니아였다. 불타버려 백골만 남은 시체가 곳곳에 널렸고, 마물들이 그 위를 활보하며 제들 세상인 양 웃고 있었다. 유리에는 등줄기부터 힘이 빠져 주저앉았다.

- 영화가 천년만년일 줄 알았느냐?

성의 감시탑 가장 위쪽, 창에 꽂혀 전시된 시체는 백골이 아니었다. 누구의 시체인지 확연히 보이자 세이덴이 반사적으로 움직여 유리에의 머리를 끌어안았다.

“보지마!”
“아바마마, 어마마마?”
“아니야. 아니야! 멋대로 녀석들이 보여주는 거야!”

그럴 가능성은 적었지만, 세이덴은 한사코 부정했다. 머릿속의 음성이 잔뜩 웃음기를 머금었다.

- 내 부하들이 아무래도 마무리를 시원찮게 한 모양이야. 천공의 용자가 살아있다고? 아, 그래. 좋을 일이지. 인간들이여, 아무쪼록 짧은 희망을 꿈꾸어라. 이 몸이 너희 인간들에게 약간의 유예시간을 주었노라. 그러나 그대들 중 그 누구라도, 그대들이 믿는 희망에 조력하는 자가 있다면 그들부터 하나씩 멸하겠노라.

제안의 의도를 파악한 세이덴이 이를 갈았다.

- 희망을 산채로 잡아서 내게 바친다면, 영예로써 보답할 것이다.

제 2, 3의 카니알을 만들겠다는 선포였다. 검은 안개와 목소리가 흩어져 사라져버렸다. 유리에의 몸이 떨렸다. 머리를 세이덴의 품에 박고 옷자락을 꽉 쥐고서, 흐으으, 흐으으 하며 샌 소리를 냈다. 유리에는 죽어가는 짐승처럼 늘어졌고, 비명과 말이 되지 못한 절망에 받쳐 울었다. 세이덴은 그저 금방이라도 부서져버릴 것만 같은 여린 어깨와 등을 조용히 다독여 주었다.

*

저녁부터는 또 괴로운 발작이 엄습했다. 세이덴은 유리에의 곁을 떠나지 않고 지켜주었다. 유리에는 저주의 고통과 당면한 절망이 뒤섞여 평소와 다르게 크게 몸부림 치고, 신음했다. 자정이 넘어 새벽에 접어들어서야 간신히 진정됐다.
세이덴이 진이 빠진 유리에의 이마에 차가운 물수건을 올려주었다. 유리에의 가슴팍에 꼭 붙은 슬라링도 걱정으로 어쩔 줄 몰라 했다. 유리에가 잠긴 목소리로 말했다.

“레인, 못 만나겠어.”
“정신이 들자마자 무슨 소리야.”
“레인은 날 도와주려고 할 거야. 레인이 날 도우면, 다음 목표는 라인하트가 되겠지?”
“녀석들의 손에 놀아날 필요 없어. 설령 그렇다고 해도 라인하트는 호락호락 당하지 않을 거야.”
“아니야, 아니야. 결국 그랑바니아는 저렇게 됐잖아.”

말문이 막혔다. 유리에의 말 대로였다. 그랑바니아와 라인하트의 국력은 큰 차이가 없었다. 오히려 요새라고 칭해지는 그랑바니아의 방어선을 뚫고 순식간에 멸망시켜버릴 정도면 라인하트가 무사하리란 보장은 없었다.
네가 용자가 아니니까 괜찮을 것이란 말이 세이덴의 목구멍에서 맴돌았다. 위안도 되지 않을 말이기에 삼켰다.

“나 때문에 망칠 수 없어. 나는-”
“그만해. 일단 자고 나서 이야기 하자. 너 지금 몹시 힘들어.”
“……미안해.”
“뭘 네가 사과해. 어서 자.”

유리에가 억지로 잡고 있던 의식의 끈을 놓았다. 기절했다고 오인할 만큼 순식간에 잠들어버렸다.

“설령 너 때문에 위험해진다고 해도, 네가 살려면 어쩔 수 없잖아.”

유리에는 이 상황까지 와서도 자신의 탓을 버리지 못했다. 세이덴은 푸념 아닌 푸념을 터트리고 제 자리로 돌아가 드러누웠다. 잔잔한 파도 소리에 가슴이 울렁거렸다. 앞으로 나아갈 길이 얼마나 더 지독할지 생각하면 차라리 악몽이 낫겠단 생각마저 들었다.

- 공주를 지키고 싶어?

세이덴이 선잠에 들었다 낯선 목소리에 퍼뜩 깨어났다. 경계하며 주위를 둘러보았다. 불규칙적인 숨을 내 쉬며 잠든 유리에만 보였다. 아까와 마찬가지로 머릿속으로 울리는 소리였다. 다만 목소리의 질은 전혀 달랐다. 차분하고, 부드럽고 신비한 느낌이 들었다.

“누구야.”
- 너희를 돕고 싶은 사람. 설령 보복을 당하더라도 넌 공주를 가장 우선시 하고 싶은가?
“어차피 마물들은 유리의 일이 아니더라도 세계를 멋대로 휘두를 거야. 비겁한 술책일 뿐이지. 유리를 우선시하고 자시고 따질 이유가 없어.”

목소리가 낮게 웃었다. 세이덴은 어쩐지 당해낼 수 없는 어른에게 놀림 받는 기분이 들어 얼굴을 찡그렸다.

“대체 뭐야?”
- 미안. 불쾌하게 만들 생각은 아니었어. 그렇다면 나도 약속하지. 너희들이 가는 길에 도움이 될 아이들을 보내줄게. 라인하트에서 만날 수 있도록.
“의심할 거야.”
- 괜찮아. 너희라면 알 수 있어. 그리고 넌 좀 더 솔직해져야겠구나.
“쓸 데 없는 참견이시군.”

목소리는 또다시 웃었다.

- 고마워. 저 아이를 지켜줘서.
“당신에게 감사 받을 일 아니야. 그러니까 누구냐니까. 나나 유리에가 아는 사람이야?”
- 그럴 거야. 사실 잘 모르겠지만.

모호한 대답에 대화가 이어지지 않았다. 더 따져들려고 했으나, 슬라링이 소란에 잠에서 깨자 목소리도 사라져버렸다. 세이덴은 별 일이 다 있다 생각하고 다시 잠을 청했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악몽은 꾸지 않았고, 악몽보다 지독한 현실의 또 다른 하루가 밝았다.

- 1장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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