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앵귀/이바x치즈루] 중양국(重陽菊) - 1 글과 그림

- 게이오 2년 가을, 도쿠가와 이에모치 사후 시점
- 박앵귀 내 등장인물 제외 한자 표기 인물은 역사 내 실존 인물, 나머지는 창작


중양국(重陽菊)


1.

게이오 2년(1866년), 9월.

쇼군 도쿠가와 이에모치의 사후, 막부 내의 분위기는 무겁고 긴밀하게 흘러갔다. 후계자는 권세 있는 로쥬(老中, 막부의 고위관료)들의 공세로 히토츠바시 요시노부(一橋慶喜, 훗날 도쿠가와 요시노부)로 확정 된 것이나 다름없었으나, 정작 요시노부 본인이 한사코 쇼군 자리를 사양하고 있었다. 2차 초슈 정벌이 대패로 끝나고 지킬 자의 자리가 계속 공석이니 근위대의 업무도 자연히 줄어들었다.
틈을 타, 이바는 유키무라 코도를 찾는 일을 게을리 하지 않았다. 마츠모토 로준과 정기적으로 연락을 주고받으며 수소문을 거듭해 코도의 행적을 찾았다. 그런 이바에게 ‘어쩌면 네가 찾는 사람에 대한 정보를 들을 수 있을 지도 모른다’며 조언한 사람이 같은 근위대 소속의 히토미 카츠타로(人見勝太郎)였다. 그는 교토 출신으로, 비슷한 나이대의 이바와는 죽이 잘 맞는 동료였다.

“어차피 자네 교토에 갈 것 아닌가? 그렇다면 오가사와라 님의 저택에 가 보는 게 좋을 거야.”
“로쥬 오가사와라 나가미치(小笠原長行) 님의?”
“동생인 오가사와라 야스노부 님의 저택이네. 내 부친과 개인적으로 친분이 있는 분인데, 여러 방면의 사람들을 만나는 걸 좋아하셔. 실력 있는 난방의라면 어쩌면 알고 계실지도 모르지. 원한다면 연통을 넣어서 자네와 만날 수 있게 해 주겠네.”

이래저래 단서가 막연한 일이었다. 조금이라도 가능성이 있다면 거절할 이유가 없었다. 이바는 히토미에게 깊은 감사를 전하며 호의를 받아들이기로 했다. 두 사람은 함께 에도성을 나오며 여러 이야기를 했다. 차기 쇼군에 대한 이야기부터 근위대의 행보, 서로 부친과 가문의 이야기도 시시콜콜 나누었다. 히토미는 대화의 말미에 슬쩍 운을 띄우듯 물었다.

“자네는 마음에 둔 정인은 없나?”
“갑자기 무슨 말씀이세요.”
“혼기도 찼겠다, 주변에서 가만 놔두질 않는 백석(白晳)의 미장부(美丈夫)가 어떤 유혹에도 굴하지 않고 버티고 있는 데는 그만한 사정이 있으리라 생각해서 말이야. 그리고 자네가 2년 전 처음 쇼군 공을 모시고 교토에 갔을 무렵부터 묘하게 분위기가 바뀌었는데, 내 착각인가?”

이바는 내심 뜨끔하였지만, 평정을 가장했다.

“아직 그런 데엔 관심이 없습니다. 그저 옛 친구들을 만나서 기뻤을 뿐이에요.”

물론 2년 전 교토에서 이바는 소중한 사람들과 재회했다. 우는 아이의 울음도 그치게 만든다는 신선조가 그들이었고, 또……

‘치즈루는 잘 지내고 있을까?’

이바가 무의식적으로 가슴께를 만지작거렸다. 품속에는 얼마 전 교토에서 당도한, 무엇과 바꿀 수 없이 아끼는 소녀의 안부 서한이 들어 있었다. 이바는 그 서한을 부적처럼 품고 다녔다.
10년도 전 다섯 살 소녀와 여덟 살 소년은 소꿉친구였다. 소년은 자신의 약함을 통감하여 소녀를 지킬 수 있는 사내가 되겠다고 약속했다. 그렇게 헤어진 뒤 오랜 시간 만나지 못하다 2년 전 우연히 교토에서 재회했다. 소녀, 유키무라 치즈루는 이바 하치로에게 삶의 목적이었고 누구보다 지키고픈 사람이었다.
지금은 사정이 있어 치즈루는 신선조와 함께 지냈다. 때문에 신변에 큰 위험은 없을 테지만, 자유롭지 못한 치즈루의 처지를 돕고자 이바는 그녀의 아버지인 코도를 찾는 데 힘을 보태고 있었다. 마음은 언제나 치즈루의 곁이어도 현실이 발목을 잡는다. 이바는 그 점이 못내 아쉽고 서운했다.

“그래? 없단 말이지.”

히토미는 이바의 옆얼굴을 물끄러미 바라보다 의미심장한 어조로 말을 맺었다. 악우인 모토야마 코타로 만큼은 아니어도, 꽤나 오지랖이 넓고 호사가 기질인 히토미라면 더 물고 늘어질 것이라 예상했으나 그러지 않았다. 이바는 별 일도 다 있다 생각하여 고개를 갸웃했다.
거리로 나와 길이 갈라지는 데에서 히토미가 이바의 어깨를 두드렸다.

“그럼 교토 잘 다녀오고. 시간이 있으면 우리 집에도 들러서 부친께 안부 전해주게.”
“알겠습니다. 도움 감사드립니다.”

히토미와 헤어진 뒤 이바는 곧 집으로 돌아가지 않고 상점가로 발길을 옮겼다. 고향의 향취가 그리울 치즈루에게 줄 선물을 고르기 위해서였다. 1년에 만날 날이 많지 않은 탓에 섭섭한 만큼 많은 것을 안겨주고 싶었다. 그 마음만큼 선물을 했다간 치즈루가 당혹스러워 할 게 분명하므로, 이바는 제법 오랜 시간 공을 들여 치즈루가 사양하지 않고 부담스럽지 않을 선물을 샀다.

여름이 떠나가고 찾아온 가을에 어느새 국(菊)의 내음이 났다. 이바는 중양절에 맞춰 교토에 다다랐다. 에도에 있을 때에는 도장 사람들이나 근위대 동료들과 함께 중양절 회합을 갖곤 했다. 멋지게 핀 국화를 장식하고, 국화차나 국화주를 곁들이며 시를 짓고 싯구를 노래하며 저문 여름의 소감과 남은 계절의 포부를 술회했다. 올해는 다 같이 모여 경사스런 회합을 맞이하기엔 전후로 사정이 좋지 않아 자중하는 분위기였다. 때문에 이바는 홀가분한 마음으로 상경할 수 있었다.

이바가 교토에 있을 때 늘 신세지는 지인의 집에 짐을 풀고 여유 없이 바로 길을 나섰다. 도쿄에서 마련해 온 선물 꾸러미를 한 손에 들고 들뜬 발걸음을 옮겼다. 노점에서 색이 고운 국화 한 다발도 샀다. 중양절이니까. 마땅한 이유를 자신에게 변명으로 붙이고 이바는 서본원사로 향했다.
사찰에 도착해 입구를 기웃거리자, 신선조 둔소가 자리한 방면 마당에 몇 사람이 옹기종기 모여 있었다. 그 중에서 치즈루의 모습을 발견하기란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가장 자그마한 키에 선이 고운 뒷모습은 단연 눈에 띄었다. 그녀는 빗자루를 든 채로 두 사람의 젊은 대사에게 뭔가를 지시하고 있었다. 이바가 이제까지 본 적 없는 얼굴인 걸 보아, 신입 대사가 아닐까 추측이 들었다.
이바는 시기를 재어 세 사람 곁으로 다가갔다. 부러 발걸음 소리를 줄이지 않아서 가까이 다가갈 무렵엔 세 사람이 자연스레 돌아보게 되었다. 치즈루의 동그란 눈이 커지고, 표정에 반가운 웃음이 떠올랐다. 이바는 이 순간이 좋았다. 소중한 소녀의 만면에 떠오르는 감정이 오직 자신을 향하는 유일한 순간이었다.

“이바 씨! 오랜만이에요. 어서 오세요!”
“건강해 보여서 다행이에요, 치즈루. 그간 잘 지냈습니까?”
“저야 잘 지냈어요. 이바 씨야 말로, 에도의 일이 바쁘지 않으세요?”
“이제 여유가 생긴 참입니다. 다른 분들은?”
“모두 별 일 없으세요. 콘도 씨와 히지카타 씨도 오늘은 모두 계세요. 마침 잘 오셨어요. 다들 반가워하실 거예요.”

두 사람이 정답게 인사와 안부를 묻고 있자니, 치즈루의 뒤에 서 있던 젊은 대사들이 상황을 궁금해 하는 눈치였다. 치즈루가 아차, 하고 소개했다.

“이쪽은 얼마 전에 입대한 대사예요. 소마 카즈에 군, 노무라 리사부로 군이에요. 지금은 콘도 씨의 급사를 맡고 있어요. 소마 군, 노무라 군. 이 분은 신선조 간부 여러분들과 친하신 막부 직참 근위대의 이바 씨.”

소마와 노무라는 이바의 소개를 듣고 잔뜩 긴장해 인사했다. 막부 직참 근위대라면 상당히 높은 신분으로 관료라는 의미였다. 이바는 두 사람이 뻣뻣하게 굳은 이유를 파악하고 손을 내저으며 말했다.

“공무로 온 게 아니니까요. 격식 차리실 필요 없습니다. 그냥 손님으로 편하게 대하셔도 괜찮아요. 두 사람은 그러면, 치즈루의 후배가 되는 겁니까?”
“예! 유키무라 선배에겐 언제나 도움을 받고 있습니다!”

소마가 자세를 바로하고 기합을 넣어 대답했다.

“정말로 선배가 아니면 큰일이었을 검다. 아무튼 잘 부탁드림다!”

사람 대함에 낯섦이 적은 노무라가 싹싹하게 인사하자 이바도 부드럽게 웃으며 잘 부탁드린다고 답했다.

“이바 씨, 안내해 드릴게요. 두 사람은 아까 지시한 대로 낙엽 청소를 부탁해. 차는 내가 내 갈 테니까.”

두 대사에게 뒷일을 맡기고 치즈루가 이바를 둔소 건물로 안내했다. 적당히 때를 보아 이바가 치즈루를 불러 세웠다. 가져온 선물 꾸러미와 꽃다발을 건네주었다.

“국화차와 곁들여 먹을 에도의 과자를 조금 사왔습니다. 꽃은 오는 길에 색이 고와서 샀어요. 어딘가 장식해준다면 기쁘겠습니다.”
“또 이런 걸……”
“오늘은 중양절이잖아요?”

중양절이란 구실에 치즈루도 선선히 납득했다.

“언제나 감사합니다. 오늘이 중양절이란 것도 몰랐어요. 차와 과자는 지금 바로 준비할게요.”
“치즈루의 분은 남겨놓아요. 그러고 보니, 요즘 타케다 씨는?”
“그 날 이후로는 괜찮아요. 소마 군과 노무라 군이 계속 곁에 있어서 좀처럼 혼자일 시간이 없기도 했고요.”

타케다의 일은 신선조 둔소에 있는 치즈루에 대한 가장 큰 걱정이었다.
신선조 간부인 타케다 간류사이는 이바를 무척 적대시 했다. 그 반발과 악의가 치즈루를 향하는 것이 이바는 늘 신경 쓰였다. 치즈루는 지난 봄 이바와 타케다의 대무 사건 이후 타케다의 신선조 내 입지가 크게 줄었고, 국장의 엄명 하에 행동을 자중하는 중이라 마찰이 일어날 여지가 없었다고 덧붙였다. 이바는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오랜만에 내방한 이바를 신선조 국장 콘도 이사미와 부장 히지카타 토시조가 반겨주었다. 세 사람이 안부를 묻는 사이 치즈루는 이바가 가져온 국화차를 우리고, 과자를 준비해왔다. 이바는 물러가려는 치즈루를 불러 동석시켰다.

“시일 내 치즈루와 외출을 해도 될까요? 그녀를 데리고 가고 싶은 곳이 있습니다.”
“이바 군과 함께인데 허가 하고 자시고 할 문제이겠나. 다녀오게.”
“이봐, 콘도 씨. 너무 무르잖아. 사정은 듣고 결정하라고.”

흔쾌히 수락하는 콘도를 히지카타가 못마땅해 했다. 하지만 히지카타도 딱히 반대하려는 눈치는 아니었다.

“데리고 가고 싶은 곳이라면?”
“실은, 제 지인이 코도 씨의 단서를 얻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며 소개해 주신 분이 계십니다. 제가 이야기를 듣고 알려드려도 괜찮지만, 혹시 치즈루에게 확인이 필요할 일이 생길지도 모르니까요.”
“그런가. 지인의 소개라면 높으신 분이냐?”
“로쥬 오가사와라 나가미치 님의 동생이신 야스노부 님이십니다. 각지에 소식이 밝으신 분이라고.”
“야스노부 님이라면 나도 들은 바가 있지. 요즘 유키무라 군, 신인 급사들의 교육이며 뭐며 바빴으니 기분 전환도 할 겸 다녀오게나.”
“가, 감사합니다.”
“그러니까 당신 너무 무르다고. 뭐, 별 일은 없겠지. 너무 나돌지 말고 적당히 돌려보내.”
“책임지고 잘 다녀오겠습니다. 좋은 소식을 들을 수 있으면 좋겠는데요.”

가능성은 크지 않았다. 만에 하나의 일이었고, 콘도와 히지카타도 코도의 소식 보다는 치즈루의 기분 전환 쪽을 좀 더 배려해 허락했다. 이바가 치즈루를 유난히 신경 쓰는 건 두 사람을 지켜본 사람들이라면 누구나 알고 있었다. 정작 치즈루는 이바가 쏟는 정성을 모르는 게 우습고 슬픈 점이었지만.

“막부 내 동태는 어떠냐.”
“로쥬들은 히토츠바시 요시노부 님을 차기 쇼군으로 확정했고, 반대 세력들도 어느 정도 정리가 된 것 같습니다만…… 막부 내 업무들이 점점 키나이(畿内, 관서지방)로 이관되고 있는 걸 보아 조만간 확정 되겠지요. 지금의 사양은 아직 마무리되지 못한 세력 정리의 시기를 요시노부 님이 재고 있기 때문이란 이야기도 있습니다.”
“이에야스 공의 재림이라 불리는 사람이니 그런 판단을 했을 지도 모르겠군. 오사카 성이 거점이 될 가능성이 크겠어.”
“그리 된다면 근위대도 거주를 오사카 쪽으로 옮기게 될 겁니다.”

치즈루는 못내 기쁜 맘이 들어 화색을 숨기지 못했다. 교토와 오사카는 가까웠다. 근위대가 오사카성에 체류한다면 이바와 만날 일도 더 많아지리라. 히지카타가 싫지 않게 빈정거렸다.

“넌 얼마나 여기에 얼굴을 들이밀 생각이냐?”
“어라, 제가 자주 오는 게 싫으신가요?”
“애초에 ‘우리’를 만나러 오는 건 맞고?”
“토, 토시 씨!”

이바가 얼굴을 붉히며 당황했다. 히지카타가 이죽거리고 콘도도 하하, 소리 내 시원스레 웃었다. 치즈루만 세 사람이 무엇을 이야기하는지 이해하지 못해 어리둥절했다. 이쯤이면 눈치가 없다 못해 괴멸이다. 히지카타는 역시 한창 나이의 처자를 야만스런 남자들이 득시글한 곳에서 남자로 생활하게 한 게 잘못이었을지 생각하고 깊게 한숨 쉬었다.

‘그렇다면 이건 어떨까?’

히지카타는 짓궂은 이야기를 꺼내놓았다.

“하치로, 슬슬 너도 혼담이 오갈 때가 아니냐?”
“예?”
“뭘 멍청하게 묻고 있어? 네가 여자들에게 인기가 좋은 건 에도에 있을 때부터 잘 알고 있으니 하는 말이다. 유력한 가문에서 네게 혼담을 넣지 않았을 리도 없을 테고, 너도 도장을 이어받을 몸이니. 부친도 서둘러 가정을 꾸리길 바라고 있지 않으냐?”

히지카타에게 설마 혼사에 대한 이야기를 들을 줄은 생각도 못했기에 이바가 바로 대답하지 못했다. 히지카타의 의도를 눈치 챈 콘도는 에도에 있을 때 이바가 뭇 아가씨들의 연서며 선물 때문에 곤란해 했다느니, 딸을 둔 지인들이 소개를 시켜줄 수 없냐는 말을 들었다느니 하며 무신경하게 거들었다. 히지카타가 치즈루의 표정 변화를 면밀히 살폈다.
치즈루는 복잡한 표정으로 눈만 깜박거렸다. 당혹에 빠진 이바를 한 번 바라보고, 찻잔을 든 자신의 손을 내려다보며 어색해 하고 있었다. 간신히 상황을 파악한 이바가 정색해 말했다.

“저는 아직 수행중인 몸입니다. 가정을 꾸릴만한 그릇이 되질 못합니다.”
“이바 군이라면 그렇게 말할 것 같았지.”
“재미없는 녀석이로구만.”

히지카타는 화제를 어물쩍 넘기며 그 순간 잠시 드러난 치즈루의 표정을 놓치지 않았다. 깊은 안도감. 비록 치즈루 자신은 자각하지 못하고 있을망정, 이바에 대한 감정은 단순한 소꿉친구는 아니리라 확신했다. 그렇다면 이후는 계기와 시간이 필요할 뿐이었다.
이바와 치즈루가 다른 대사들과도 인사하기 위해 자리를 떠났다. 히지카타가 절레절레 고개를 저었다.

“저 꼴이면 몇 년 더 걸리겠군.”
“주변에서 안달해서 될 문제겠나. 다 제각기 시기와 형태가 있는 법이지. 이바 군은 다정한 사람이니 유키무라 군도 언젠가는 알게 될 걸세. 저 둘은 그렇게 자연스럽게 맺어졌으면 좋겠다 싶고.”
“꼭 아버지 같은 소릴 하는군?”

그러는 토시야 말로. 콘도는 답을 속으로 되뇌며 아직 온기가 가시지 않은 향긋한 국화차를 마셨다. 절로 입가에 미소가 덧그려지는 향취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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