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장. 이어지는 유지 - Lv. 7 └- [DQ] 천공의 레프리제

육지가 먼 시야에 나타났다. 그랑바니아의 환영을 본 이후, 유리에는 객실에서 좀처럼 나올 생각을 하지 않았다. 의지를 잃고 수도원에서 죽은 것처럼 살던 때처럼은 아니었으나, 깊은 생각에 잠겨 세이덴이 뭐라 말해도 좀처럼 깨질 않았다.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지 뻔했다. 세이덴은 마음의 준비를 하고 유리에가 먼저 말을 꺼내길 기다렸다.

“라인하트엔 안 갈래.”

오후 무렵엔 도착이었다. 내릴 채비를 하는 세이덴에게 드디어 유리에가 결론을 말했다. 세이덴은 시큰둥한 표정으로 대꾸했다.

“그렇게 말할 줄 알았지. 그리고 내 대답은, ‘안 돼’야.”
“레인과 라인하트를 위험에 빠트릴 순 없어.”
“위험에 처한다는 보장도 없지. 이번엔 네가 포기해. 난 널 라인하트에 데리고 갈 거야.”
“왜-”
“어차피 너, 이후에 뭘 할지에 대해선 생각 안 했잖아?”

정곡이었다. 유리에가 입을 다물고 주먹을 꽉 쥐었다. 애초에 목적은 ‘라인하트에 간다’였다. 멸망하고 마물들에 의해 지배당한 그랑바니아에 있어봤자 아무 것도 할 수 없기 때문이었다. 유리에의 입장에서 가장 가깝게 설정할 수 있는 목적이 형제국인 라인하트에 가는 것이었다.
세이덴은 가방의 입구를 가죽 끈으로 단단히 묶으며, 일부러 유리에를 보지 않고 말했다.

“네가 종국에 뭘 하고 싶은지는 모르겠지만, 스스로 움직이기로 결정한 이상 무력하게 쓰러져 있겠단 의미는 아닐 거야. 하지만 무엇부터 해야 하는지, 앞으로 뭘 해야 할지는 모르니까. 그러니까 라인하트에 가서 국왕을 만나겠다고 결정했겠지. 난 그 판단이 옳았다고 생각해. 설령 네가 국왕을 만나지 않더라도 넌 라인하트에 가야해. 나라를 잃고 거기에 표류중인 그랑바니아의 사람들을 위해서라도.”

세이덴은 가능하다면 자기 자신의 얼굴을 한 대 치고 싶은 자괴감에 이를 악 물었다. 왕족의 의무와 책임은 유리에를 궁지에 몰아넣는 수단이었다. 유리에가 가진 책임감과 성정을 알기에 가급적 꺼내고 싶은 말이 아니었다. 하지만 세이덴은 현실적인 상황을 외면해선 안 된다고 판단했다.
라인하트는, 라인하트의 국왕은 아군이었다. 그것도 현재의 유리에가 세이덴 자신보다도 더 힘을 의탁할 수 있고, 빌릴 수 있고, 나라를 일으킨다면 가장 큰 힘을 빌려줄 사람이었다. 쓸모없는 천공의 검 하나만 가진 채로 내쫓긴 유리에는 그렇기에 반드시 라인하트에 가야했다.

“도망치지 마. 묶어서라도 데려갈 거니까 그렇게 알아. 이번만큼은 안 돼.”

세이덴이 던지듯 내뱉고 방을 나갔다. 두 사람은 이후 한 마디도 제대로 나누지 않았다. 무거운 분위기의 두 사람 사이를 슬라링만 안절부절 못하고 지켜볼 뿐이었다.

“정박한다! 준비해!”

선착장이 가까워 배가 부산스러워졌다. 선착장이라지만 높게 쌓은 벽과 많은 감시 인원, 대포와 진을 친 병영의 모습으로 보아 감시 초소의 역할도 함께 하는 듯 했다.

“이상하네. 저건 왕국 근위병들인데. 무슨 일이지?”
“마지막 정기선이니 신경 쓰려고 온 거 아냐?”

배의 병사 몇 명이 선착장의 상황을 보고 나누는 이야기를 세이덴은 놓치지 않고 들었다. 자세히 살펴보니, 선착장에서 분주하게 움직이는 병사들과 달리 장비와 견장의 색이 다른 병사들 십여 명이 근방에 대기 중이었다. 라인하트에서 직접 나왔다면 이야기가 잘 풀릴지도 모른다 생각했다.
실었던 짐들을 먼저 내렸다. 세이덴도 먼저 내려 말과 마차를 빼냈다. 뒤이어 병사들 몇이 내리고, 그 뒤를 유리에를 포함한 승객들이 따랐다. 그리고 동시에 근위병들이 움직였다.

“유리스테아 왕자님이십니까?”

근위병들의 가장 선두에 선 자가 유리에를 가로막고 물었다. 세이덴이 아차, 하고 유리에에게 다가가려 했으나 근위병들 탓에 막히고 말았다.

‘마중 나온 건가?’

그런 것 치곤 분위기가 이상했다. 환영의 기색은 아니었다. 승객들과 병사들이 술렁거렸다. 유리에는 세이덴을 한 번 바라보고, 고개를 끄덕였다. 근위병들이 구령에 맞춰 경례를 했다.

“어서 오십시오, 왕자전하. 저는 라인하트의 근위대장 마르칼입니다. 모시러 왔습니다.”
“라인하트로 가는 겁니까?”

유리에가 묻자 마르칼은 잠깐 뜸을 들이고 침통한 목소리로 말했다.

“죄송합니다. 전하를 라인하트로 모시지 말라는 명이 있었습니다. 부디 실례를 용서하십시오.”

마르칼이 손짓하자 근위병 두 사람이 유리에의 양 팔을 붙잡았다.

“무슨 짓이야!”

세이덴이 근위병들을 밀치며 외쳤다. 마르칼이 세이덴을 날카롭게 노려보았다.

“네놈은 뭐냐?”
“내 몸이 성치 않아서 라인하트까지 시중으로 고용한 사람입니다! 그냥 보내줘요.”

세이덴 대신 유리에가 소리쳤다. 유리에의 의중을 이해하고 세이덴이 우격다짐을 멈추고 씩씩거렸다. 마르칼이 의심을 버리지 못하는 눈치이자, 유리에는 호흡을 가다듬고 엄하게 호통쳤다.

“그는 그랑바니아의 멸망 때 가족을 잃은 자다! 라인하트에 가족들이 생존해 있을 거라 믿고 온 사람이야. 너희의 목적은 나뿐이지 않은가? 내 국민을 욕보일 생각인가!”

곧이라도 쓰러질 것처럼 창백한 안색과 소녀라고 해도 믿을 만큼 여린 목소리의 왕자는 기백만큼은 왕가의 증명인 양 당당했다. 마르칼은 혀를 차고 근위병을 지시했다.

“전하를 모셔라. 그랑바니아에서 온 다른 사람들은 병사들을 따라 라인하트로 가라.”

세이덴은 부글거리는 분노를 억지로 삼키고 멀어지는 마르칼과 유리에를 지켜보다 마차에 뛰어 올랐다. 제지하려는 병사들을 무시하고 말을 몰아 라인하트를 향해 달려갔다. 마지막으로 시선을 마주친 유리에는, 동생을 부탁한다며 뭔가를 크게 각오한 유리스와 똑같은 얼굴이었다.

“어쩜 그렇게 똑같냐! 그딴 식으로 나한테 책임을 떠넘기지 말라고, 이 멍청한 남매!”

여기서 판단을 그르치면 유리에마저 잃을 것이란 예감이 들었다. 세이덴은 자신의 안일한 생각을 후회했다.

*

유리에를 실은 호송마차는 근위병들의 엄중한 감시 속에 라인하트와 정 반대 방향으로 나아가기 시작했다. 동승한 마르칼은 그 이후 유리에에게 말을 붙이지 못하고 쓰린 속만 달랬다.

천공의 용자가 살아있단 소문이 진실이어서 기뻤고, 그 실체가 이처럼 병약한 소년인 것이 실망스러웠고, 내키지 않는 명령을 받아 왕자를 사지로 이끄는 자신의 행동이 부끄럽고 참담했다. 어리고 약해보여도 그는 왕가의 사람이었다. 멸망해도 이제 한 나라의 이름을 짊어진 왕이었다. 국민을 모욕하지 말라던 일갈이 가뜩이나 깎여나간 마르칼의 자존심에 상처를 입혔다.

“근위대장.”
“예, 전하.”
“내가 어디로 가는지, 어떤 상황인지에 대해 설명해 주세요.”

왕자의 목소리엔 체념이 묻어있었다. 마르칼은 한숨을 삼키고 말했다.

“며칠 전에 해상에 나타난 어둠의 계시를 보셨습니까?”
“보았습니다.”
“그 계시 이후 제게 명령이 내렸습니다. 왕자님과 같은 인상착의의 사람이 정기선을 만약 타고 온다면, <죄의 탑>으로 모시고 가라고요.”

마르칼이 마차 문의 창을 내려 저편을 가리켰다. 지는 태양의 한쪽에 높게 솟아오른 검은 탑이 바다 근처 험준한 절벽 위에 세워져 있었다.

“저 곳엔 무엇이 있습니까?”
“원래는 말 그대로 죄인을 수감한 감옥이었습니다. 그리고 지금은, 그랑바니아 멸망 이후 라인하트를 노리는 마물들의 거점이 되었습니다.”

마르칼은 더 말을 잇지 않았다. 더 이상 무슨 설명을 해야 한단 말인가?
유리에는 눈을 감고, 조금 뒤 담담한 목소리로 물었다.

“그건 국왕의 결정인지요?”

명령이 내려왔을 때, 마르칼은 생각했다. 이건 분명 아니라고. 이런 명령을 국왕이 내릴 리가 없다고. 이 임무는 은밀하게 진행되어야 한다던 상관의 모습에서, 마물들과 끝까지 맞서 싸우는 한이 있더라도 그랑바니아를 버려선 안 된다며 난민들을 받아들이던 국왕의 의지는 어디에도 없으리라고.

“저는 아니라고 확신합니다.”

왕자는 희미하게 웃었다. 이제 갓 성인이 되었을까 싶은데, 두려움도 없이 의연한 모습이었다.

“그래요. 고맙습니다.”

마르칼은 평생 저 얼굴만큼은 기억에 남겠다는 확신에 마음이 울적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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