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앵귀/이바x치즈루] 화신풍(花信風) - 4 (終) 글과 그림

[박앵귀/이바x치즈루] 화신풍(花信風) - 3

4.

치즈루는 일찍 눈이 떠져 문을 열고 정원을 내다보았다. 정원의 벚나무의 꽃잎은 대부분 떨어져, 이제 푸릇한 새싹이 돋아있었다. 늦장을 부린 거리의 벚나무 몇 그루만이 아직 꽃을 맺었지만 그 마저도 조만간 흩어질 것이었다. 벚꽃은 아름다웠다. 에도에 오기 전의 기억은 잃어버렸기 때문에, 치즈루가 기억하는 한 벚꽃을 보는 건 이번이 처음이었다.
어쩜 저렇게 아름다울까. 처음 핀 꽃을 보았을 때 그렇게 생각했다. 일찍 핀 목련도 보았지만 목련의 고상한 아름다움은 치즈루에게 잘 와 닿지 않았다. 아니, 그것이 ‘아름답다’라고 생각해 본 적도 없었다. 치즈루가 아름다움을 인지한 건 벚꽃을 보기 직전 만났던 사람 덕분이었다.
차가운 겨울의 끝에서 모든 것이 흐리게만 보였던 세상에 유독 환한 색채였던 사람. 그 색채가 지금 만물이 생동하는 봄의 빛깔과 닮았다는 걸 이제는 안다. 아찔할 만큼 눈부신 색채를 처음 보았고, 치즈루는 그 감각을 아름다움으로 인지했다. 그래서 이후 본 벚꽃은 아름답다고 생각할 수 있게 됐다. 앞으로 어떤 꽃을 보더라도 벚꽃만큼 아름답지는 않을 것 같았다.
일순 환영을 봤나 싶어 눈을 비볐다. 흩날리는 꽃잎의 길 아래 소년이 서있었다. 나무를 올려다보는 단정한 옆얼굴을 치즈루는 홀린 듯이 쳐다보다가 엉금엉금 기어, 종국에는 일어나 옷도 머리도 엉망인 채로 달려 나갔다.

“치즈루. 안녕하세요. 잘 잤어요?”

이바가 언제나처럼 인사했다. 치즈루는 큰 눈을 깜박이며 이바를 올려다보기만 했다.

“왜 그래요? 내 얼굴에 뭐라도 묻었나요?”

슬픈 예감이 들었다. 꽃이 피면 언젠가 진다. 꽃이 필 무렵 바람처럼 나타난 사람이었다. 왜 하필 오늘일까. 치즈루는 영문을 알 수 없는 답답함에 넋을 잃었다.

“머리 묶어줄게요.”

이바는 치즈루의 상태를 살피다가 손을 끌어 마루 계단으로 데려갔다. 치즈루의 방에서 빗과 빨간 머리끈을 가져와 엉망으로 흐트러진 머리카락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처음 만났을 땐 어깨에 닿는 길이었던 치즈루의 머리카락은 제법 길어 등에 닿았다.

“어떻게 묶어줄까요? 양 갈래를 해도 귀여울 테고, 땋아도 예쁠 텐데.”

치즈루는 잠깐 말이 없다가 작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하치로 오빠처럼……”

이바는 조심조심 치즈루의 머리카락을 한데 모아 올려 묶었다. 거울을 가져와 보여주자, 치즈루는 그 모습이 썩 맘에 드는지 볼을 붉히고 살며시 웃었다.

“마음에 드나요?”
“응-”
“치즈루에겐 역시 빨간색이 잘 어울려요.”

치즈루는 다시 또 이바의 얼굴을 가만히 응시하다 안아 달라 졸랐다. 평소에 피우지 않는 어리광을 조르는 치즈루가 낯설고 당혹스러웠지만, 이바는 순순히 청을 들어주었다. 여전히 이바의 가녀린 두 팔은 치즈루를 안고 오래 버티는 게 힘들었다. 팔에 감각이 없어져가도 이바는 묵묵히 치즈루를 안고 있었다.

“치즈루.”

혹여 잠이 들었나 싶어 이바가 소녀의 이름을 불렀다. 품에서 목소리에 반응하듯 치즈루가 부비적거렸다. 이바는 울컥하고 치미는 감정을 깊은 호흡으로 가다듬고, 조용한 목소리로 말했다.

“당신에게 부탁이 있습니다.”

치즈루는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열심히 검술 수련을 해서 강해지려고 해요. 그래서 정말로 당신을 지킬 수 있고, 부끄럽지 않은 사람이 되면……”

다시 또 샘솟는 슬픔을 마른 침과 함께 삼켰다. 울지 않기로 약속했다. 부친과, 자신에게.

“반드시 맞이하러 올게요. 그러니까, 만약 그 때 치즈루가 날 기억한다면요.”

한심한 말을 하지 않도록 몇 번이나 말을 골랐다.

“그 땐, 저를 선택해 주었음 해요.”

말하면서도 얼마나 터무니없는 부탁인지 우스워 헛웃음이 나왔다.
치즈루가 자신을 어떻게 보고 있는지 모르지 않았다. 치즈루가 처음 울음을 터트렸을 때, 가지 말라며 찾았던 오빠는 자신이 아니었다. 코도는 치즈루가 고향에서 일어난 사고로 친오빠를 잃었다고 이야기 해주었다. 큰 충격으로 사고 자체의 기억은 잃었으나, 종종 그 때의 감정 때문에 힘들어 한다고 알렸다. 치즈루가 무의식적으로 자신에게서 잃어버린 친오빠를 찾고 있다고 생각했다.
기쁘면서도 서운했다. 치즈루의 의지가 온전히 이바 자신을 향한 것이 아니기에, 더더욱 강해지고 싶었다. 자신을 선택하지 않더라도, 단지 누군가의 대신이 아니라 이바 하치로라는 사람 자체로 봐준다면 좋을 터였다.

“당신은 내겐 처음으로 지키고 싶은 사람이에요. 지킴받기만 했던 저를 누군가가 의지 할 수 있는 사람으로 만들어주었어요. 내가 강해지면 반드시 당신을 지키겠어요. 그러니까……”

저린 팔에 억지로 힘을 들여 치즈루의 작은 몸을 꽉 끌어안았다.

“제발, 슬퍼하지 말아주세요. 웃으면서 행복하게 지내주세요.”

그 말은 마치 주술처럼 치즈루에게 감겨들었다. 치즈루는 이제 일어날 일이 이별임을 깨달았다. 떠나간다. 아름다운 봄이 떠나간다. 상실이 얼마나 클지 예상할 수 없었다. 치즈루는 필사적으로 무언가를 잡으려고 했다. 떠날 이바를 잡을 수는 없었다. 이바의 고통과 결심을 헛되이 만들고 싶지 않았기에, 대신할 무언가를 필사적으로 잡으려고 했다.

“도련님. 이제 가셔야합니다.”

이바를 데려온 하인이 코도와 함께 정원으로 와 돌아갈 시간을 알렸다. 이바는 절망적인 낯빛이 됐지만, 곧 추스르고 고개를 끄덕였다. 치즈루도 선선히 몸을 일으켰다. 눈은 빨갛게 충혈 돼 있었다. 필사적으로 울음을 참은 탓이다. 치즈루는 코도에게로 달려가 뒤에 숨어버렸다.

“그간 감사했습니다. 코도 씨.”
“건강하게 잘 지내게. 나야말로 고마웠네.”

깍듯이 인사하고 이바는 하인과 함께 진료소를 나섰다. 쉬이 떨어지지 않는 다리를 질책해 천천히 걸었다. 뒤를 돌아보고 싶은 충동을 억눌렀다. 터져 나오려는 오열을 눌러 죽였다.
꽃바람이 불었다. 바람이 코도 뒤에 숨어있던 치즈루의 등을 떠밀었다. 치즈루는 행여 자신이 달려가 이바를 붙잡을까봐 한쪽 손을 코도의 손에 단단히 얽고 소리쳤다.

“하치로 오빠!”

그 목소리가 결국 이바의 발을 붙들었다. 이바가 돌아본다.
치즈루는 울면서, 또 있는 힘껏 웃으면서 손을 흔들었다.
이바도 웃었다. 마주 손을 흔들어 인사에 화답했다.

“또 봐요, 치즈루. 반드시 또 만나요!”

기약 없는 말과 약속을 남기고 소년은 미련 없이 떠나갔다. 치즈루는 그 모습이 사라지고서도 한참을 서있었다. 꿈같은 벚꽃의 시간이 종언을 고했다.

연이어 큰 이별을 겪은 치즈루가 행여 다시 마음의 병을 얻지 않을까 코도는 걱정했다. 치즈루는 전처럼 감정을 잃거나 하지는 않았다. 하지만, 아픈 기억만큼은 다시 또 망각하기를 선택했다. 이별의 고통 대신 치즈루가 필사적으로 잡은 것은 ‘이별에 슬퍼하지 않고 행복하게 지내는 앞날’이었다. 이바가 당부했던 삶을 살기 위해 역설적으로 소년을 잊어버리기로 한 것이다.
시간이 흘러 계절이 다시 돌아올 무렵, 치즈루는 이바의 존재를 완전히 잊어버렸다. 코도도 굳이 이바의 이야기를 꺼내 치즈루의 마음을 건드리지 않았다. 몇 달간 잠깐 놀았을 뿐인 타인의 존재는 몇 년도 채 되지 않아 기억에 남지 않을 공산이 컸다. 그 시기가 좀 더 빨리 찾아왔을 뿐이라 생각했다.


이윽고 10년의 시간이 흘러-

“올해 벚꽃도 참 예쁘게 피었네요.”

치즈루는 밝고 건강하게 자라, 타인의 마음을 이해하고 보듬을 줄 아는 당찬 소녀가 되었다. 진찰부를 정리하던 코도가 치즈루의 시선을 따라 정원을 보자 하얀 벚꽃이 만개해 자태를 뽐내고 있었다. 치즈루는 마당의 벚나무를 볼 때마다 그리움을 만면에 가득 품었다. 코도가 문득 생각나 물었다.

“어릴 때 일을 기억하느냐? 다섯 살 때쯤.”

치즈루는 미간을 찡그리고 고민하다 고개를 저었다.

“십년 전의 일이잖아요. 잘 기억이 안 나요. 그 때 무슨 일이 있었더라?”

여전히 치즈루는 기억하지 못했다. 이바에 대해 기억한다면 직전 유키무라 마을의 일도 떠올릴 공산이 컸으므로, 코도는 복잡한 심경으로 안도했다.
이바 도장의 젊은 사범이 쇼군의 근위대에 속했다는 이야기를 최근 풍문으로 들은 터였다. 심형류는 혈통으로 이어지는 유파가 아니니, 그가 과거 코도와 치즈루가 만났던 이바인지는 확신할 수 없었다. 설령 그 소년이라 할지라도 분명 치즈루에 대한 일도 한 때의 추억으로 잊혔을 것이다.

“아이의 시간이란 참 무정하기도 하지.”
“갑자기 무슨 말씀이세요.”
“아니. 아무 것도 아니다.”

치즈루가 싱겁다 핀잔을 주며 청소 준비를 했다. 소매끈을 묶고 곧 빨간 머리끈을 꺼내 긴 머리를 올려 묶었다.

“그러고 보니 언제나 그 끈으로 머리를 묶는구나.”
“빨간색이 제게 어울린다고 하셨잖아요. 이렇게 올려 묶는 머리도요.”
“난 그런 말을 한 적이 없는데.”
“아버님이 아니셨어요? 분명 누군가가……”

치즈루는 곰곰이 기억을 더듬었지만 아무래도 생각나지 않았다. 코도는 기분 탓이라며 손을 젓고 뒷정리를 치즈루에게 맡긴 채 자리를 떠났다. 빗자루를 들고 멍하니 서있던 치즈루가 밖에서 불어온 꽃향내 가득한 바람을 맞았다. 툭, 눈물 한 방울이 떨어졌다.

“어, 어째서?”

눈에 먼지가 들어간 것도 아닌데 돌연 나온 눈물에 치즈루가 당황했다. 누군가의 체온을 닮은 따듯함이었다. 그런데 그게 누구였는지 기억이 나질 않았다. 치즈루는 영문 모를 슬픔에 소리 없이 울었다.
벚꽃을 아름답다고 생각한 게 언제였는지, 누군가와 한 비밀스런 약속도 기억나지 않았다. 사실은 잊어버려선 안 됐는데, 잊어버리고 말았다. 참을 수 없이 공허하고 슬펐다.
치즈루는 바랐다. 이렇게나 애절한 그리움이라면 언젠가 기억할 수 있기를, 진심으로.


<終> 20170427 RALL in <박앵귀 ~진개~ 바람의 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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