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앵귀/이바x치즈루] 하계열(夏季熱) - 6 (終) 글과 그림

[박앵귀/이바x치즈루] 하계열(夏季熱) - 5

6.

찻집으로 돌아오자 오센과 키미기쿠가 반갑게 맞아주었다. 답례를 겸해 식사 자리를 마련하였으니 먹고 가라는 제의를 이바와 치즈루는 거절하지 않았다. 찻집 2층 개인 다실에 여느 고급 요릿집 못지않게 음식이 준비되어 있었다.
네 사람은 창밖의 떠들썩함과 간간이 들려오는 축제 음악 소리를 벗 삼아 느긋하게 식사했다. 분위기가 무르익자 찻집 주인이 좋은 술이라며 백자 병과 잔을 가져다주었다. 키미기쿠가 오센 부터 차례대로 술을 따라주었다.

“난 정말로 술을 못 마셔.”

치즈루가 잔을 내려다보며 곤혹스러워했다.

“한 잔 정도는 괜찮아. 그렇게 독한 술도 아니고. 히나 마츠리에 시로자케(白酒) 정도는 마시지 않았어?”

시로자케라는 말에 치즈루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이바가 어색하게 웃으며 설명했다.

“일전에 시로자케 한 잔으로 쓰러졌던 적이 있습니다.”
“어머나.”
“정말?”

오센과 키미기쿠가 의외라며 눈을 깜박였다. 이바의 말 대로, 올해 봄 치즈루에게 히나 마츠리의 분위기를 즐기게 해주려고 마련했던 자리에서 치즈루가 시로자케를 마시고 취해 쓰러졌던 일이 있었다. 오센은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어쩌면 술이 안 맞았던 걸 수도 있어. 맑은 술은 잘 마셔도 탁주에는 금방 취하는 사람들도 있으니까. 이건 정말 맛있는 술이니 한 모금 정도는 마셔봐.”
“그럼 한 모금만.”

제안을 계속 거절하는 것도 도리가 아니라 생각해 치즈루는 조심조심 잔을 입에 가져다 댔다. 달콤한 복숭아 향이 먼저 코를 간질였다. 입술을 적시듯 한 모금 흘려 넣자, 부드러운 단맛과 약간의 쓴 맛이 감미롭게 퍼졌다. 오센이 ‘정말 맛있는 술’이라고 한 이유를 알았다.

“맛있어.”
“그렇지? 이 집에선 주인이 계절마다 제철 과실로 술을 담그거든. 훌륭한 맛이라 종종 사러 오게 돼. 이바 씨 입엔 맞으려나?”
“물론입니다. 이렇게 훌륭한 풍미의 술은 처음 맛봅니다.”

이바도 감격한 표정으로 빈 잔을 내려다보았다. 오센은 기뻐하며 잔을 채워주었다. 치즈루도 이 술이라면 어쩌면 마실 수 있을지도 모른단 생각이 들어 몇 번씩 천천히 나누어 마셨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키미기쿠가 작게 소리 내 웃었다.

“어쩐지 삼삼구도(三三九度:결혼식에서 부부가 잔을 나눠마심)처럼 보이네요.”

콜록! 치즈루가 사래 들려 기침을 했다. 이바가 괜찮으냐며 물을 챙겨주었다. 치즈루가 새빨갛게 달아올라 항변했다.

“부부 흉내는 끝났어요!”
“어머, 농담이니 그렇게 당황하지 마세요.”
“모두들 절 놀리기만 하고-”

치즈루는 요 며칠 내내 놀림 받는 처지에 화가 나는지 홧김에 술을 전부 털어 마셨다.

“치즈루, 그렇게 갑작스레 마시면 안 돼요.”

이바가 말렸다. 이미 취기가 좀 올라 있었던지, 감정이 격해진 바람에 눈에 눈물까지 그렁하며 치즈루는 혼자 술을 따라 마시고 또 마셨다. 오센과 키미기쿠는 제지할 생각은 하지 않고 호기심 가득한 표정으로 치즈루의 행동을 구경했다.

“내가, 이바 씨한데, 맞는 샤람일 리가, 없는데-”

급기야 혀가 꼬인다. 보다 못한 이바가 잔과 술병을 빼앗자, 치즈루는 훌쩍훌쩍 울면서 이바에게 팔을 뻗었다.

“하치로 오빠아-”

의외의 부름에 굳어버린 이바의 목에 팔을 감고 매달리듯이 안겼다. 어머, 어머머. 오센과 키미기쿠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두 사람은 사태를 파악하고 음흉하게 웃었다.

“키미기쿠. 우린 이만 퇴장할까나.”
“그러시죠, 공주님.”
“저, 저기, 두 분!”
“이바 씨, 오늘은 감사했어요. 치즈루에게도 고맙다고 전해주세요.”

오센은 산뜻한 웃음을 지으며 작별인사를 하고 이바의 구원 요청을 칼같이 거절했다. 그들이 나가고 방에 둘만 남았다. 이바는 안절부절 못하다가 계속 훌쩍거리며 우는 치즈루의 등을 다독였다. 치즈루는 계속 이바를 ‘하치로 오빠’라고 부르고 있었다.

“하치로 오빠, 가지 마. 나 두고 가지 마.”

자신을 ‘이바 씨’라 부르는 치즈루가 아닌, 어린 시절 함께 놀던 치즈루의 언행이었다. 이바는 복잡한 심경으로 고소를 지었다.

“사실은 그렇게 말하고 싶었…… 오빠가 싫어할 까봐, 그래서, 말하지 못했어.”
“미안해요. 치즈루. 그렇게 떠나버려서 미안해요.”

마지막 작별을 기억한다. 꽃이 지던 날 꼭 다시 만나자고 약속하고 소녀를 뒤로한 채 떠나던 날의 기억이 어제 일처럼 선명했다. 어린 시절의 이바는 남겨진 사람의 마음까지 모두 헤아릴 수 없었다. 이별에 무너진 자신의 마음을 수습하기도 급급해서, 치즈루가 얼마나 상처받고 외로워할지 생각하지 못했다.
교토로 와, 거리를 걷다 치즈루를 발견했던 때의 기억도 떠올랐다. 이바는 한 눈에 소년의 모습을 한 그녀가 어린 시절부터 마음에 두었던 치즈루임을 알아보았다. 그러나 앞에 나설지는 바로 결정하지 못했다. 뒤늦게 남겨진 사람의 마음을 떠올렸기 때문에. 행여 치즈루가 자신을 원망하고 있으면 어쩌나 하는 불안과 죄책감 때문에. 치즈루가 자신을 기억하지 못한다는 아쉬움은 동시에 일말의 안도감이 들기도 했다. 아무리 사정이 있대도 ‘버리고 떠났다’는 진실만큼은 변하지 않기에 이바는 언제나 치즈루에게 빚을 지고 있다 생각했다.

“외로웠지요. 힘들었지요? 두고 가서 미안해요. 이젠 두 번 다시 그러지 않을 게요.”

아직도 자신은 치즈루에게 어울리고, 선택해 달라 청할 만큼 당당한 사내가 아니었다. 그러나 두 번 다시 치즈루의 손을 놓지 않을 거라는 결심만큼은 재회한 순간부터 변함없었다.

“제가 속죄하게 해주세요.”

흘러내린 치즈루의 머리카락을 조심스레 넘겨주고 속삭였다.

“당신을 외롭게 만든 죄를 사해 받을 기회를 제게 주세요.”
“떠나지 않을 거죠?”

치즈루가 고개를 들어 이바와 시선을 마주했다.

“네. 절대로. 당신이 바란다면. 약속하겠습니다.”

울던 치즈루가 배시시 웃었다. 그러고선 훅 정신을 잃고 잠들었다.

“정말 당신이란 사람은 손이 많이 가네요.”

이바는 싫지 않게 웃고 치즈루를 바로 눕혀 무릎베개를 해주었다. 오센이 부탁하고 갔는지 머잖아 주인이 차갑게 적신 수건을 가져다주었다. 이바는 잔뜩 열이 오른 치즈루의 이마며 볼을 꼼꼼하게 수건으로 닦아주며, 샘솟는 사랑스러운 감정에 행복을 느꼈다.

치즈루가 심한 두통에 신음을 흘리며 눈을 떴다. 축 처져있던 몸이 뒤늦게 깨어나자, 누군가의 등에 업혀있단 사실을 알았다. 볼에 닿는 머리카락이 간지러웠다. 머리카락과 닿아있는 옷자락에서 여름의 습한 공기에 어우러진 여린 백단 향이 났다. 치즈루는 최근 그 향에 익숙해진 참이었다.

“깼어요?”
“이바 씨? 제가 어떻게 된 거죠?”
“홧김에 술을 그렇게 마셨으니까요. 가급적이면 깨어날 때 까지 거기에 있고 싶었지만, 더 늦어졌다간 신선조 사람들이 걱정할 테니 데리고 나왔습니다.”
“죄송해요! 제가 걸을 게요.”
“괜찮습니다. 무리 하지 말아요. 아직 팔에도 다리에도 힘이 없죠?”

정확히 지적당해서 치즈루는 면목이 없었다. 고개를 들면 어지러움이 밀려왔고 몸에 힘이 들어가지 않았다. 바보 같은 짓을 했다고 자괴감이 들었다.

“당신을 말리지 못한 제 탓도 있으니까 자책하지 말아요. 달이 보여서 다행이네요.”

비가 간간 뿌리던 날이 개어 밝은 달이 길가를 환하게 비추고 있었다. 치즈루를 업느라 등롱을 들지 못했지만, 달빛 덕에 길 가는 어려움은 없었다.

“혹시 제가 이상한 말이나 잠꼬대를 했나요?”

치즈루가 불안해 물었다. 술을 홧김에 마시고 정신이 혼미해진 기억은 났다. 그 뒤의 기억은 절단 나버렸다. 그러나 정신을 잃은 도중, 뭔가 이바와 관련 한 슬픈 꿈을 꾼 것 같았다.

“글쎄요.”

이바는 제대로 대답하지 않고 말을 얼버무렸다. 웃음기 섞인 대답에 치즈루의 불안이 커졌다.

“스스로 기억해 보세요.”
“시…… 심술쟁이.”
“치즈루는 언제나 제 일에 대해선 잊어버리니까요.”

치즈루가 앓는 소리를 내며 저항하지 못했다.

“어릴 때 이렇게 당신을 업어주었는데, 그건 기억하고 있습니까?”
“어렴풋이, 요.”
“당신은 노을이 불처럼 타오르는 날을 유독 무서워했었어요. 잔뜩 겁에 질려서 우는 당신을 이렇게 몇 번 업어서 달래준 적이 있었습니다. 등에 얼굴을 묻고 바깥을 보지 않으려고 했어요.”

이바가 들려주는 어린 시절의 이야기가 낯설지 않았다. 다른 누가 말했다면 그랬나? 하며 의문을 가질법한 이야기도 그가 말하면 마치 잠들어있던 기억을 일깨우듯 현실로 여겨졌다.
실제로 치즈루가 어릴 때에는 붉게 지는 노을을 무서워했다고 코도가 이야기 한 적도 있었다. 그땐 정말 자신이 그랬는지 잘 와 닿지 않았지만, 지금은 확실히 감정이 되살아났다. 반사적으로 이바의 옷자락을 꾹 쥐었다.

“그대로 잠드는 바람에 떼어놓질 못해서 코도 씨가 곤란해 했었어요. 어쩐지 그 때 일이 생각나네요.”

두려움은 잠시였다. 이바의 곁에서 두려움은 아주 잠깐 스쳐 지나갈 뿐인 바람에 불과했다. 그 때부터 이바는 자신을 지켜주었던 것이다. 정체를 알 수 없는 불안으로부터 최선을 다해서.

“고맙습니다.”

치즈루는 그 말 외에는 마음을 표현할 방법이 없다고 생각했다.

“그건 언제를 향한 감사인가요?”

이바가 쿡쿡 웃었다. 치즈루는 샐쭉해져서 이바의 뒷머리를 살짝 잡아당겼다. 아야야. 이바가 엄살을 부렸다.

“어릴 때랑 지금 둘 다인 게 당연하잖아요. 이바 씨, 오키타 씨 같아요. 자꾸 심술만 부리시고.”

오키타를 닮았다는 말은 꽤 충격이었던 것 같다. 이바는 그런가, 오키타 군인가, 하며 복잡한 심경으로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별스럽지 않게 던진 말이었는데 이바가 저런 모습이자 치즈루가 낭패했다.

“알겠습니다. 너무 심술부리지 않을게요.”

급기야 아주 강하게 결의한 목소리로 다짐하는 게 아닌가. 곧 이바가 화제를 돌렸다. 치즈루는 그럴 의도가 아니라고 말 할 때를 놓쳐버리고 말았다.

“그러고 보니, 결국 그 수상하다던 가게는 못 갔군요.”

또 잊어버리고 만 술집에 대해 떠올리고, 치즈루는 깊은 자책에 빠졌다.

늦게 돌아온 서본원사는 고요했다. 부동당촌에 마련된 새 둔소로 이미 대부분의 대사가 이전한 상황이었다. 이바는 치즈루가 곤란해지지 않도록 입구 근처에서 내려주었다. 두 사람은 먼저 왜 이렇게 늦게 왔냐고 타박하는 히지카타에게 사과하고, 일이 잘 마무리 되었으며, 어릉위사 쪽 사람들이 사태를 먼저 수습하게 되어 그쪽으로 신변을 인도했다고 보고했다.
사이토와 헤이스케의 이야기가 나오자 히지카타는 복잡한 표정을 지었을 뿐, 다른 말을 덧붙이지 않았다. 행여 크게 화를 낼까 걱정하던 치즈루는 안도했다. 보고를 마치고서 이바가 인사했다.

“감사합니다, 토시 씨.”
“무슨 싱거운 소릴 하냐. 내 쪽이 할 말이다.”

히지카타는 치즈루 쪽을 힐끗 돌아보고 대답했다. 치즈루는 히지카타와 이바 사이의, 자신은 알지 못하는 어떤 일이 궁금했지만 굳이 물어보지 않았다.
떠나려는 이바를 치즈루가 배웅했다. 이바는 내일 요이야마 행렬 순찰을 마지막으로 다시 에도로 돌아간다고 했다.

“이번에 돌아가면 늦은 가을 까지는 뵙지 못할 것 같습니다.”
“편지 쓸게요.”
“기쁘게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입구로 가는 길이 끝나지 않았으면. 치즈루는 곧 이어질 헤어짐이 싫었다. 아직 술이 덜 깼기 때문일까. 어린아이처럼 이바의 옷자락을 붙잡고, 가지 말라고 떼를 쓰고 싶었다.
입구 앞에서 이바가 걸음을 멈췄다.

“치즈루.”
“네?”
“먼저 들어가세요.”

이바가 배려를 담아 말했다.

“제가 떠나는 모습을 언제나 바라보고 있었잖아요? 오늘은 그러지 말아요.”

돌연 눈물이 날 뻔 했다. 치즈루가 마른 침을 삼키고 거절하려 했으나, 그러지 못했다. 오늘은 이상하게도 그가 떠나는 모습을 보고 싶지 않았다. 그 마음을 헤아려준 이바가 신기하고, 고마웠다.

“건강하게 또 만나요.”
“……네. 조심해서 돌아가세요.”

치즈루가 몸을 돌렸다. 이바는 작은 등이 시야에서 사라질 때 까지, 그 후로도 좀 더 오랫동안 지켜보고서 자리를 떠났다. 약속했어도 결국 다시 어기고 마는 처지에 쓴웃음이 나왔다. 지금은 서로의 입장과 의무에서 떠나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렇게 남아있기를 각자가 선택했기 때문이었다.
돌아가는 길을 걷다 이바는 고개를 하늘로 들어 올리고 눈을 감았다. 가슴에, 등에 치즈루가 닿았던 곳 마다 열이 났다. 안아주는 것도, 업어주는 것도, 어릴 땐 자연스러웠던 일들이 지금은 다른 감각으로 남아 이바의 마음을 크게 뒤흔들었다. 여름의 열기에 취했으려니. 이바는 애써 탓했다. 축제동안의 꿈도 내일이면 끝날 테니 이 열기도 분명 그리할 것이라고.

허나 발병한 열병은 그리도 쉽게 낫지 않아, 이바는 그 후로도 제법 오랜 시간 달콤한 아픔에 시달리고 말았다.


<終> 20170522 RAL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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