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앵귀/이바x치즈루] 세한(歲寒)에 - 3 글과 그림

[박앵귀/이바x치즈루] 세한(歲寒)에 - 2


3.

일찍 눈이 떠진 탓에 치즈루는 둔소의 상황을 볼 겸, 아침 식사 준비를 도울 겸 밖으로 나왔다. 문을 열자마자 피부를 날카롭게 찌르는 한기가 느껴졌다. 한동안 좋은 날씨더니, 어젯밤 날린 눈 때문인지 부쩍 추워졌다. 치즈루는 옷자락을 잘 여미고 부엌으로 향했다. 훈기가 감도는 실내에 아침 당번 대사들이 분주히 움직이고 있었다.

“좋은 아침입니다. 도와드리러 왔어요.”

치즈루가 씩씩하게 아침인사를 했다. 불가에 서 있던 두 사람이 돌아보고 마주 인사해주었는데, 본래 아침 당번인 사이토, 다른 한 사람은 이바였다.

“이바 씨! 더 쉬시지 그랬어요.”
“신입이 눈치 없게 그럴 순 없죠.”
“또 그런 말씀을……”
“실은, 사이토 군이 요청했습니다.”

치즈루가 사이토를 돌아보자 그는 냄비의 된장국에서 시선을 떼지 않고 대답했다.

“오늘 함께 당번을 맡은 소마와 노무라가 새벽부터 총장의 심부름을 나갔다. 하치로가 일찍 일어난 참이기에 손을 빌려 달라 청했을 뿐이다.”
“두 사람이 산난 씨의 심부름을요? 드문 일이네요. 아, 아무튼 저도 도울게요!”
“큰 도움 감사한다. 유키무라, 하치로.”

이런저런 일 모두 잘하는 것처럼 보이는 이바도 요리만큼은 해 볼 엄두가 나지 않는지, 사이토나 치즈루의 지시에 따라 잡무를 도왔다. 세 사람을 주축으로 다른 대사들이 여럿 손을 도와 늦지 않게 아침 식사가 준비됐다. 강당에 모인 대사들은 갑자기 훅 떨어진 기온에 어젯밤 보다는 움츠러들어 얌전한 기색이었다.

“하치로! 밥 다 먹으면 대무 같이 해주라!”

추위에 전혀 기죽은 기색 없는 나가쿠라 신파치가 화통한 목소리로 청했다. 아직도 졸린 표정이 역력한 토도 헤이스케는 몸에 밴 습관처럼 나가쿠라의 말에 딴죽을 걸었다.

“신팟쯔앙은 하치로만 보면 대무 못해 죽는 귀신이 붙었단 말이야. 너무 받아주지 말라고. 하치로가 청하는 대로 받아주니까 버릇 나빠지잖아.”
“뭐야, 이 새파랗게 어린놈이 못하는 소리가 없구만.”
“검술 바보한테 어린 애 취급 받고 싶지 않네요.”

투닥거리기 시작하는 두 사람을 이바가 말렸다.

“신선조의 검술 대련은 무척 도움이 되니까요. 저라도 괜찮으시다면 함께 하겠습니다.”
“저녁부터는 콘도 씨와 산난 씨의 수행도 있으면서. 아침부터 너무 힘 빼는 거 아냐?”

헤이스케는 정말로 걱정된단 어조였다. 이바가 괜찮다는 의미로 웃어보였다.

“몸을 움직여 두는 편이 나중을 생각해서도 좋습니다. 너무 무리는 하지 않을게요.”
“하치로가 괜찮다면 상관없지만.”

어차피 급사로 부릴 사람은 오후에나 눈을 뜰 상황이니 그동안은 별 문제가 없을 터였다. 치즈루가 시선으로 정말로 괜찮으냐며 이바의 얼굴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이바는 괜찮다며, 상대를 안심시키는 눈웃음으로 화답해주었다. 그 모습을 보던 나가쿠라가 헤이스케에게 붙어 작은 목소리로 물었다.

“어째 저기만 분위기가 좀 다른데?”
“……신팟쯔앙 정-말 남 어린애 취급할 때가 아니거든. 보면 알잖아?”
“뭐가.”
“그동안 하치로를 봐 왔으면서 모른다는 게 어떤 의미론 대단하다.”

하라다 마저도 어이가 없어 쯧쯧 혀를 찼다. 나가쿠라는 이유는 모르지만 바보취급 당했단 상황에 폭발 직전까지 몰렸으나, 불행인지 다행인지 퍼뜩 상황을 깨닫고 어억! 괴상한 비명을 질렀다.

“그런 거였어?!”
“그런 거였어. 그러니 너무 방해하지 말라고. 눈치 없게.”
“아, 아하핫, 핫! 미, 미안. 그, 그래. 그랬었군. 하치로! 미안하다! 대무는 다음 기회로 미루자! 생각해보니 내가 할 일이 있었네. 하하!”
“우와, 왕 어색.”

갑작스런 나가쿠라의 대무 파토에 이바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의아해 했다. 나가쿠라는 이바와 차마 시선을 마주치지 못하고 후다닥 강당을 나가버렸다.

“무슨 일이 있으신 걸까요. 많이 급해 보이시네요.”
“그렇군요. 음, 그럼 남은 시간은 치즈루 선배의 일을 도와야겠네요. 소마 군과 노무라 군도 없으니 무엇이든 시켜만 주세요.”

치즈루는 아직도 이바에게 잡무를 도와 달라 부탁해도 될지 확실히 결정하지 못한 눈치였지만, 힘든 검술 대련보다는 체력을 덜 뺏기지 않을까 싶어 그러겠다고 수긍했다. 거절한다고 이바가 들을 사람이 아니라는 건 그간의 경험으로 잘 알고 있었다.
식기 정리와 설거지, 둔소 내 청소와 대사들에게 차를 내주는 등, 잘게 손 가는 일을 두 사람은 함께 했다. 주간 순찰조를 배웅하자 이제 한시름 놓을 시간이었다. 치즈루는 아직 돌아오지 않은 소마와 노무라가 걱정되는지 입구에서 영 발을 돌리지 못하고 서성거렸다.
어제 회의 때 이야기로 꽤 풀이 죽은 두 사람이었다. 치즈루는 그들이 평소에도 얼마나 많은 노력을 하고 있는지 잘 알고 있었다. 단지 신선조에서 지낸 시기가 오래지 않아 경험의 문제일 뿐, 착실히 실력을 쌓아 나간다면 누구보다도 멋진 대사가 되리라 믿고 있었다. 이바가 치즈루를 위로했다.

“산난 씨가 못 할 일을 맡겼다곤 생각하지 않아요. 토시 씨도, 오키타 군도, 산난 씨도 가혹하게 말했지만, 그들이 정말 가망이 없고 약한 사람이었다면 애초에 말도 꺼내지 않았을 거라 생각합니다.”
“이바 씨 말이 맞아요. 선배인 제가 너무 불안해하면 안 되겠죠.”

치즈루는 약해지는 마음을 질책해 다잡고 풀이 죽었던 등과 어깨를 폈다. 금방 떨쳐내고 이겨내는 치즈루를 이바는 복잡한 심정으로 응시했다.
어릴 적, 자주 울고 하치로 오빠, 오빠, 하고 부르며 자신의 손을 잡고 따라다니던 어린 소녀의 모습은 없었다. 치즈루 본인은 기억도 못할 먼 예전의 일이지만, 이바에게는 어제 일처럼 생생히 떠올릴 수 있는 기억이었다. 자신은 치즈루를 지키기 위해 강해지려고 했는데, 정작 치즈루는 단단하고 곧은 사람이 되어 온정과 사랑을 베풀며 살아가고 있었다. 그런 점 모두를 포함해서 치즈루가 좋았지만, 서운한 감정이 생기는 것도 어쩔 수 없었다.
치즈루가 자신을 필요로 해주고, 찾아주고, 의지해주는 짧은 순간순간이 기뻤다. 얼마든지 의지해 달라고, 필요로 해 달라고, 지킬 수 있게 해 달라 하여도 결국 자신만의 욕심이었다. 정말로 마음이 강한 치즈루에게 욕심을 들이밀어 곤란하게 만들고 싶지는 않았다.

“저도 더 노력해야겠습니다.”
“이바 씨가요? 정말이지, 어디까지 더 강해지고 싶으세요.”

치즈루가 맑게 소리 내어 웃었다. 세한(歲寒)에도 꺾이지 않는 눈부신 미소였다.

‘당신이 주저 없이 나를 선택해줄 때 까지요.’

이바는 말이 되지 못한 말을 상념으로 되뇌었다.

“이른 아침부터 익숙지 않은 일 하시느라 피곤하시죠? 신년순회 준비 전 까지 쉬세요. 잠깐 눈이라도 붙이시면 저녁에 움직이기 수월하실 거예요. 제가 깨워드릴게요.”
“치즈루 선배는요?”
“저는……”

치즈루는 쉴 생각이 없어보였다. 이런 일에 거짓말을 하지 못하는 성격도 사랑스럽다.

“안 돼요. 남 생각만 하곤. 치즈루 선배도 함께 가는 자리란 걸 잊어버렸는지요? 선배야 말로 쉬어두세요. 그렇지 않으면 저도 안 쉴 테니까.”
“아니, 그게-”

치사한 전법이지만, 치즈루에게는 이 정도로 충분하리라. 치즈루는 작게 앓는 소리를 내더니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였다.

“아, 알겠어요. 저도 들어가 쉴 테니까, 이바 씨도 꼭 쉬어주세요.”

치즈루는 단단히 약조를 받고서야 방으로 돌아갔다. 이바도 치즈루와의 약조는 깰 맘이 전혀 없었기 때문에 방으로 돌아와 잠시나마 눈을 감고 긴장을 내려놓았다. 잠은 오지 않았기에 고요한 공기 속에서 들뜬 몸와 정신을 정리했다.
어제 저녁 들었던 산난의 계획은 상당히 위험을 감수해야 하는 일이었다. 소마와 노무라는 분명 그 준비를 위해 나갔을 것이다.

- 벨 수 있겠습니까?

산난의 질문이 돌이켜졌다.

- 이바 군은 사람을 죽일 각오로 벤 적은 없지요? 쿠리야마 오오타로가 삿초의 간자이며, 만약 위험한 행동을 한다면 어쩌겠습니까. 때에 따라서는 베어야 할지도 모릅니다. 그럴 수 있겠습니까?

물론 베리라 말은 했지만, 마음속에 남은 방황과 불안을 파악하지 못할 산난이 아니었다. 산난은 부드러운 언사로 말을 거두었다.

- 괜찮겠지요. 고민할 수 있을 때 충분히 고민해 두세요. 누군가를 죽이려고 칼을 휘두른다면, 그 의미만큼은 자신에게 부끄럽지 않도록 하시길. 이번 회합은 칼부림이 나야할 만큼 가치롭지는 않을 것이라 생각합니다.

언젠가 누군가를 죽이기 위해 칼을 휘두른다 할지라도, 그 의미만큼은 부끄럽지 않도록. 그리고 망설이지 않도록. 이바는 깊게 의지를 새겨 넣었다.


해질녘이 되어 저녁 순찰조가 막 돌아올 쯤, 콘도와 산난, 치즈루와 이바는 외출 준비를 마쳤다. 다른 간부 대사들의 배웅을 받고 둔소를 나섰다. 소마와 노무라는 그 때 까지도 돌아오지 않았다.
네 사람은 쿠리야마가 회합 장소로 준비한 호수관(呼水館)으로 향했다. 호수관은 기온 중심가에서 조금 떨어진 큰 규모의 고급 여관으로, 쿠리야마 오오타로가 오늘을 위해 관 전체를 빌렸다고 했다. 지리에 밝은 이바가 등롱을 들고 앞서 걸어 세 사람을 인도했다.
도착할 쯤부터 영롱한 음악 소리와 왁자한 목소리가 들렸다. 쿠리야마가 초대하여 회합에 참가하는 사람들의 제법 많은 수가 이미 도착한 듯 했다.

“이거 우리가 좀 늦었나보군. 자, 자. 산난 군, 유키무라 군, 이바 군. 들어가세.”

콘도는 아무런 불온 없이 왁자한 분위기에 적잖게 안심하고선 여관으로 들어갔다. 종업원이 네 사람을 안내하여, 중정을 누각처럼 낀 가장 큰 방으로 안내해 주었다. 그 곳 외의 작은 방이 손님들이 데려온 급사 대기 장소였다. 회합이 정식으로 시작되면 인사를 비롯해 여럿 깊은 이야기가 오갈 것이므로, 급사들은 주연이 무르익기 전 까지는 그곳에서 기다려달란 안내를 받았다.

“그럼 이바 군. 뒷일을 잘 부탁합니다.”

산난이 이바를 돌아보며 말하고 콘도와 함께 큰 방으로 들어갔다. 종업원이 돌아가자, 복도에는 두 사람만 남았다. 두 사람은 회합장 옆의 방으로 들어가 회합장과 이어지는 벽 근처에 자리를 잡았다. 콘도가 마지막 손님이었는지, 곧 음악과 떠들썩한 소리도 잠잠해졌다. 쿠리야마 오오타로 주관의 신년회합이 시작했다.

“실례합니다. 차를 가져왔습니다.”

그 때 문 밖에서 조심스러운 목소리가 들렸다. 치즈루는 목소리가 낯설지 않다고 생각했다. 이바가 문을 열자, 종업원용 겉옷을 입고 두건을 쓴 소마가 차 쟁반을 든 채로 서 있었다. 소마는 이바의 얼굴을 확인하자마자 주변을 휘휘 돌아보더니 황급히 방 안으로 들어왔다. 치즈루가 놀람과 반가움에 몸을 일으켰다.

“소마 군!”
“쉿. 목소리를 낮춰주세요.”
“어떻게 소마 군이 여기에 있는 거야? 그 모습은?”

모습을 지적당하자 소마는 부끄러워하며 머리에 쓴 두건을 우선 벗었다.

“총장의 지시가 있었습니다. 이곳 호수관에 먼저 잠입해 몇 가지 사항을 알아보라고요. 회합 준비 때문인지 일손이 부족하다고 해서…… 어쩌다보니 이런 방식이 돼 버렸습니다.”
“으응. 아니야. 좋은 시도였다고 생각해. 노무라 군도 함께 있어?”
“네. 지금 다른 쪽을 조사하고 있습니다. 일찌감치 움직인 덕에 탈출로도 확보해 두었고요.”

이바가 바깥의 정황에 긴장하며 낮은 목소리로 물었다.

“경비는 어느 정도 됩니까?”
“저와 노무라가 파악하기로는 내부에 여섯, 여관 주위에 넷이 2인 2조로 순찰하고 있습니다.”
“많은 숫자는 아니군요.”
“총장께서 예상한 범주입니다.”

그렇다면. 이바와 소마가 서로 마주보고 입을 다물었다. 그들 사이에 무거운 긴장이 감돌았다. 소마가 먼저 침묵을 깼다.

“회합장에 들어가는 식재나 술에는 별 문제가 없었습니다. 다만, 쿠리야마 오오타로가 개인적으로 가져온 물건까지는 조사할 수 없었습니다. 서양의 축하주를 따로 준비했다고 합니다.”

치즈루는 두 사람이 공유하고 있는 일이 무엇인지 전부 알 수는 없었지만, 소마의 그 말에서 전말을 짐작했다.

“독?”

이바가 소마 대신 대답했다.

“산난 씨의 예상으로는 그렇습니다. 쿠리야마 오오타로는 무사가 아닙니다. 무사의 도리를 받아들였거나 칼을 쓰는 사람이 아니니, 만약 정적을 제거하고자 한다면 폭력적이지 않은 수단을 이용할 거라 말씀하셨어요. 때문에 소마 군과 노무라 군을 먼저 보내어서 그 부분을 조사해보라 지시하셨겠지요.”
“축하주라면 모두가 함께 마시게 될 텐데요.”
“지금은 가능성의 문제일 뿐입니다.”

회합장에선 참석자들이 각자 신년 인사와 소개, 포부를 나누고 있었다. 주연이 시작되지 않았으니 아직 의심스러운 술이 나올 상황은 아니었다. 이바는 눈을 감고 생각에 잠겼다가 소마를 돌아보았다.

“소마 군. 저는 지금부터 내부의 정황을 알아보러 갑니다. 주연이 시작되면 치즈루를 콘도 씨 쪽으로 보내주세요.”
“알겠습니다. 선배에 대해선 맡겨주십시오.”

이바와 소마는 자신들이 이곳에서 해야 할 일을 명확하게 알고 있었다.

“제가 할 일을 말해주세요.”

치즈루는 자신만이 배제되어선 안 된다는 의지를 담아 이바와 소마에게 말했다. 소마는 중요한 일을 들킨 사람처럼 쩔쩔맸지만, 이바는 치즈루의 눈동자를 곧이 받아들이고 응했다.

“산난 씨는 당신에게는 알리지 않는 편이 낫다고 하셨습니다만, 당신이 걱정으로 마음 아파하게 두고 싶진 않으니까요.”

이바가 맡겨진 소임에 대해 알려주자 치즈루는 크게 놀라 말리려고 했다. 산난이 생각할 법한 일이었다. 하지만 부담이 너무 크다고 생각했다. 어쩌면 목숨을 잃을지도 몰랐다.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고 신선조의 판단 실수일 수도 있었다. 그럼에도 쉽게 받아들이기 힘든 일이었다.

“너무 위험해요! 이바 씨 혼자 가셨다가 큰일이라도 난다면-”
“확률은 반반입니다. 정말로 위기가 오면 뒤도 돌아보지 않고 도망치겠다고 약속할 게요.”
“유키무라 선배. 이바 씨의 실력은 신선조 간부님들도 인정하지 않습니까. 분명 무사하실 겁니다.”

소마가 이바를 두둔하고 나서자 더 이상 말리기도 어려워진 치즈루는 애써 불안을 가라앉혔다.

“알겠어요. 조심하세요. 저는 주연이 시작되면 반드시 콘도 씨를 곁에서 지키겠어요.”

이바는 대답 대신 치즈루의 머리를 살며시 쓰다듬었다. 그가 이런 행동을 할 때 마다 치즈루의 가슴에서 그리움이 불쑥 솟아오르곤 했다. 제가 있으니 안심하세요, 라고. 언어 없이 의미를 알 수 있는 솔직한 표현이었다. 이바는 그러고서 미련 없이 방을 나갔다.
이바가 나가고서 얼마 뒤 다시 회합장이 시끄러워졌다. 소마가 주연이 시작됐을 거라 일러주었다. 주연 때는 수행하는 급사들도 참가할 수 있었으므로, 치즈루는 소마의 안내를 받아 회합장에 들어섰다.
넓은 방에 좌석이 열다섯, 그 뒤로 급사들의 자리가 또 몇 개, 가장 상석이 쿠리야마의 자리였다. 치즈루가 콘도의 뒤에 마련된 자리에 앉았다. 치즈루가 무사히 착석하는 모습을 확인하고 소마는 회합장을 나갔다. 무슨 일이 생길 때 돌입하기 용이하도록 장지문 건넛방에 대기하고 있겠노라 미리 언질 해두었다.
쿠리야마는 콘도보다 좀 더 연배가 있는 사람이었다. 키가 크고 풍채가 좋아, 어쩐지 콘도와 비슷한 시원스러운 느낌이었다. 인상도 조금 비슷할까? 주위 사람들의 이야기를 넉살좋게 받고 너스레를 섞어 막힘없이 대답했다. 호인(好人)같은 그가 꿍꿍이 깊은 간자일 거라곤 도무지 상상이 되질 않았다.

“키타카와 님은 콘도 님과 오래 아셨습니까?”

쿠리야마는 넌지시 산난을 향해 물었다. 키타가와? 치즈루가 가명의 의미를 생각하고 웃음을 터트릴 뻔 했다. 산난(山南)이니 키타가와(北川). 단순한 도식이지만 묘하게 산난 답다고 생각해버렸다. 산난은 싱긋 웃고 철저히 본심을 감춘, 어디까지나 예의 바르고 온화하며 인자한 태도로 대답했다.

“그리 오래 된 인연은 아닙니다만, 콘도 씨의 인품에 반했다고 할까요. 작은 연이 있어 어쩌다보니 이런 자리까지 동행하게 되었군요. 흔쾌히 받아들여주셔서 감사합니다.”
“콘도 님과 친분이 깊으시다면 저와도 마찬가지지요. 신선조 분이십니까?”
“공교롭게도 아닙니다. 함께 막부를 섬기는 위치긴 합니다만, 저는 단지 의사 나부랭이로 관료 여러분께 미약한 도움을 드리고 있을 뿐입니다.”

쿠리야마의 시선이 가늘어졌다. 아주 짧은 순간이었지만, 그 눈이 긴장의 빛을 띄는 것을 산난은 놓치지 않았다. 콘도는 쿠리야마를 속이는 일이 영 껄끄러운 눈치였으나 분위기를 깨지 않고 거들어 주었다.

“키타가와 씨는 여러 중신과 인맥이 있습니다. 어쩌면 쿠리야마 님과 비슷할지도 모르겠군요.”
“그렇다면 더더욱 환영합니다. 오늘은 편히 즐기시고 앞으로도 잘 부탁드립니다.”
“예에, 저야말로.”

수상쩍을 것 없는 평이한 인사말이 오갔다. 연회가 점점 무르익고, 술이 한두 잔씩 들어가며 사람들이 편히 자리를 이탈하기 시작했다. 그 쯤, 사내 한 명이 연회장으로 조용히 들어와 쿠리야마에게 뭔가 귓속말을 했다. 쿠리야마는 잠깐 바람을 좀 쐬고 오겠다며 일어나더니 사내와 함께 연회장을 나갔다.
치즈루는 마음이 불안해져서 그들을 뒤쫓고 싶은 충동을 억지로 집어삼켰다.

‘이바 씨. 괜찮은 거죠?’

자신은 반드시 콘도를 지키겠다고 약속했다. 이바는 그런 자신을 믿고, 불안해하지 않길 바랐기 때문에 굳이 함구해도 될 계획을 이야기 해주었다. 믿음을 배신하는 일을 할 순 없었다. 치즈루는 그저 마음으로만 그가 무사하길 바라고 또 바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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