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앵귀/이바x치즈루]단잠(熟睡) - 2 글과 그림

[박앵귀/이바x치즈루]단잠(熟睡) - 1

2.

이바의 얼굴을 보지 못 한지 이틀째였다. 
나흘 일정으로 하코다테 외부의 시찰 계획이 잡혔다. 겨우내 얼어붙은 통행로를 점검하고 군량 등의 물자 수송에 차질이 없도록 조처하는 작업이었다. 이바를 포함한 유격대가 맡은 일로, 공개적으로는 이바의 급사인 치즈루도 처음에는 동행하기로 하였으나 피치 못할 사정으로 오릉곽에 남게 됐다. 얼마 전 근처에서 일어난 눈사태로 인해 갑자기 부상자가 들이닥치며 간병에 손이 모자라게 된 탓이었다. 히지카타의 부탁도 있거니와 무엇보다 부상자들이 눈에 밟혀 치즈루는 자발적으로 남기로 결정했다. 이바는 걱정하는 눈치였지만, 치즈루가 괜찮다며 잘 달래어 유격대 일원들과 그를 떠나보냈다.

외로움을 느낄 새도 없이 하루가 지나고 이틀이 저물어가고 있었다. 급하고 위중한 환자들이 안정되자 치즈루에게도 여유가 찾아왔다. 교대해주기로 한 병사에게 나머지 일을 맡기고 치즈루가 병동을 나왔다. 어제 저녁 무렵부터 내리기 시작한 눈은 그칠 기미 없이 온통 세상을 하얗게 덮고 있었다.
고작 한, 두 달 보았을 뿐인데 눈에 싫증이 났다. 높게 쌓인 눈을 보자 절로 바깥에 나간 이바 생각이 났다. 눈을 치우고 길을 트는 작업은 굉장히 고될 것이다. 거기까지 생각이 미치니 하염없이 내리는 눈이 원망스럽기도 했다.

“유키무라 선배.”

소마가 병동 현관 앞에서 오도카니 서있는 치즈루를 발견하고 다가왔다.

“추운데 왜 거기 서 계세요. 오늘은 당직이 아니지 않습니까?”
“이제 방으로 돌아가려고 했어. 소마 군은?”
“저도 겨우 사고의 사후 지시가 끝나서 돌아가려던 참입니다. 바래다 드리겠습니다. 눈이 제법 쌓여서 위험하니까요.”

치즈루는 소마의 배려를 사양하지 않았다. 병동에서 숙소가 있는 건물까지는 중정을 가로질러 꽤 걸어야 했다. 사람이 오가는 길목의 눈은 치워져 있었지만, 날이 어두웠기 때문에 소마의 말대로 위험했다. 소마가 내민 손에 의지해 두 사람은 걸음을 내딛었다.

“눈 언제까지 내릴까?”

치즈루가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소마는 질문이라 생각했는지 성실하게 답했다.

“아마도 내일 오전까지는 내릴 것 같다고 하더군요.”
“어떻게 알아?”
“부대 내에 에조치 토박이가 있습니다. 어릴 때부터 험난한 기후와 맞닿아 살았더니 날씨를 보는 감각이 탁월하다고 합니다. 이번 변두리 통행로 시찰도 조만간 폭설이 올 가능성이 높으니 미리 점검하는 게 좋다는 이야기를 들어서 시행하게 됐습니다.”
“나간 사람들은 괜찮겠지?”

소마가 치즈루를 돌아보았다. 치즈루는 오릉곽 너머의 새카만 저편을 수심 깊은 눈동자로 바라보고 있었다. 소마가 고소를 지었다.

“그럼요. 큰 문제가 생길 일이었다면 히지카타 씨는 반드시 선배를 이바 씨와 함께 보냈을 겁니다.”

치즈루는 이런 주변 사람들의 배려가 낯설기도, 부끄럽기도 했다. 오릉곽의 대부분의 사람들이 치즈루에 대해서 알고 있었다. 신선조 둔소 때처럼 존재를 숨길 필요도 없었기에, 히지카타도 굳이 치즈루를 남자라고 두둔하거나 감추려 하지 않았다. 이바와 친한 유격대의 사람들은 하물며 ‘대장의 소중한 사람’이라며 소중히 여겨주었다. 
이바와 치즈루가 에조치에 온 이후로 서로 떨어진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치즈루가 문득 생각나 물었다.

“혹시 나 모두에게 걱정을 끼치고 있어?”
“예?”
“소마 군, 일부러 병동까지 온 거지?”
“그…… 예. 하지만 결코 걱정을 끼친다거나, 그런 건 아닙니다. 정말로 어두워지면 위험하기도 하고.”

이 정직한 청년은 거짓말에 서툴렀다. 치즈루는 배려를 고맙게 받아들였다. 미안해하는 소마의 마음을 헤아려 이야기를 돌렸다.

“그러고 보니, 에도에 돌아와서 이바 씨 댁에서 지낸 이후로 이렇게 떨어져본 적은-”

처음이었다.

우뚝. 치즈루의 걸음이 멈췄다. 소마가 의아해하며 돌아보자, 치즈루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치즈루는 공황에 젖어 어쩔 줄 모르는 표정으로 몸을 웅크렸다.

“선배? 괜찮습니까?”

이바가 없다.
몇 달간, 곁에 있는 게 당연했던 사람이, 없다. 언제나 치즈루의 불안을 감싸 안아주던 사람이 없었다. 잠깐 떨어져 있을 뿐이었는데, 치즈루는 그간 인지하지 못했던 공포와 두려움과 피로감이 한꺼번에 몰려드는 감각에 그만 정신을 잃어버릴 뻔 했다.
다가와 부축해주려는 소마의 팔을 뿌리치고 치즈루는 내달렸다. 소마가 치즈루를 불렀지만 귀에 닿지 않았다. 무겁게 떨어지는 눈도, 차가운 공기도, 치즈루의 마음속까지 침투해 날카로운 손톱마냥 사납게 긁어댔다. 아픔에 치즈루의 눈에서 눈물이 쏟아졌다.

‘왜, 왜 이렇게까지, 왜?’

이바와 함께하기 전에는 이런 두려움이 있는 줄 몰랐다.
이바와 함께한 이후에도 이런 두려움이 있는 줄 몰랐다.
그리고 이바가 없자, 생각해 본 적 없는 두려움이 고개를 내밀었다. 
치즈루의 안에서 미처 소화되지 못했던 어두운 마음이었다. 이제까지 잘 견뎌냈던 감정들이 지금은 수습할 수 없이 터져 나와 엉망진창이었다. 이바가 죽을 위기에 처해 눈을 뜨지 못했던 때에도 꿋꿋하게 버텼는데, 왜 이제 와서 이런 상태인지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다.
치즈루는 살 방법을 필사적으로 찾는 동물처럼 이바의 방으로 갔다. 옷장에서 그의 겉옷 한 벌을 꺼냈고, 옷깃에 얼굴을 파묻고 소리 죽여 흐느껴 울었다. 이성적인 생각이 불가능했다. 외롭고, 슬프고, 고독하고, 무섭다는 감정만이 선명해, 옷에 남은 이바의 향취에 달라붙어 감정의 격류를 토해낼 뿐이었다.

치즈루는 책상과 벽 사이 구석에 쪼그려 앉아 이바의 옷만 꼭 끌어안은 채 굳어있었다. 밖에서 노크를 하며 치즈루를 부르는 소리가 들렸으나 반응하고 싶지 않았다. 마음속에서 이러면 안 된다고 이성적인 자신이 질책했지만, 그보다도 지치고 힘들어서 아무 것도 하고 싶지 않다는 본능이 더 앞섰다.
대답이 없자 누군가가 방 안으로 들어온 것 같았다. 신경 쓰고 싶지 않았다.
누군가의 손이 치즈루의 어깨에 닿았다. 귀찮고 싫었다. 반사적으로 뿌리쳤다.
누군가가 말을 건넸지만, 응답하지 않았다.
곁에 있던 인기척이 멀어졌다. 문이 닫히고, 치즈루는 다시 혼자되어 모든 감정을 내려놓았다. 끌어안은 이바의 옷자락만이 기댈 수 있는 전부였다.

깜박 잠들었던 모양이다. 눈을 뜨자 창 밖에서 빛이 비쳐들고 있었다. 아침이 밝았다. 그게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

‘이바 씨가 없어.’

간밤에 다 쏟아냈다고 생각한 눈물이 다시 흘러넘쳤다. 치즈루는 눈을 감고 빛을 시야에서 차단했다. 아무리 밝다한들 정말로 원하는 사람이 곁에 없는데, 아무리 눈부신 빛이라도 의미가 없다고 생각했다.
그것은 오래전 느꼈던 감정의 지문을 더듬게 했다. 치즈루의 기억 속, 아주 먼 어제, 떠나가던 하치로 오빠를 바라보던 때의 감정을. 또 경에 있을 때의 감정들도 떠오르게 했다. 처음 신선조 둔소에 잡혀왔을 때의 일, 자유를 빼앗기고 오랜 시간 머무르며 겪었던 일들, 그 때 애써 외면했던 상처들이 기회를 놓치지 않고 끌려나왔다.
또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굳어버린 몸에 힘이 들어가지 않을 쯤, 목마름과 허기에 눈이 뜨였다. 눈이 정말 그쳤는지 온화한 빛이 방 안에 가득했다. 고개를 들자 어지러움이 들어 비틀거렸다. 바닥에 쓰러진다 생각했는데, 단단한 지지대가 받쳐주었다.

“치즈루.”

다른 누군가가 아닌, 고작 며칠이었는데 몇 달은 못 본 것처럼 그리운 사람의 목소리가 가까이서 들렸다.

“이바 씨……”

갈라진 목소리가 났다. 치즈루가 아픈 눈을 깜박이며 올려다보자, 머리카락이고 옷자락이고 모두 흐트러지고 땀에 젖은 모습의 이바가 보였다. 치즈루가 이바의 목에 팔을 감았다.
이바는 아무 것도 묻지 않고 치즈루를 꼭 안아주었다. 아침 일찍 오릉곽에서 오오토리로부터 급편을 받았을 땐 놀랐다. 치즈루의 상태가 아무래도 이상하니 먼저 돌아와 달라는 요청이었다. 이바는 사색이 돼서 뒷일을 모토야마에게 맡기고 돌아왔다. 그리고 방에 틀어박힌 치즈루의 모습을 보자, 사정을 헤아리지 않아도 무엇을 해야 할지 이해했다.

치즈루는 열이 났다. 이바가 곁에 있어 안심한 탓에 무리의 반동이 닥쳤다. 이바는 저녁 늦게까지 치즈루를 간병했다. 히지카타에게는 환자들에게서 감기가 옮은 것 같다고 설명했다. 치즈루의 상태를 처음 보러 왔던 오오토리는 그 뿐만이 아님을 눈치 챘지만, 굳이 캐물으려 하지 않았다. 대신 잘 보듬어주라는 묘한 어조의 한마디를 얹었다.
겨우 열이 내려 치즈루가 정신을 차렸을 땐 밤이 깊었다. 이바를 기다리던 시간이 꿈만 같았다. 이바를 부르려 했지만 목이 막혀 소리가 나지 않았다. 이바는 치즈루의 움직임을 알아채고 물을 가져왔다. 치즈루가 직접 마시겠다고 손을 뻗었지만 제지당했다.
이바가 물을 마시고, 입술을 겹쳐 옮겨주었다. 두 번을 그렇게 옮겨주고서, 세 번째는 좀 더 오래 입술이 머물렀다. 이마가 가볍게 닿고 따듯한 숨결이 섞였다. 말 못할 안도감에 다시 또 치즈루의 눈물샘이 파열하고 만다. 이바가 손가락으로 눈물을 조심스레 쓸어주었다.

“제가, 왜 이런지 모르겠……”
“괜찮아요.”
“이, 이바 씨 때문이에요-”
“네. 알아요.”

이바는 치즈루가 걸어두었던 마음의 빗장을 쉽게 열어버리고 말았다. 삭히고만 있었던 어두운 감정이 가득한 마음을 달래고, 상냥한 목소리와 말로 속삭여 조금씩 조금씩 풀어내, 더 이상 무서워하지 않아도 된다고, 슬퍼하지 않아도, 고독하지 않아도 된다며 열어 젖혔다.

“어떡해요, 저 어떻게 하죠? 이, 이대로 아무 것도 견디지 못하게 되면-”
“그렇지 않아요. 그저 지금은 혼란스러워서 그래요. 약해진 게 아니에요, 치즈루. 걱정 말아요.”

이바의 부재를 통해 깨달았다. 지금껏 너무 많이 참아왔음을. 미련하게도 마음의 그릇이 삐거덕거릴 만큼 아픔을 삼켜왔음을.
……이바가 그런 자신을 언제나 걱정해 왔음을.

“곁에 있어주세요.”
“네.”
“이바 씨, 어디에도 가지 말아요.”
“전 언제나 당신의 곁에 있어요. 당신을 지킬게요.”

두서없는 치즈루의 이야기를 이바는 끝까지 들어주었다. 헤어짐도, 좋아하는 사람들의 죽음도, 마주했던 폭력들도. 실은 너무나도 힘들고 무서웠다고. 이제야 당신이 나를 그토록 걱정했던 이유를 알겠다고. 내가 상처 입을 바에야, 당신이 찢겨 죽는 것이 차라리 낫다고 말하던 당신의 말을, 염려를 이제야 알겠노라고.
이야기가 어디에서 끊어졌는지 알 수 없었다. 어느 순간 치즈루는 이바의 품에서 잠들었고, 이바도 그런 치즈루를 품어 안고 새벽 어둠 속에 의식을 내던졌다. 두 사람은 깊은 밤 온기를 나누어 가졌다.
그것이 서로를 지키는 유일한 방법인 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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