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앵귀/이바x치즈루] 세한(歲寒)에 - 2 글과 그림

[박앵귀/이바x치즈루] 세한(歲寒)에 - 1


2.

콘도의 급사이자 말단 대사, 소마와 노무라는 머리를 맞대고 고민에 빠져있었다. 이들은 방금 전 아주 무서운 사람을 통해 오금저린 말을 들은 참이었다. 신선조의 칼이란 별명은 검 솜씨도 솜씨지만, 말로도 사람을 죽이는 게 가능하기 때문에 붙여진 것이 아닐까 싶었다. 오키타는 방으로 돌아가기 전, “후배가 들어와서 좋겠네. 그렇다면 선배의 위엄을 보여줘야겠지? 내일 회합에서 이바 군이 실수라도 저지른다면 제대로 못 가르친 두 사람 탓이려나. 지금부터 열심히 들볶아야겠네.”라며 어딜 봐도 제대로 못 가르치면 경을 치겠다는 암시를 남겼다.

“하지만 상대는 이바 씨라고? 쇼군 직속 근위대라고?”
“그 정돈 나도 안다, 노무라.”
“급사라곤 해도 내일 회합 때 한정이지. 우리가 이바 씨한테 이거 해라 저거 해라 그렇게 부릴 수 있을 리가 없잖아!”
“나도 안다니까.”

진퇴양난이었다. 회의에서 비실이로 낙인찍힌 데다 급사 수행역도 반려 당했다. 거기에 불만을 말할 처지는 못 됐다. 그간 간부들에게 혹독하게 수련 받고, 치즈루에게서 급사일도 배우고 있었지만, 신선조 대사로 한 사람 몫을 하냐면 자신 있게 대답할 수 없었다. 그러니 외부인이어도 실력이며 위치 어느 쪽도 확고한 이바가 모두에게 인정받는 것도 당연했다. 소마는 굴욕과 패배감보다도 자신이 한심해서 견딜 수 없었다.

“큭, 이렇게 된 이상 나도 귀신 부장처럼 무서워지겠어! 급사 역할까지 추월당할 순 없지!”

노무라는 자포자기하며 결의를 다졌다.

“소마 군, 노무라 군.”

다른 대사들과 이야기를 마치고 이바가 반갑게 웃으며 다가왔다. 

“내일까지의 임시직이지만, 많은 지도 편달 부탁합니다. 치즈루와 두 분은 제 선배니까요.”

너무나 살갑게 말하니, 기세등등했던 노무라의 전투의지가 파스스 식어버렸다.

“어, 그, 네.”
“노무라. 귀신 부장처럼 무서워진다며.”
“아니…… 역시 난 무리야. 안 돼. 못 해. 흑, 못 한다고.”
“왜 그러시나요?”
“죄송합니다아아아아! 미안, 소마!”

노무라는 울상으로 소리치고 도망 가버렸다. 이바가 영문을 몰라 어리둥절했다. 소마는 아득한 기분을 애써 추슬렀다.

“선배라니 가당치도 않습니다. 저희도 미숙한 몸, 뭔가를 가르쳐 드릴 역량은 되지 못합니다. 유키무라 선배가 잘 가르쳐 주실 겁니다.”
“그런가요? 아쉽네요.”

그렇게 말하는 이바의 목소리나 표정엔 아쉬워하는 기색이 없었다.
전혀.
소마는 눈앞의 사람을 좀 배려해줬으면 하는 참담함을 느꼈다. 누가 봐도 일목요연했다. 노무라처럼 둔한 녀석을 제외하곤, 이바가 신선조 둔소에 자주얼굴을 내 비추는 이유도, 이번 일을 받아들인 결정적인 이유도 모두 단 한 사람 때문임을 알고 있으리라.

“이바 씨. 잔 정리를 도와주시겠어요?”
“네! 지금 갈게요.”

소마는 쓸쓸한 기분으로 함께 강당의 찻잔을 정리하는 치즈루와 이바를 일별하고 힘없이 노무라의 뒤를 쫓아 나갔다.
치즈루가 걱정을 담아 물었다.

“그렇지만 정말로 괜찮으세요? 급사라고 해도 별 대단한 일은 아닌데요.”
“작은 일이라도 토시 씨와 신선조를 도울 수 있다니 기쁩니다. 그리고-”
“그리고?”
“이렇게 신선조 대사님들과, 또 치즈루와 함께 둔소에서 시간을 공유할 수 있으니까요. 마치 제가 신선조가 된 느낌이 들어서 좋아요.”

온 몸으로 행복한 기운을 발하는 이바의 모습에 치즈루는 눈만 몇 번 깜박이다가 살풋 웃었다. 마치 꿈꾸는 아이 같다고 생각했다.

“이바 씨는 하나도 변하지 않았네요.”
“그런가요?”
“전부 기억나는 건 아니지만, 어릴 때에도 지금처럼 웃던 분이셨던 것 같아요.”

이바는 허를 찔려 쑥스러워했다. 얼굴을 살짝 붉히고 시선을 살며시 외면하는 그 모습에 치즈루는 괜히 이상한 말을 했나 싶어 당황했다.

“제 느낌일 뿐이니 너무 신경 쓰지 마세요. 그, 그보다도 산난 씨께 차를 가져다 드려야겠네요.”
“제가 하겠습니다. 지금은 제가 산난 씨의 급사니까요. 치즈루 선배. 산난 씨가 어떤 차를 좋아하는지 알려주시겠어요?”
“아이 참, 선배라고 부르지 마세요.”
“선배 맞잖아요.”
“읏, 정말.”

두 사람은 어색하지만 묘하게 달짝지근한 공기를 만들며 정리한 찻잔을 들고 갔다. 먼저 나와 마당에 모여 있던 간부 몇이 그 모습을 보더니 웃기도 하고, 넌더리내기도 했다.
해질녘, 이바는 치즈루와 함께 저녁당번인 이노우에 겐자부로의 일을 도왔다. 좋은 집안 출신이라 잡일과는 연이 없는 줄 알았더니, 시키는 일이며 시키지 않은 일도 척척 잘 해냈다. 기본적으로 영리하고 일머리가 있기 때문이라며 이노우에가 칭찬했다. 이바는 산난과 정확한 계획을 상담할 겸, 하루 신선조 둔소에서 묵기로 하였으므로 저녁 식사도 함께 했다.

“꼭 에도에 있을 때로 돌아간 기분입니다.”

이바가 감격해 말했다. 치즈루가 기억을 더듬어 물었다.

“그러고 보니 이바 씨는 신선조 분들과 에도에서부터 알고 지냈다고 하셨죠.”
“네. 그 땐 이렇게 자주 이렇게 모여서 식사를 하곤 했었어요. 신파치 씨와 헤이스케 군이 반찬을 가지고 싸우는 모습도, 사이토 군이 두부를 좋아하는 것도 변함이 없네요. 그리 오래된 일도 아닌데 하염없이 먼 옛날의 기억처럼 느껴집니다.”

치즈루는 이바가 대사들과 어울리는 모습이 무척 잘 어울린다고 생각했다. 같은 막부의 신하로 있는 몸이지만, 이바와 신선조 사람들은 서 있는 위치가 서로 달랐다. 그럼에도 양쪽은 서로를 진정한 무사로 인정하며 받아들였다. 신기했다. 어쩌면 상식적으로 그림이 맞지 않는다고 하는 편이 맞는지도 몰랐다. 어떤 계기가 있었을지 궁금했다.

“언젠가 제게 들려주시지 않겠어요? 이바 씨가 신선조 분들과 친해진 이야기요.”
“그럼요. 물론이에요.”

이바가 기쁘게 웃었다. 청한 건 자신인데, 왜 이바 씨가 이렇게 기뻐하는 걸까? 이유는 알 수 없었지만, 가슴이 따듯해지는 느낌에 입술이 절로 달을 그렸다.


식사를 마치고 히지카타가 산난을 찾았다. 산난은 그가 찾아올 걸 알고 있었던지, 불편한 기색을 보이지 않고 방으로 들였다. 독서대를 물리고 방석을 내어주자 히지카타는 편히 자리해 앉았다. 

“아까 일로 하고 싶은 말이 있습니까? 불만 정도는 들어드리겠습니다만.”
“아니. 대수롭지 않은 일이니까. 하치로 녀석, 뭐가 그리 좋은지 꼬릴 흔들고 있고. 보나마나 에도에 있을 때 생각이 난다느니 신선조의 사람들이 좋다느니, 부끄러운 줄도 모르는 소리나 하고 있겠지. 이번엔 유키무라 탓도 있나?”
“히지카타 군은 언제나 이바 군에게 약하군요. 뭐어, 대부분의 대사들이 그럴 테지만요.”
“남의 말 하듯 하긴. 당신도 마찬가지잖아.”
“들켰군요.”

히지카타가 픽 고소를 지었다. 산난도 작게 쿡쿡거리며 웃다가 표정을 차분하게 가라앉혔다.

“이바 군은 히지카타 군과 많이 닮았어요.”
“무슨 소리야.”
“물론 그는 신선조 대사들과는 차원이 다른 인격자니까. 성격만 본다면 히지카타 군에게 빗대는 게 미안할 정도죠. 언제나 자신에게 바른 길을 무던히 추구해 나간다는 맹목적인 점이 닮았다고 생각합니다. 순수하단 의미에서.”
“산난 씨도 하치로에게 낯부끄러운 말 하는 병이 옮았나. 적당히 좀 봐줘.”
“그래서 한 번 정도는 크게 상처 입는 모습을 보고 싶기도 합니다.”

의외로 짙은 냉소를 담은 말이었다. 무슨 의미냐고 묻는 히지카타의 시선을 산난은 부드럽게 흘렸다. 눈을 마주치지 않고, 왼팔을 내려다보며 말했다.

“잃어봐야 아는 이치도 있지요. 저는 히지카타 군이나 이바 군이 그 때 어떤 선택을 해나갈지 궁금할 뿐입니다.”

히지카타는 산난을 강한 시선으로 노려보다, 한숨을 쉬고 구시렁거렸다.

“당신 정말 성격 나쁘구만.”
“그렇습니까? 유키무라 군은 절 다정하다고 하던데.”
“유키무라도 하치로 마냥 사람이 좋을 뿐이잖아. 아니, 변변찮은 이야긴 됐어.”

히지카타가 손을 휘휘 내젓고 말을 돌렸다.

“그래서 어떻게 생각해? 쿠리야마 오오타로.”
“어라, 국장의 의견에 동의하지 않았습니까.”
“콘도 씨도 한 번 고집 피우면 도-무지 들어먹질 않으니까 말이야. 당신이 굳이 나서겠다고 할 정도면 뭔가 불안요소가 있기 때문일 거라 생각했어.”

산난이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지금 같은 정황에 머리가 잘 돌아가는 상인이 굳이 막부에 붙어 있을 이유는 어딜 봐도 없습니다. 간자일 확률이 높다고 생각합니다.”
“그런가. 당신이 그렇게 생각했다면 맞겠지. 회합장 근처 눈이 닿지 않는 곳에 언제든지 돌입이 가능하도록 대사들을 배치해 두겠어. 무슨 일의 전조가 있다면 유키무라든 하치로든 내보내서 알려줘. 이야기는 이 뿐이야. 귀찮다니까, 정말.”

산난은 히지카타의 투덜거리는 말 속에 담긴 깊은 사려와 걱정을 읽었다. 이바와 치즈루를 사람 좋다며 뭐라 할 처지가 아닐 텐데, 본인은 한사코 아니라는 양 구는 모습에 기가 찼다. 콘도의 입장을 생각해 대사들을 저어하는 양 굴었어도 결국 자신이 모든 걸 뒤집어 쓸 각오였다. 허긴, 언제나 그랬지 않던가. 그것이 히지카타가 선택한 자신의 역할이었다. 산난 자신 역시 해야 할 역할을 선택해 이 자리에 남았다. 덧붙일 말도 필요 없었다.

“산난 씨. 차를 가져왔습니다.”

문 밖에서 이바의 목소리와 인기척이 들렸다. 허락하자 이바는 품위 있는 걸음걸이로 들어와 산난에게 차와 과자를 내어주었다. 급사 일을 즐기는 듯 보이는 이바와 임시 급사를 너무나 만족스러워 하는 산난. 히지카타는 더 이상 여기 있어선 안 되겠다 판단하고 방을 나왔다. 문 바깥에서 안쪽의 상황을 훔쳐보던 치즈루가 히지카타를 향해 어색하게 웃으며 고개를 숙였다. 반대편 기둥 너머에는 이바와 친한 대사 몇이 궁금증을 참지 못하고 역시나 훔쳐보려 옹기종기 모여 있었다. 신선조의 귀신 부장은 그날 몇 번 째 인지 알 수 없는 큰 한숨을 내쉬었다.


산난은 이바에게 회합일 당일 해야 할 일에 대해 일러주고, 나찰대의 밤일까지 도울 필요는 없으니 이만 쉬라며 보내주었다. 이바가 산난의 방을 뒤로 할 무렵, 차가운 밤하늘을 쌀알 같은 싸리 눈이 유영하기 시작했다. 바닥에 떨어지는 눈 몇 송이를 따라 시선을 옮기자, 복도 가까운 계단에 치즈루가 앉은 모습에 닿았다. 이바가 놀라 다가갔다.

“치즈루. 추운데 왜 여기 있어요? 설마 절 기다려 준 겁니까?”
“조금 신경이 쓰여서…… 오래 기다린 건 아니에요.”
“산난 씨의 방에 들어간 지 반 각은 지났지 않습니까. 맙소사, 이렇게 차가워져선. 어서 방으로 돌아가요. 데려다 드리겠습니다.”

이바가 치즈루의 차갑게 얼어붙은 손을 자신의 손으로 비비듯 어루만지고 일으켜 세웠다. 이바가 미안함을 가득 담아 사과했다.

“괜한 걱정을 끼쳤군요.”
“아니에요. 멋대로 기다렸을 뿐인 걸요. 산난 씨와 이야기는 잘 하셨어요?”
“예. 내일 맡은 소임을 잘 할 수 있을지, 불안이 없다면 거짓이지만요.”

두 사람은 둔소의 복도를 평소보다 조용하고 느린 걸음으로 걸었다. 어둠이 내리고 대사들의 왁자한 소리도 끊겨, 완연한 밤에 잠긴 서본원사는 다른 세상에 온 마냥 청정한 분위기가 감돌았다. 소리 없이 나리는 눈이 정결을 더했다. 이바도, 치즈루도 어쩐지 그냥 방으로 돌아가 쉬기에는 아쉬운 기분이 들었다. 조금 더 이야기를 하고 싶었다. 

“이바 씨.”
“치즈루.”

치즈루의 방 문 앞에서 두 사람이 동시에 서로의 이름을 불렀다.

“먼저-”
“먼저……”

또 동시에 배려하려다 말문이 막혔다. 웃음이 터진 것은 그 다음의 일이었다. 이바는 치즈루가 먼저 이야기하길 바라며 웃고만 있었다. 그 다정함이 주는 안도감에 치즈루는 편한 마음으로 말했다.

“이바 씨가 오늘 둔소에 계시니까 다른 대사님들이 무척 기뻐해 주셨어요. 그간 분위기가 어두웠거든요. 와주셔서 감사합니다. 뭐라고 감사를 드려야할지 모르겠어요.”

정중하게 고개를 숙여 인사했다. 이바는 이어질 말을 기대했지만, 더 이상 나올 여지가 없자 섭섭하게 웃었다. 아쉬움의 싹을 숨기지 않고 짓궂음을 담아 물었다.

“치즈루 선배는요?”
“네?”

질문이 그렇게 돌아올 줄은 예상 못했는지 치즈루가 당황했다.

“저는…… 그…… 물론, 저도 기뻐요.”

치즈루의 얼굴에 확 얼굴에 열꽃이 피었다. 치즈루는 자신이 그 말을 하는 데 왜 그렇게 부끄러운 기분이 드는지, 목 뒤며 귀까지 화끈거리는지 영문을 몰랐다.
아마도 추위 때문이겠거니. 차가운 곳에 오래 나와 있었기 때문이겠거니. 자신을 바라보는 이바의 유독 애틋한 눈빛도, 시선에 안겨있는 기분이 드는 것도, 마치 사랑스러운 연인을 보는듯한 표정도, 겨울 밤 흐릿한 빛과 열기에 착각한 것이겠거니.
짧은 정적의 시간동안 치즈루는 마음 깊은 곳에서 비집고 나오려는, 인정하고 싶지 않고 정체를 알고 싶지 않은 어떤 감정에 필사적으로 이유를 붙여 나오지 못하도록 막았다. 지금은 그렇게 해야 할 것만 같았다.

“감기 걸리겠어요. 어서 들어가세요.”

혼란의 빛이 역력한 치즈루를 이바는 최후의 최후에서 배려해주었다.

“안녕히 주무세요.”
“잘 자요.”

치즈루가 안도하며 방으로 들어간다. 이바는 그 모습을 끝까지 지켜보고서야 자신의 잠자리로 향했다. 작게 남은 미련과 아쉬움을 털어내고, 평소와 다른 공기와 분위기 속에서 휴식을 청했다. 밤중에 흩날린 싸리 눈은 다음 날 아침에는 내린 흔적 하나 남기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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